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한창인 11월, 어떤 공간은 숲보다 가을이었다. 일상과 여행에서 얻은 영감을 오감으로 풀어내는 브랜드 오티에이치콤마(Oth,)의 〈개화의 방〉 전시 공간이다. 꽃이나 잎을 납작하게 만들어 장식하는 ‘압화’를 주제로 작품을 선보이고, 사려 깊은 텍스트와 도구로 관람객을 압화의 세계로 인도했다.
Oth,의 손길을 거친 자연물은 분명 아름다웠지만, 압화는 누군가에게는 추억, 누군가에게는 로망일 뿐 대중의 기호라 보기에는 어렵다. 하지만 그들의 전시를 보기 위해 20평 남짓한 공간은 연일 사람으로 붐볐다. 열흘 동안 전시장에 다녀간 관람객만 3,500명이 넘는다. 사람들은 마감 시간이 지나도록 자리를 뜨지 않았고, 두 번에서 다섯 번까지 N차 관람이 이어졌다. 아무리 가치로운 작품을 선보인 전시라도, 이렇게 많은 재방문이 이어지는 건 이례적인 상황일 터.
〈개화의 방〉 전시에서 발견한 건 눈을 맞추는 환대와 관객의 일상에 작은 변화를 끼치기 위해 심어둔 씨앗이다. 그 씨앗은 사적인 기록물의 형태를 띠기도 했고, 낙엽의 촉감이기도 했고, 까치밥나무의 향이기도 했다. Oth, 가 설계한 전시 동선은 어쩌면 지금부터다. 관객들의 일상으로 확장되었을 이번 〈개화의 방〉 전시를 Oth,의 디렉터 문예진과 회고했다.
Interview with Oth, 문예진
— Oth,는 그간 여러 번의 크고 작은 팝업 전시를 진행했어요. 맹그로브, 서촌, 포셋, 오브젝트 등에서 진행한 전시를 다녀왔던 날이 저에게도 기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모두 좋았지만, 이번 〈개화의 방〉 전시 현장은 유독 충만하게 느껴졌어요.
이제까지는 제안이 오면 기획을 시작했다면, 최초로 Oth,가 추구하는 결을 가진 공간에서 제안이 오길 기다리며 준비를 마친 상태였어요. 점 찍어둔 공간에서 우연한 제안이 오자마자 스케치 해둔 기획을 구체화했고, 준비하는 내내 처음으로 제 작업물들에 대견스러운 마음이 들었어요. 제 품을 떠나 많은 이들에게 닿을 생각에 충만할 정도로 행복했고요. 아마 이런 마음이 전시장에 자연스레 물든 것 같아요. 브랜드를 운영하며 처음으로 더 이상 제 동굴에 숨지 않고 용기를 내 사람들과 눈을 맞추며 인사를 나눴고, 브랜드가 추구하는 방향성을 생동하는 목소리로 전하다 보니 그 점도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 같습니다.
— 〈개화의 방〉은 예진 님의 압화 작업을 보여주는 전시였어요. 어떻게 압화를 접하게 됐나요?
시작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2년째 꽃 수업을 들으면서 며칠이 지나면 시든 꽃을 버려야 한다는 게 마음 아팠어요. 어떻게 하면 이 기쁨을 오래 마주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압화를 접했어요. 요즘에는 따로 돈을 들여 꽃을 구매하지 않고, 산책하면서 발끝에서 행복을 찾는 데 재미를 붙였어요.
— 압화라는 장르를 사람들에게 선보이고 싶었던 이유가 있을까요?
압화는 단순히 꽃을 눌러 공예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닌 손끝으로 자연이 지닌 시간의 흐름을 감각하고,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또 다른 형태로 기록하는 방식이에요. 소중한 이에게 받은 마음을 시들지 않게 하고, 매 순간 다른 감정을 선사하는 꽃의 찰나를 길게 연장해 주기도 하죠. 필름 사진과 닮은 점도 매력이에요.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과 기다림의 즐거움이 있어요. 설레는 마음으로 작업했지만 실패한 결과물을 마주하는 날도 있고, 실망감을 자본 삼아 시도한 후에 맛보는 짜릿함은 번거롭고 수고로운 작업을 끊을 수 없게 만들어요. 압화는 먼 곳으로 떠나지 않아도 평범한 일상을 여행자처럼 살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해요. 당장 집 밖으로 나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는 점이 Oth,가 추구하는 방향성과 일치해 브랜드 리뉴얼을 하면서 꼭 첫 번째 이야기로 풀어내고 싶었어요.
우리의 이야기를 통로 삼아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관찰하고 사색하고 이내 움직이면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데 용기를 줄 수 있어야 하며 나를 찾아가는 과정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저마다 탐험에 나설 것을 청하는 초대장을 보내는 브랜드, Oth,
— 전시 중에 공간의 디테일이 유동적으로 변하기도 했어요.
공간은 보통 가오픈 기간을 두잖아요. ‘오픈이면 오픈이지, 왜 가오픈이야?’라는 못난 생각이 있었는데 세상에 내보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과정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준비하면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전시를 시작하고 나서야 보이더라고요. 초반에 객관적인 시선으로 피드백을 줄 수 있는 주변 분들을 초대해서 아쉬운 점을 모두 말해달라고 했어요. 까치밥나무를 직접 채집해 기념품처럼 가져갈 수 있도록 Oth, 가 제작한 표본지를 추가한 것도 보완한 점이에요. 함께 꽃 수업을 들었던 수강생분이 직접 주운 계수나무 잎을 가방에 담아 선물로 주셨는데, 달큰한 향을 혼자 누리기 아쉬워 전시장에 걸어두고 모두 가져가실 수 있도록 배치하기도 했어요. 덕분에 전시를 재방문한 분들도 새로움을 느끼고, 더 오래 머물고 싶어진다고 말씀하셔서 안도가 됐죠. 나만 좋았던 게 아니어서 다행이다, 하면서요.
— 전시 공간을 조성할 때 잊지 않으려고 유념한 포인트가 있나요?
친절함. 다정함. 모든 이들에게 건네는 감사의 인사. 지인들에게만 치중되어 있지 않는 대화.
— 전시 기간 내내 현장을 지킨 것으로 알아요. 전시 동안 예진 님의 하루는 어떻게 흘러갔나요?
그야말로 24시간으로 모자라는 열흘이었습니다. 전시 시간이 오후 1시부터 7시까지였는데, 오픈 한두 시간 전에 미리 나가 새로운 사람을 맞을 준비를 하고, 현장에서 만들 수 있는 엽서, 키링 등의 제품을 만들었어요. 마감 후에는 작업실로 돌아가 목공이 필요한 제품을 제작하면서 매일 새벽에 퇴근하는 나날을 보냈죠. 그래도 지치지 않았어요. 열흘 동안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는데, 일주일 내내 쉬어도 피곤했던 지난날과 달리 생생했거든요. 아마 전시장을 방문하신 분들이 저에게 나눠준 용기와 에너지 덕분이 아닐까 싶어요.
— 〈개화의 방〉 전시는 유독 N차 관람하신 분들이 많았어요. 오랜 시간 전시장에 머문 분들도 많았고요. 이유가 무엇일까요?
재방문한 분들에게 다가가 실제로 물었어요. 처음 방문했을 때 미처 다 읽지 못한 기록물을 보기 위해 오신 분들이 많더라고요. 비슷한 불안과 고민의 시기를 경험한 이의 기록을 통해 해답을 찾고 싶다고 하셨어요. 공간에 방문했을 때 느낀 좋은 감정을 소중한 사람과 함께하기 위해 손을 잡고 재방문하시는 분들도 많았어요. 뭉클했죠.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고요.
— 기억에 남는 관람객도 있었을까요?
10일 동안 21평의 공간에 대략 3,500명의 관람객이 방문했어요. 그들의 얼굴과 이름을 모두 기억하려고 무척 노력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한 명만 기억나는 게 아니라 많은 이들이 떠올라요.
전시를 보며 조용히 눈물을 훔치거나 대화를 나누는 중에 눈물을 참지 못하던 분들. 20년이라는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압화 고수님들. 거리에 붙은 포스터를 보고 들어왔다며 한참 둘러보시더니 귀여운 채집 엽서 세트를 양손 가득 구매하고 “너무 잘 봤습니다”라는 말씀을 남긴 할아버지. 작업자의 방 소파에 홀로 앉아 저의 기록 노트를 두 시간 동안 꼼꼼하게 읽어주신 50대 남성. 손자의 손을 잡고 온 할머니.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 여름방학 숙제로 어머니가 만들어 주던 압화 작품을 추억한 40대 여성. 전시를 통해 바삐 사느라 잊고 지낸 ‘하고 싶었던 일’에 대해 다시 떠올렸다는 어머님들.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재방문하신 모든 분. 자신이 가지고 있던 행운의 상징을 똑 떼어내 처음 보는 저에게 기꺼이 내주며 “행운은 나눌수록 좋은 거잖아요”라고 말하던 사람까지 많은 얼굴과 이름이 머리를 스쳐 지나갑니다.
— 〈개화의 방〉은 예진 님이 쌓은 그간의 기록이 아니었다면 완성되기 어려웠을 전시라고 생각해요. 전시에 사용된 기록물은 추후에 다시 사용하지 않는다고요.
기록물을 재사용하지 않는 건 귀한 시간을 내어 방문하신 분들에게 늘 새로운 이야기를 선보이고 싶은 마음이 크기 때문이에요. 이야기를 중복되지 않게 풀어나가는 게 참 어려운 일이지만, 앞으로도 이런 주제를 이런 방식으로 풀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 기록하는 것, 그리고 기록을 사람들에게 전시하는 건 예진 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누군가의 모습이 투명하게 드러난 사적인 기록물은 관객들이 긴장을 풀고 스스로 방어벽을 허물어 자신의 삶을 투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매개체라고 생각해요. 전시장에서 지난날의 자신을 둘러보고,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그리는 모습을 보며 저 역시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하듯 백지 위에 글을 써 내려갑니다. 오늘 밤에도 아무 대가 없이 써 내려간 이 글이 우리를 훗날 또 어딘가로 데려다주는 상상을 하며.
— 마지막으로 〈개화의 방〉 전시를 찾은 분들이 어떤 감정과 생각을 안고 돌아가기를 바랐나요?
“굳이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우리의 평범한 하루 속에서도 이토록 많은 행복들이 있었구나. 내 주변에도 이리도 많은 기쁨들이 손을 내밀고 있었다는 걸. 나는 그저 고개를 돌려 그 손을 잡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라는 그런 마음.
글 김기수 기자
취재 협조 및 사진 제공 오티에이치콤마, 무서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