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씨 밀즈
광안리 해변을 등지고 걸어가면 클로씨 밀즈가 있다. 쫀쫀한 맛으로 인기를 얻은 ‘디스크 도넛’이 차린 브런치 카페다. 부산의 끼니로 국밥도 좋지만, 무겁지 않은 음식으로 걸음에 활기를 더하기 위한 선택이다. 우드톤 인테리어에 붉은 포인트를 준 실내는 넓은 창으로 들어오는 채광이 여백을 채운다. 테이블 간격이 넉넉해 혼자 식사하는 이도 맘이 편안하다. 바람이 많이 불지 않는 날에는 테라스에 앉아도 좋겠다. 야자수 한 그루가 휴양지에 온 기분을 준다.
주방 공간 옆 테이블에 올려둔 직접 만든 포카치아가 식욕을 자극한다. 샌드위치도 훌륭한 선택지이지만, 그린 페스토 파스타와 딜 레몬에이드를 주문했다. 신선한 바질과 잣, 올리브 오일을 듬뿍 넣은 페스토의 맛이 아주 깊다. 파스타 위로 사뿐하게 올린 스트라치아텔라는 입을 즐겁게 하는 토핑이다. 쫀득한 식감을 가진 메제 마니케 면에 딜과 스트라치아텔라까지 찍어 한입에 먹는다. 금세 접시를 비웠다.
부산시티라이프
클로씨 밀즈 지척에 라이프스타일숍 부산시티라이프가 있다. 세월이 묻은 작은 아파트 구석에 자리 잡은 부산시티라이프는 광안리 해변과 거리는 가깝지만, 멀찍한 곳에 온 듯 새로운 기분을 준다. 이들은 이름처럼 부산에서의 도시 생활을 쿨하고 멋지게 즐길 수 있는 제품을 소개한다.
부산시티라이프에 입장하려면 신발을 벗어야 한다. 번거로움도 잠시, 발등으로 자유가 깃든다. 넓지 않은 공간이지만, 구석구석 이들이 고른 제품들이 옹골지게 채워져 있다. 위트 있는 인센스 홀더나 액세서리부터 다른 곳에서는 보지 못한 의류도 많다. 부산 해안가에 버려진 쓰레기로 만든 이티씨블랭크의 오브제도 흥미롭다. 러그 실로 만든 라이터 케이스 키링이 시선을 붙들지만, 라이터가 없어서 관뒀다. 흡연을 시작하게 되면 다시 들러 볼까.
뉴포트 부산
무릎을 잡고 경사진 길을 올라야 하는 수고를 조금만 감수하면 좋은 음악을 들으며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다. 디자인, 재즈, 커뮤니티. 세 가지 키워드를 기반으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는 뉴포트 부산이다. 카페 벽면을 가득 채운 감각적인 액자가 먼저 눈에 띈다. 뉴포트는 디자인 스튜디오 카멜앤오아시스 대표가 차린 공간으로 스튜디오 쇼룸을 겸한다. 포스터와 엽서 등 굿즈는 여행 선물로도 적격이다.
커피를 내리는 대표의 앞 바 자리로 단골인 듯 보이는 손님들이 앉아 있다. 주인장과 일상의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 타지인의 신세가 되레 아쉽다. 뉴포트는 부산이라는 도시를, 좋은 음악과 커피를 애호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커뮤니티를 만드는 공간이다.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건 노력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다. 뉴포트의 어떤 점이 사람들을 이끌었을지, 잠시 만에 체감됐다. 바쁜 와중에도 재지(jazzy)한 기분으로 브라질산 원두로 만든 커피 한 잔을 후룩 마셨다.
미미화 컬렉션
조용한 해운대구 골목에 있는 4층짜리 벽돌 건물에 들어가면 여기가 잠시 유럽인가, 싶다. 20세기의 가치 있는 빈티지 가구를 수집하고 판매하는 미미화 컬렉션이다. 네덜란드, 벨기에, 독일 등을 직접 돌며 수집한 가구와 포스터 등을 1층부터 4층까지 복작복작 아름답게 배열했다. 어찌나 애정이 담긴 지는 인스타그램 게시물 한두 개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그 연연함은 공간에도 깊이 묻어난다.
계단을 올라 새로운 층을 마주할 때마다 입을 몇 번이고 틀어막았다. 어떠한 지식 없이도 아름다웠다. 당장 지갑을 열어 구매할 형편은 되지 않지만, 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기뻤다. 이 정도면 전시장에 온 게 아닌가 싶다. 그림 밑에 걸린 마른 쑥 빛깔의 소파를 한참 바라보고 나왔다.
언리밋북스
인파로 북적이는 해운대 해수욕장 앞에 외딴 언덕처럼 고요한 아지트가 있다. 책과 음악을 사랑하는 형제가 만든 공유 서재, 언리밋북스다. 분야의 경계를 두지 않고 주인장의 취향이 반영된 다양한 소품과 도서가 공간을 채우고 있다. 스펙트럼은 대형 서점 못지않고, 컬렉션은 훌륭하다. 웃음 나는 사진집부터 렘브란트 자화상을 모아둔 모음집까지 무슨 책이든 펼치면 한참을 들여다보게 된다.
나무 테이블에 앉아 하이볼 한 잔을 주문했다. 이름 모를 연주곡이 흐르다 순서대로 장필순과 김창환 노래가 나온다. 취향은 이쪽에 더 가깝다. 진득이 읽을 책을 고르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연인에게 쓴 편지를 엮은 서한집을 골랐다. 절절한 문장도, 사랑의 속내도 재밌다.
“제게는 휴식과 잠 그리고 평화가 필요했어요. 다시 일하고 책 읽고 깊이 생각하고 추억하기 위한 나만의 시간과 여가를 갖고 싶어요.” –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연애 편지」
내가 부산에 살았다면, 이 공간이 사색과 평화의 시간을 주지 않았을까. 책상 위에 놓인 타인의 방명록을 읽다가 다시 오리라는 한마디를 보탰다.
글·사진 김기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