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환영, 오초량

부산 초량역 인근에 있는 오초량은 백년의 세월을 간직한 적산가옥이다. 정원 등 공간 구성과 건축 가치를 인정받아 2007년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349호로 지정된 바 있다. 현재는 일맥문화재단에서 복합교육문화공간으로 운영 중이다. 재단 회원에 한해(무료 가입할 수 있다) 예약 방문할 수 있지만, 한 달에 한 번 꼴로 기회가 많지 않을뿐더러 안내 도슨트 외에 착석이 어려워 온전히 누리기에는 아쉬운 부분이 있다. 오초량을 만끽하기 위해선 계절별로 열리는 전시를 기다리는 편이 좋다. 지난가을, 편지 가게 글월과 함께 준비한 전시 〈레터하우스 Letter House: 편지감각〉이후로 오랜만에 빗장을 열었다.
“흙은 땅의 질서를 담고 있는 암호다.”

이번 봄 전시는 흙을 다루는 작가 다섯 명과 함께 ‘흙의 시간’을 이야기한다. 흙이 사물화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기묘한 긴장과 몽상을 감각하고, 흙이라는 물질이 어떻게 우리의 영혼을 정박시키는 사물로 만들어지는지 보게 된다. 모든 물질과 생명체가 결국 시간이 흐르면 흙으로 돌아간다는 점까지 떠올리면 전시가 더욱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흙의 시간: The time of soil〉은 프랑스 피레네산맥과 태국 치앙다오에서 작업하는 이은정, 일본 히로시마현의 야마시타 키미토시, 제주 조천의 조아라, 양산 통도사의 은성민, 서울 구기동의 김혜정까지 다섯 작가 작품을 선보인다. 작가의 삶과 지역의 분위기가 어떻게 작품에 녹아들었을지 헤아리며 감상하는 것도 좋다. 1, 2층을 아울러 배치된 작품들을 감상한 후에는 오초량에서 제공하는 차 바구니와 다식을 곁들이며 여운을 남겨보자.
작가 및 작품 소개
이은정 / 프랑스 피레네, 태국 치앙다오
프랑스 피레네와 태국 치앙다오에서 도예 작업을 이어가는 이은정 작가는 코일링과 핀칭 기법만을 사용한다. 손으로 하나하나 움직이는 이 기법은 작품이 손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해 저마다 고유한 존재가 된다. 작가는 현지 야생에서 채취한 흙과 광물 등을 통해 작업물을 만들며,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작품 속에 투영한다.

야마시타 키미토시 / 일본 히로시마현
히로시마현에서 태어난 야마시타 키미토시 작가는 현지에서 도예 작업을 하면서 아트 커뮤니티 ‘도방 TA0’을 운영하며 수업도 진행하고 있다. 흙과 대자연의 융합에서 탄생하는 사물의 본질을 탐구하고 있으며, 우주적인 감각으로 흙을 바라본다. 다완을 중심으로 작업 활동을 하고 있다.


조아라 / 한국 제주
조아라 작가는 화산섬 제주에서 유약 없이, 오직 흙과 불만으로 작업한다. 제주의 흙은 물이 새지 않고 자연의 질감을 고스란히 품고 있어 작업이 끝난 후에 다시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재료다. 이를 통해 작가는 삶과 죽음, 존재의 순환을 성찰하고 있다.
은성민 / 경남 양산 통도사
경남 양산 통도사 인근에서 작업하는 은성민 작가는 15~16세기 지방 그릇을 기반으로 자신의 감성을 투영한 분청, 흑유, 백자 등의 접시를 선보인다. 거칠고 투박한 흙의 질감 속에서 부드럽고 따뜻한 감정을 느끼길 바란 그의 작업물은 소박함이 가질 수 있는 깊이를 보여준다.


김혜정 / 대한민국 서울
일본에서 자란 유년 시절의 기억과 한국에서 청년기를 지내며 느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흙을 통해 표현한다. 현재 북한산 기슭에서 작업하고 있는 김혜정 작가는 자연에서 얻은 감각을 바탕으로 도예 작업을 한다. 그의 청록빛 도자기는 비색 청자 이전 청동기의 강하고도 섬세한 물성을 연상케 한다.
글·사진 김기수 기자
자료 제공 오초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