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남아는 나에게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나의 ‘고향’이라고 말하곤 한다. 내가 동남아를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돌아보면 일상과 여행이 구분되지 않는 경험을 자주 했던 것 같다. 배낭 하나 메고 서쪽으로 향한다는 기준 하나로 수많은 도시를 오갔던 날, 퇴사 후 불쑥 치앙마이로 떠난 한 달, 관광이 아닌 북페어로 참여했던 날까지. 서울의 풍경에 익숙해진 나에게 동남아는 마치 팔레트를 통째로 갈아엎듯 일상을 다채롭게 흔드는 경험이었다. 정형화되지 않은 도시 풍경 속에서 마주하는 열린 구조, 시장과 거리에서 자연스레 손에 들어오는 물건들, 그리고 사람과 공간이 만들어내는 친밀한 연결은 내 작업물에도 깊이 스며들고 있다. 기억과 여행은 재료가 되고, 도시의 촘촘한 층과 여백은 나의 시선과 색으로 이어지고 있다.

서울의 여름은 이제 동남아 못지않게 길고 뜨겁다. 날씨처럼 동남아의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공간도 늘어나고 있다. 과일을 주제로 한 전시, 오래된 시장이 품은 질감, 현지의 맛, 그리고 삶의 태도까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스며든 동남아의 정서는 서울 안에서 색다른 경험을 전한다. 당장 떠날 수 없을 때, 동남아시아의 생활, 맛, 태도를 읽을 수 있는 나만의 좌표를 소개한다.
서울 아세안홀 〈푸릇 프룻, 과일이 있는 풍경〉

서울 아세안홀 개관을 기념해 〈푸릇 프룻, 과일이 있는 풍경〉 전시가 열리고 있다. 서울 아세안홀은 동남아시아 10개국의 고유한 문화를 알리고 국가 간 협력을 촉진하기 위해 한국 프레스센터에 새롭게 마련한 다목적 전시 공간이다. ‘과일’이라는 단어만 떠올리며 전시장을 찾았는데, 그 안에는 과일을 매개로 한 도구, 식기, 공예품까지 동남아시아의 일상과 문화가 풍성하게 펼쳐져 있었다. 특히 정교한 공정을 거친 은 공예품이 눈길을 끌었다. 일상의 작고 소소한 것들이 때론 가장 큰 힘을 발휘하듯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던 익숙한 물건들이 모여 그 나라의 생활양식과 정서를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이 되기도 한다.

열대과일이 품은 생기와 다채로운 색은 다소 칙칙해진 도시 생활 속에서 새로운 활기를 전했다. 단순히 과일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동남아의 기후와 생활 감각, 그리고 그들의 문화가 가진 생동감을 옮겨놓은 이번 전시를 통해 잠시 일상을 환기하는 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주소 서울 중구 세종대로 124 한국프레스센터
신흥상회

남대문 시장을 걷다 물건으로 가득 찬 압도적인 외관에 홀린 듯 발길을 멈췄다. 안으로 들어서니 라탄과 대나무, 왕골 등으로 만든 생활 소품들이 빼곡히 놓여 있었다. 남대문 신흥상회는 2대째 같은 자리를 지켜온 가게다. 소품들의 색은 단조롭지만, 용도와 형태, 질감과 결이 제각각이라 만들어내는 풍경은 놀라울 만큼 풍부했다. 동남아 재래시장을 떠올리게 하는 공간에서 나는 잠시 여행의 기억 속으로 들어갔다. 전통과 손맛이 깃든 물건들을 바라보며, 여행 기념품을 고르듯 이것저것 집어 들었다. 코스터, 트레이, 수저받침 같은 작은 소품들이 어느새 손에 쥐어졌다. 친근한 감각으로 채워진 부엌을 바라보며, 다음 여행을 또 꿈꾼다.
주소 서울 중구 남대문시장길 31-9
창수린

분명 어린 시절의 나는 ‘고수’를 즐기지 못했다. 호기심으로 한두 번 먹기 시작한 게 어느 순간 고수만도 우걱우걱 씹어먹는 ‘초고수’의 단계에 이르렀다. 궁금하면 일단 입에 넣어보는 호기심, 그게 아마 여행지에서 내가 가장 유용하게 발휘하는 능력일지도 모른다.

동남아를 좋아하는 이유는 많지만, 음식도 단연 한몫한다. 서울에서도 동남아 음식을 찾아 이곳저곳 다니는데, 창수린은 버스를 타고 지나다 우연히 발견한 곳이다. 바래진 간판과 영업 여부조차 의심스러운 외관을 지나면 작은 태국으로 여행을 떠난 듯한 공간이 펼쳐진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메뉴판을 펼쳐 가장 반가운 메뉴를 주문했다. 똠카까이. 코코넛 밀크에 버섯, 토마토, 닭고기가 어우러진 수프로 주기적으로 생각나는 중독적인 맛이다. 해산물과 투명한 면을 매콤새콤하게 버무린 얌 탈레 역시 빠질 수 없다. 무엇보다 기본 찬으로 함께 나오는 양배추 피클은 그야말로 신의 한 수. 현지에서나 맛볼 법한 풍미가 잠시 방콕의 거리를 떠올리게 한다.
주소 서울 용산구 두텁바위로 55
라이프프랙티스프로젝트

신수동 골목, 작은 가게 하나가 시선을 끌었다. 무엇을 하는 곳인지 궁금해 틈틈이 지켜보니, 동남아 지역과 연관된 제품을 선보이는 팝업이 주기적으로 열리고 있었다. 라이프프랙티스프로젝트는 동남아 현지에서 수집하거나 그곳에서 영감을 받은 오브제를 소개하는 브랜드다. 최근 열린 팝업에서는 동남아의 라이프스타일을 엿볼 수 있었다. 친환경 소재로 만든 물건이나 리사이클 제품, 핸드크래프트 요소가 담긴 매트들이 각기 다른 패턴과 색감으로 어우러지며, 그 자체로 여행지의 풍경을 닮아 있었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건, 더운 날씨에 건네주신 시원한 타이 밀크티 한 잔이다. 소소한 정성과 환대가 담긴 웰컴티를 마시며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I do what I do’라는 브랜드 슬로건처럼 주체적인 일상에서 자신만의 스타일과 행위를 실천하는 브랜드를 주기적으로 만날 수 있다니, 앞으로도 종종 들러 그들의 세계를 엿보고 싶어진다.
주소 서울 마포구 토정로17길 12 1층 좌호 흰색 나무판자집
반율

정겨운 후암동 골목을 따라 이리저리 걷던 어느 날, 마치 태국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카페 반율을 만났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메뉴판. 태국식 음료와 디저트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고민 끝에 태국식 코코넛 카페라떼와 코코넛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친절히 덤으로 내어주신 밀크티와 음료를 담아내는 쟁반에서까지 태국의 분위기가 물씬 느껴진다. 주택을 개조한 내부 공간에는 곳곳에 태국어가 적혀 있고, 벽면과 선반에는 태국에서 건너온 소품들이 가득해 공간을 통째로 건너뛴 듯한 착각을 준다. 서울에서 만난 어떤 태국 가게보다 로컬스러운 분위기가 진하게 스며 있었다. 우연한 발견에 박수치고 감탄한 날의 기억이 여행의 여운처럼 남는다.
주소 서울 용산구 후암로13가길 28 1층
소장각

출판사 겸 디자인 스튜디오인 소장각은 동남아의 독립출판물을 수집하고 소개하는 다양한 활동을 전개한다. 마포구에 있는 스튜디오에서는 500권 이상의 아트북을 감상할 수 있는 자리를 주기적으로 마련한다. 수많은 나라의 아트북을 한 공간에서 편하게 읽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평소 흔히 접하기 어려운 라오스, 미얀마, 인도네시아 등 국가의 아트 레퍼런스를 수집할 수 있어 영감을 찾아 떠난 여행의 기분을 만끽하게 한다

소장각을 운영하는 노성일 소장은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출판사 대표로 워크숍과 강연, 아트북페어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몇 년 전, 태국 아트북페어에 참여해 그와 다른 작가님들과 함께 방콕의 여러 공간을 돌아본 기억이 있다. 에너지와 열정이 넘치고, 아시아 문화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 덕분에 내가 알지 못했던 방콕의 다른 면을 만날 수 있었다. 아시아 예술과 문화의 다채로운 접점을 만들어가는 소장각의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기대된다.
주소 서울 마포구 동교로19길 101 4층
글·사진 이진슬 서포터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