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복판, 수많은 이별과 재회를 품어온 옛 서울역이 올해로 준공 100주년을 맞는다. 1925년 ‘경성역’으로 문을 연 뒤, 서울역 광장은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순간들을 겪어왔다. 광복을 향한 독립운동, 1980년 ‘서울의 봄’, 산업화와 민주화의 격동까지 이어진 것이다. 교통 거점이자 역사적 무대였던 서울역은 2011년 복원을 거쳐 현재의 복합문화공간 ‘문화역서울284’로 다시 태어났다. 이곳에서 서울역 1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 〈백년과 하루: 기억에서 상상으로〉가 9월 30일부터 열린다.

서울역 100년의 기억과 무게를 마주하다
서울역은 격동의 근현대사를 지나온 수많은 이야기의 무대였다. 이번 특별전은 그 100년의 기억을 현재와 미래로 잇는다. 출발점은 중앙홀이다. 역사적 장면이 켜켜이 쌓인 이 공간에는 권민호의 작품이 자리한다. 그는 도시와 건축을 통해 기억과 사회적 맥락을 탐구해온 작가다. 〈서울의 밤〉, 〈파빌리온〉 시리즈 등에서 근대 건축이 지닌 시간의 무게를 드러냈다. 이번 전시는 중앙홀이 품어온 감정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며, 공간 자체를 기록처럼 보여준다.

먼저 〈엮어내는 기억〉에서는 옛 서울역사가 간직한 백년의 흔적을 돌아본다. 역사를 상징하는 사진과 소장품, 당시의 풍경을 담은 영상이 한자리에 모였고, 이를 풀어낸 일곱 작가의 작업이 더해졌다. 독립운동가 강우규 의사의 기록 카드, 1980년 서울역 광장에서 벌어진 민주화 시위 자료 등 굵직한 사건의 흔적도 포함됐다. 현대 예술작가 김병호, 김수자, 박경근, 신미경, 이완, 이수경, 전혜주는 도시와 건축, 일상적 오브제를 통해 서울역이 지나온 격동의 시간을 비춘다.

〈이어지는 기억〉은 서울역이 남긴 생활문화와 정서를 오늘의 감각으로 되살린다. 1930년대 1·2등 대합실은 승객들이 오가던 공간이자 맥주와 차를 판매하던 ‘맥주바’였다. 이번 전시는 그 풍경을 재현해, 당시 서울역을 통해 전달된 맥주와 디저트를 맛볼 수 있는 시음 공간으로 프로그램화했다. 철도의 개통과 함께 들어온 수입 원단이 만들어낸 새로운 패션 풍경도 오늘날 브랜드와 협업해 재현했다. 서울역 100주년을 기념해 새롭게 디자인된 패턴을 선보인다. 국순당, 서울브루어리, 연남방앗간, 오아시스레코드 등과의 협업으로 다시 펼쳐진다. 여기에 DJ 소울스케이프(박민준)의 음악이 더해져 단순한 재현을 넘어, 과거의 기억이 오늘의 하루로 이어지는 오감의 경험으로 확장된다.

우리말의 기록, 문학적 상상력을 마주하는 공간

2층으로 올라서면 분위기는 달라진다. 이 구역은 언어와 기록을 통해 미래로 이어지는 상상을 담고 있다. 중심에는 조선말 큰사전 원본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어학회가 집필하다 강제 중단된 뒤, 해방 직후 서울역 창고에서 기적처럼 발견된 원고다. 1945년 9월 8일, 2만 6,500여 장에 달하는 방대한 원고가 드러났다. 영화 〈말모이〉의 모티브가 된 자료이자 우리말을 지키려 했던 노력의 상징이다. 오늘날 보물 제2085·2086호로 지정된 사료다. 낡은 종이에 남은 필체와 교정 흔적에서는 언어를 되살리려는 간절함이 전해진다.
이곳에서는 또 다른 목소리도 만날 수 있다. 국동완, 박솔뫼, 안희연, 윤혜정, 정성갑, 최유수 등 다섯 명의 작가가 ‘서울역의 미래’를 상상해 쓴 글이 전시된다. 역사적 건축물이 문학적 상상력 속에서 어떻게 다시 해석될 수 있는지를 드러낸다. 한편 공간 한쪽에는 블루도어북스, 비룡소, 스토리지북앤필름, 어쩌다책방, 을유문화사 다섯 서점이 큐레이션한 100여 권의 책이 놓였다. 관람객은 책장을 직접 넘기며 기록과 상상이 교차하는 장면을 마주한다. 언어와 문학, 기록과 상상이 어우러져 ‘서울역의 미래’을 함께 그려보는 경험으로 이어진다.

살아있는 아카이브, 건축물

이번 전시의 배경이 되는 문화역서울284 건물 자체도 하나의 전시물이다. 붉은 벽돌과 화강석, 돔 지붕이 어우러진 르네상스풍 양식은 192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지어진 근대 건축의 상징적 얼굴이다. 일본인 건축가 츠카모토 야스시가 설계했다고 알려진 이 건물은 단순한 교통 관문을 넘어, 근대 도시의 위상을 드러내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이후 한국전쟁과 산업화, 민주화의 시간을 거치며 수많은 군중과 사건을 품었고, 지금은 등록문화재 제284호로 지정돼 ‘문화역서울284’라는 이름으로 다시 서 있다. 서울역 광장은 1980년 ‘서울의 봄’ 시위 현장이기도 했던 만큼, 건물과 광장 모두 한국 근현대사의 기억을 품고있다.
전시는 건물 안에서 끝나지 않는다. 한화커넥트와 협력한 야외 공간 ‘커넥트플레이스 서울역점’은 옛 서울역과 현 서울역을 미디어 아트로 연결한다. 빛과 영상으로 확장된 역사적 이미지가 관람객의 동선을 따라 펼쳐지며, ‘백년과 하루’라는 주제를 물리적으로도 경험할 수 있다. 더불어 1930년대 대합실에서 맥주가 판매되던 풍경을 재현한 체험 프로그램을 비롯해 시음, 워크숍, 스탬프 투어 기념품 증정 등 다양한 참여형 이벤트도 순차적으로 공개된다. 전시는 9월 30일부터 11월 30일까지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린다.
글 김지오 기자
자료제공 및 취재협조 문화역서울2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