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신여성 도착하다〉 전시로 국내 여성미술사를 아카이빙하여 재조명했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번에는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의 대규모 전시를 개최한다. 해당 전시에는 국내에도 잘 알려진 쿠사마 야요이와 오노 요코를 비롯해 중국, 타이완,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총 11개국 출신의 여성 작가가 참여했다.
해당 전시는 신체성의 관점에서 1960년대 이후 주요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을 조망한다. 가부장제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재생산됐던 ‘아시아’라는 지리 및 정치학적 장소에서 ‘몸’의 경험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근대성에 의문을 제기했던 작품에 주목한다. 더불어, 자연과 문화, 사고와 감각, 예술과 삶을 분리하지 않고 통합적으로 이해하고자 했던 여성문화의 오랜 특질에 기반하여 외부 존재와의 ‘접속’을 이끄는 예술의 가능성을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 작품에서 발견하고자 한다.
주목할 만한 작품 5
박영숙, 〈미래를 향하여〉, 〈마녀〉
전시의 가장 첫 번째 공간인 ‘삶을 안무하라’에서 처음으로 마주하는 박영숙 작가는 여성의 신체에 부가된 사회적 억압과 부조리, 성적 권력 구조에 문제를 제기해 온 한국 대표 작가이다. 〈미래를 향하여〉와 〈마녀〉는 모두 1988년 〈우리 봇물을 트자: 여성 해방 시와 그림의 만남〉에 전시되었던 작품으로, 해당 전시는 여성학자와 문인 중심의 대안적 여성주의 문화운동을 펼친 그룹 ‘또 하나의 문화’와 교류를 통해 실현되었다.
박영숙의 〈마녀〉는 올해 초(2024.03)에 미국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한 김혜순 시인의 시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중세 유럽에서 현명하고 지혜로운 여성들이 마녀로 몰려 화형을 당했다는 이야기에 바탕을 둔 김혜순의 시를 읽은 후, 희생된 마녀들의 영혼을 불러내어 위로하기 위해 제작한 작품이다.
이멜다 카지페 엔다야, 〈돌봄을 이끄는 이들의 자매애를 복원하기〉
필리핀의 선구적인 여성 미술가 이멜다 카지페 엔다야는 1987년 설립된 여성주의 예술 그룹인 ‘카시불란(KASIBULAN)’의 창립 멤버이다. 카시불란은 1986년 필리핀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독재 정권이 무너진 이후, 현실과 삶의 관계 속에서 미술을 재정의하려는 시도로부터 등장한 여성 미술 운동이었다.
〈돌봄을 이끄는 이들의 자매애를 복원하기〉는 필리핀 섬에서 스페인의 식민 상황에 맞서 독립 운동을 일으킨 비밀 결사 조직인 ‘카티푸난(Katipunan)’ 조직원들의 아내, 어머니, 딸, 자매들의 혁명적인 여성 연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들은 전쟁에서 군인들을 먹이고, 상처를 치료하고, 비밀 문서와 무기를 보관 및 전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작품 속 감옥의 창문을 형상화한 오브제에 엮여 있는 붉은색 직물 매듭은 탈출을 의미하며, 동시에 필리핀 자유와 독립을 위해 투쟁해 온 용감한 여성들의 재매애를 상징한다.
장파, 〈여성/형상: Mama 연작〉
전시의 두 번째 주제인 ‘섹슈얼리티의 유연항 영토’에는 성과 죽음, 쾌락과 고통 등 사회적으로 금기시된 영역이나 이미지를 다룬다. 장파의 〈여성/형상: Mama 연작〉은 한국 신화에서 구전되며 악녀 혹은 모성애를 가진 어머니 등으로 묘사된 설화 속 마고 할미, 설문대할망을 작가의 시각에서 형상화한 시리즈이다. 모성을 가진 대표적인 인물인 할미, 할망은 작품 속에서 성별의 구분이 없으며, 장기와 생식기 등으로 표현돼 그로테스크한 신체로 재구성되었다.
작가는 해당 작품을 설명하며, 여성의 신체를 성적 대상화 및 타자화하는 사회를 비판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검색 포털 사이트에 ‘여성’을 검색하면 쏟아지는 특정 신체 부위가 성적으로 소비되는 현상을 비판하며, 캔버스 곳곳에 스크린프린팅한 발렌도르프의 조각상 〈비너스〉를 비롯한 파편하된 신체 형상 및 기호를 배치하였다.
아라마이아니, 〈마음의 생식능력을 막지 마시오〉
인도네시아 작가인 아라마이아니는 사회적 규범에 도전하는 파격적인 퍼포먼스와 설치미술로 잘 알려졌다. 인도네시아 사회 속 여성의 지위는 그의 작품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주제로 줄곧 등장한다. 〈마음의 생식능력을 막지 마시오〉는 학생 시절 퍼포먼스 아트로 인해 체포되었던 작가의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제작했다.
당시 인도네시아 정부는 강력한 산아제한 정책을 펼치고 있었는데, 작가는 이에 대해 “여성 신체의 가장 깊은 부분까지 국가가 식민화 하는 것”이라며 반발했다. 예술적 창의성과 여성의 생식력이라는 두 가지 충동이 어떻게 국가에 의해 억제되는지 드러낸 작품이다.
이불, 〈아마릴리스〉
이불은 1980년대 활동 초기부터 퍼포먼스, 설치, 조각을 통해 실험적인 작업을 펼치고 있는 대표적인 한국 여성 작가이다. 파리 퐁피두 아트센터, MoMA 등 세계 정상급 미술기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제48회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상을 수상한 바 있다. 1990년대 후반에는 기계와 유기체의 하이브리드인 〈사이보그〉(Cyborg) 연작을 발표하여 미술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2000년대 중반부터 개인의 기억과 경험을 인류의 역사적 사건들과 결합하는 대규모 설치 작업 〈나의 거대한 서사〉(Mon Grand Récit) 연작을 제작했다.
이불은 대중문화에서 여성 형상의 사이보그가 항상 남성 마스터에 의해 조종되며, 여성의 신체가 연약한 상태로 재현된다는 점에 주목했다. <아마릴리스>에서는 성별이나 인간이라는 종을 암시하는 기호들이 사라지고, 신체를 둘러싼 경계가 확장하는 변화가 펼쳐진다. 기계의 이음새 사이에 식물의 뿌리 또는 가지를 닮은 부분, 동물의 골격 등이 일부 표현되는 등 인간과 비인간, 여성과 남성, 식물과 동물 등 여러 범주와 경계가 한 몸에 엉켜있는 복합 유기체가 구현되어 있다.
글 성채은 기자
자료 제공 국립현대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