


전시를 앞두고 열린 시사회에서 작가는 “내 남편 도널드는 나만큼이나 돈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그를 만난 것을 최고의 행운으로 여긴다”라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이번 회고전에 대한 소회를 꺼냈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작가로서의 소신을 지켜온 그 삶이 얼마나 고단한 것이었는지를 여과 없이 드러낸다.


1960년대 여전히 카우보이 성향이 짙던 남부 캘리포니아를 무대로 활동을 시작한 작가는 백인 남성의 작품만 알아주는 편협한 아트계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정립하기 위해 분투했다. UCLA 대학원 시절, 그녀의 여성적 성향이 반영된 작품의 밝은 컬러와 유기적 형태를 향해 교수들은 혐오와 경멸을 숨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주디 시카고가 고유의 세계를 흔들림 없이 밀고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성장 배경 때문이다.
그녀는 이전 테이트 모던 뮤지엄Tate Modern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마르크스주의자였으며, 자신이 13세였을 때 세상을 떠났다고 털어놓는다. 당시 미국은 체제에 반대하는 모든 이를 공산주의자로 몰아 처벌하던 매카시즘의 시대. 그 둘의 대비 사이에서 내면의 혼란이 심했던 소녀는 남들이 말하는 것과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 둘 사이에서 무엇을 믿어야 할지 결정해야 했다. 바로 이때의 경험은 주디 시카고의 대쪽 같고 굽힘 없는 예술 세계를 위한 토양이 된다.
“나는 스스로의 비전을 따르기로 결정했습니다. 어떤 위험 부담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있어요.
미술사적, 문화적, 사회적으로 기여하기 위해 나 자신을 바칠 겁니다.” – 주디 시카고



주디 시카고의 작업에는 두 가지 확고한 방향성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소외된 대상의 목소리가 되어주는 것, 또 하나는 그 대상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 길고 철저한 리서치를 동반한다는 것이다. <다이닝 파티The Dining Party>(1974-1979)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작품이 계획되었던 이유는 여성의 공로를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 현대사회를 두고 보란 듯이 역사에 공헌한 여성들을 축하해 주기 위해서였다.


작품 속 39인의 여성 중에는 고대 여신들에서부터 중세 시대 여성 작곡가 힐데가르드 본 빙겐Hildegard von Bingen, 19세기 노예제 폐지론자 소저너 트루스Sorourner Truth, 시인 에밀리 디킨슨, 화가 조지아 오키프도 들어있었다. 작가는 12명이 넘는 여성 자원봉사자들을 참여시킨 가운데, 각 인물에 대한 철저한 리서치를 거쳐 그에 맞는 테마와 테크닉으로 제각각 독특한 세라믹 접시를 제작했다. 리서치는 물론이고 특정 테크닉을 익히기 위해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했지만 작가는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전체 작품을 완성하는 데 무려 5년이 걸렸다.


전시장에서 가장 먼저 관객을 맞는 것은 최신 시리즈인 ‘The End: A Meditation on Death and Extinction’(2015-2019).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는 작가의 이번 회고전은 최신 작품부터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며 전시된다. 그 최신 시리즈는 사람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자신의 껍질을 내주고 죽는 주목나무를 포함 인간이 자연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우려에서부터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하는 인간의 필사mortality에 대한 명상 등 작가의 최근 관심사가 담겼다.



그런가 하면, ‘Holocaust Project: From Darkness into Light’(1985-1993) 시리즈는 자신의 유대인 뿌리를 바탕으로 이어진 홀로코스트에 대한 관심이 사회 구조 너머 힘의 역학에 대한 탐구로 발전된 예다. 다큐멘터리를 보고 마음이 동화된 작가는 그 무거운 주제를 위해 무려 8년의 리서치 기간을 거쳤다고 한다. 판매를 염두에 두었다면 결코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작품이다.
한편 1980년대 초 <다이닝 파티>로 세계 순회전을 마친 작가는 대중적 인기를 얻었음에도 미술계 평단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 여성적이고 크래프트적이란 이유였다. 그러나 수백 통의 편지가 날라왔으니. 다음 작업에 함께 참여하게 해달라는 여성 관객들의 요청이었다. 그렇게 세계 곳곳의 여성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캔버스에 바늘로 수를 놓아 탄생시킨 것이 ‘The Birth Project’(1980-1985)다. 여기에서 작품의 주제는 출산이다. 이는 출산이 여성의 중요한 경험임에도 컨템퍼러리 아트의 주제로서 대우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작가의 응답이다.
“만약 남자가 아이를 출산한다면 그것을 치켜세우는 수천 개의 이미지가 있을 겁니다.” – 주디 시카고



마지막 전시장에는 1960년대 남부 캘리포니아의 보수적 선입견에 맞서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가던 작가의 초기 작업들이 있다. 여성적 컬러 사용이 두려웠던 작가는 최대한 뉴트럴 컬러를 사용했고 하나의 색 요소를 바꿨을 때 감정적, 시각적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시기 작업에서는 순환하는 기하학 형태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것의 열리고 닫히며 팽창하거나 수축하는 등의 변화는 작가 자신의 감정적 동요를 다스리는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간과하는 대상에 장애물을 없애주는 것. 지난 60년 커리어를 관통하는 주디 시카고의 테마다. 이런 그녀를 두고 액티비스트니 정치적 아티스트니 한정하는 것은 포장을 위한 미술계의 전략에 지나지 않을 터. 교과서에서 배운 것보다 훨씬 더 깊고 장대한 주디 시카고의 세계를 확인할 수 있는 전시는 오는 2022년 1월 9일까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