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with 롤드페인트
채민지 작가
— 롤드페인트는 무엇보다 공간에 빼곡히 차 있는 마스킹 테이프가 시선을 끕니다. 어떤 브랜드인지 소개해 주세요.
롤드페인트는 일상을 마스킹 테이프로 물들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브랜드에요. 공간은 2019년 10월에 오픈했으니, 어느덧 3년을 넘겼네요. 마스킹 테이프 아트 작업실이자 마스킹 테이프를 전문적으로 소개하는 상점이죠. 홀로 시작했던 공간이지만, 이제는 팀원이 늘어나 저까지 총 세 명이 함께 상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 마스킹 테이프 아트는 아직 널리 알려진 분야는 아닌 것 같습니다.
마스킹 테이프를 손으로 찢거나 가위나 칼로 오려 붙여 작품을 창작하는 장르를 일컬어 마스킹 테이프 아트라고 해요. 평면 작업부터 입체적인 오버랩까지 가능하죠. 잘 알려진 분야가 아니라서 저도 독학으로 시작했습니다. 국내엔 마스킹 테이프 아트 작가가 없어 구글링으로 해외 아티스트를 열심히 찾아 직접 연락까지 했어요. 그들에게 여러 가지 고민을 털어놓으며 조언을 구한 거죠. 지금도 오사카에서 활동하는 두 작가와는 정보를 공유하며 지내요. 창작 초기엔 재료를 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는데요. 원하는 색감의 재료를 찾기도 어려웠고, 발견한다 해도 국내엔 없을 때도 많아 구매하기도 까다로웠죠. 이런 상황을 개선하고 싶어 마스킹 테이프를 직접 판매하게 된 이유도 있어요. 작업 방향도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회화 같은 작품을 주로 선보였다면, 지금은 마스킹 테이프를 생활 속에서 즐길 방법을 탐구하죠. 마스킹 테이프 아트로 물든 일상을 상상하면서요.
— 어떤 계기로 마스킹 테이프 아트에 관심을 갖게 됐나요?
마스킹 테이프는 우울했던 제 삶을 긍정적으로 바꿔준 도구입니다. 사실 저는 건강에 대한 결핍이 많은 사람이에요. 어려서부터 천식과 아토피가 심했거든요. 중학생 때부터 20살까지 비걸(B-girl)로 춤만 추며 살았어요. 그땐 지금 나이에도 전문 댄서로 춤을 추며 살고 있을 거라 생각했죠. 그런데 한창 연습해야 할 시기에 아토피가 춤은커녕 일상 생활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심해졌어요. 집에서 걷는 것조차 어려웠습니다. 그 때 바닥의 끝을 볼 만큼 많이 좌절했죠. 힘들게 춤을 그만두고 시작한 직장 생활도 결국 건강 때문에 퇴사해야 했고요. 외출할 수 없을 정도의 건강 상태가 지속되자 우울증도 심각했습니다. 약물 치료도 어려운 와중에 계속해서 제가 통제할 수 없는 순간들이 닥치더군요.
정말 뭐라도 하지 않으면 스스로 견디기 너무 어려울 것 같았어요. 이 시간을 잘 이겨내자는 긍정적인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쯤 방에 늘 굴러다니던 마스킹 테이프를 붙잡고 찢기 시작했습니다. 방법도 모른 채 하루하루 마스킹 테이프를 찢고 오리며 붙였어요. 그러자 울퉁불퉁하고 삐죽삐죽한 테이프들이 우연히 맞아떨어지며 화분처럼 보이기도 하고, 선인장처럼 보이기도 하더라고요. 예상치 못한 그림이 완성될 때 오는 성취감과 테이프를 찢으며 집중하는 그 시간이 정말 소중했어요. 그러다 보니 낮아졌던 자존감도 높아지며 삶을 다시 바라보게 됐죠. 자연스레 마스킹 테이프로 그리는 세계에 더욱 몰두하게 되어 지금까지 왔네요.
— 어려웠던 시간을 잘 이겨내고 이렇게 근사한 브랜드를 만드셨군요. 가끔 매장에서 작가님이 춤추며 뒹구는 이유도 비걸이었기 때문이네요.(웃음) 롤드페인트는 마스킹 테이프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네이밍이죠?
마스킹 테이프로 그림을 그리는 제게 이 재료는 물감과 다름없어요. 그러다 보니 마스킹 테이프를 제 시각에서 조금 더 다르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연상하다가 말려 있는 ‘rolled’ 물감 ‘paint’가 떠올랐죠. 주위에서는 어감이 어렵다는 이유로 반대가 심했어요. 페인트 집부터 생각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페인트 가게로 알고 전화 주시는 분도 정말 많았죠.(웃음) 그래도 지금까지 제 시선에서 롤드페인트만큼 마스킹 테이프를 잘 표현하는 네이밍은 없다고 생각해요. 중성적인 이름이라 더 마음에 들었고요.
— 대구 중구 봉산동에 공간을 열게 된 이유가 있나요?
처음엔 작업실만 구할 생각으로 출퇴근이 편한 동네를 먼저 알아봤죠. 그러다 제가 작업할 때 주로 사용하는 ‘mt’라는 마스킹 테이프 브랜드를 판매할 기회를 얻게 됐어요. 작업실부터 쇼룸의 역할까지 같이하려면 무작정 출퇴근이 편한 곳보다는 대구 중심지가 적합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봉산동에 롤드페인트를 열었고요. 봉산동은 대구 중심지인데도 길 건너 번화가인 동성로와는 분위기가 무척 달라요. 정적이고 차분하죠. 이 동네를 봉산문화거리라고 해서 종종 봉산미술제 같은 행사도 열려요. 지역의 문화적인 요소도 롤드페인트가 지향하는 바와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었어요. 여기서 3년을 보낸 지금도 거리의 따스한 분위기가 좋아 자전거 타고 다니는 출근길이 꽤 즐겁답니다.
— mt는 일본 브랜드로 알고 있습니다. 판매할 기회는 어떻게 얻은 건가요?
mt의 첫 번째 마스킹 테이프 아트 공모전에 참여했어요. 감사하게도 우승까지 한 게 좋은 계기가 됐습니다. 당시 국내에선 작업용 마스킹 테이프를 구하는 게 쉽지 않았어요. 시상식 참여 차 방문한 현지 본사에서 우리나라에서도 mt 마스킹 테이프를 편하게 구매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말씀드렸죠. 그리고 농담 삼아 제가 mt 마스킹 테이프를 한국에서 직접 판매하면 어떻겠냐고 말했는데 굉장히 긍정적이고 현실적인 제안으로 받아들이더군요. 정말 농담 삼아 한 말이었는데···.(웃음) 저도 한국에 돌아와서 진지하게 고민한 후, 오프라인에서 마스킹 테이프를 조금 더 쉽게 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수 있다면 한 번 도전해도 좋겠다고 결심했죠. 그렇게 지금의 롤드페인트가 만들어졌습니다.
— 마스킹 테이프만 선보이는 가게답게 이렇게 많은 테이프는 롤드페인트에서 처음 봅니다.
쇼룸의 입구부터 내부로 이어지는 동선에서 마스킹 테이프만 다루는 공간임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마스킹 테이프가 둥글게 말린 모습을 표현하고자 쇼윈도를 곡면으로 만들었고요. 쇼윈도의 콘텐츠는 계절이나 특별한 시즌에 맞춰 주기적으로 교체하고 있어요. 쇼룸 내부는 크게 국내외 마스킹 테이프 브랜드를 소개하는 섹션과 다양한 창작 활동을 펼치는 작가님들의 마스킹 테이프를 전시하는 섹션으로 나누어집니다.
— 마스킹 테이프를 전시하며 특별히 신경 쓰는 부분이 있다면요?
테이프를 고르는 행위 자체가 즐겁기를 바라는 마음에 최대한 다양한 방식으로 진열하고 있어요. 격자 선반에 올려놓거나, 유리병에 넣어서 보여주기도 하고, 막 쌓아두기도 해요. 그리고 아직 마스킹 테이프를 생소해하는 분들이 많으세요. 어떻게 하면 손님들이 마스킹 테이프와 더 친해질 수 있을까 항상 고민하죠. 기본적으로 손님들에게 샘플 종이를 드리고 있는데요. 여기에 궁금한 마스킹 테이프를 자유롭게 붙여볼 수 있답니다. 그러면서 자세한 색감과 테이프의 질감을 경험할 수 있어요. 테이프가 말려 있을 때와 찢어서 붙였을 때 주는 느낌이 정말 다르거든요.
손님들이 자유롭게 테이프를 붙인 샘플 종이는 저마다 다른 패턴을 가진 하나의 작품이기도 해요. 그래서 완성된 샘플은 저희가 다시 후가공해서 책갈피로 만들어드리죠. 이 외에도 시즌에 따라, 마스킹 테이프를 활용한 부채 만들기, 크리스마스 오너먼트 만들기 등 테이프를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 롤드페인트에서만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제품이 있을까요?
아무래도 오리지널 컬러 시리즈가 아닐까 싶네요. 롤드페인트의 첫 번째 컬러 시리즈로서 제가 늘 영감을 받는 자연의 색감을 테이프에 옮겨 왔어요. 총 10가지 색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수채화처럼 번지는 느낌이 특징이죠. 물감 같은 느낌을 주고자 라벨도 포스터컬러 뚜껑에서 모티브를 얻어 디자인했어요. 이 외에도 제 마스킹 테이프 아트 작업을 활용한 패턴 시리즈도 롤드페인트에서만 만나볼 수 있습니다.
— 많은 제품 중 작가님은 일상이나 작업에서 주로 어떤 테이프를 사용하세요?
작업할 때는 오리지널 컬러 시리즈를 거의 기본으로 사용해요. 평소에는 일력, 달력 마스킹 테이프를 즐겨 쓰고요. 이 두 가지 제품은 평소 마스킹 테이프를 써보지 않으셨던 분들도 일상에서 편안하게 테이프를 사용해 보며 매력을 느낄 수 있도록 제작한 시리즈에요. 감사하게도 지금까지 손님들께서 가장 많이 찾는 제품이기도 하죠.
— 단일 제품을 소개하는 만큼 주로 어떤 분이 공간을 찾는지, 마스킹 테이프 스토어를 처음 경험하는 고객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하네요.
세대나 성별 구분 없이 모든 분이 쇼룸을 방문해 주길 바라며 공간을 만들었어요. 브랜드 네이밍을 최대한 중성적으로 한 것도 같은 맥락이고요. 평균적으로 20~30대 여성분들이 공간을 많이 찾아주고 있지만, 그래도 제가 예상한 것보다 정말 다양한 연령대의 손님들이 가게를 방문하세요. 마스킹 테이프를 이미 많이 접해본 분들은 편하게 매장을 이용하시지만, 처음 경험하는 분들은 조금 낯설어하는 게 눈에 보여요. 그럴 땐 저희가 테이프의 다양한 활용법을 소개해 드리며 원하는 마스킹 테이프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죠.
— 마스킹 테이프 활용법으로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마스킹 테이프가 익숙하지 않다면, 단색 마스킹 테이프 위에 매직으로 간단한 메모를 남기는 것부터 시작해 보세요. 메모를 적은 테이프는 책상 근처, 휴대폰 뒷면, 자주 쓰는 노트, 읽고 있는 책 위에 붙여 놓고요. 잊으면 안 되는 일들을 기록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거죠. 미션을 완료하면 떼어내거나 다른 곳에 옮겨 붙여도 좋아요. 일상용품에도 마스킹 테이프를 붙여 보세요. 가장 기본적인 물건들에 테이프를 붙이며 내 세상을 취향껏 꾸며보는 거죠. 마스킹 테이프를 길게 찢어서 꼬깃꼬깃 접으면 긴 끈으로 만들어 쓸 수도 있고요.
인센스 스틱에 태우고 싶은 길이만큼 테이프를 붙여 놓으면 원하는 길이만큼 향을 태울 수도 있어요. 이 외에도 지퍼 고리를 만들어 사용한다거나 종이가 찢어졌을 때 이어 붙이는 등 활용법은 너무 많아요. 롤드페인트 SNS에 계속해서 다양한 아이디어를 나눌게요!
— 작품 활동부터 스토어 운영까지 어떻게 업무의 균형을 맞추고 있나요?
업무의 균형을 잡는 것은 지금까지도 어려워요. 롤드페인트를 운영하며 개인적으로 진행해 보고 싶은 프로젝트는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일이 잦아요. 이런 경우가 쌓이면 답답함과 우울함으로 이어질 때도 있죠. 그렇지만 만약 롤드페인트를 운영하지 않았다면 ‘내가 물감처럼 사용하고 싶은 재료들을 직접 만들어 낸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 마스킹 테이프를 손쉽게 바로 꺼내어 작업 시에 쭉쭉 찢어 사용할 수 있었을까’, ‘재료에 대한 이해가 지금과 같았을까’ 떠올려보면 분명 전에 생각지도 못한 감사한 경험을 많이 하고 있어요. 이전만큼 자유롭게 작업은 못 하지만, 작가로서 마스킹 테이프를 더 깊이 공부하는 시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실제로도 다른 재료와 구별되는 마스킹 테이프만의 새로운 특징들을 계속해서 발견하고 있고요. 생각을 바꾸니, 오늘 제가 ‘가게 사장님’, ‘판매 직원 언니’ 등 어떻게 불리든 모두 감사한 수식어로 생각하게 되더군요. 이제는 결핍의 우울함보다는 내일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데 마음을 쏟고 있습니다.
— 스토어 운영부터 작품 창작까지 모두 하려면 하루가 정말 바쁠 것 같습니다.
얼마 전부터 이른 아침에 출근해서 정해진 시간에 퇴근하는 연습을 하고 있어요. 원래는 늦은 오전쯤 출근해서 매장 오픈 준비를 하고, 고객 응대, 배송, 거래처 업무 등으로 오후 시간을 보내곤 했죠. 저녁에는 밀린 개인 작업을 했고요. 그러다 보면 항상 늦은 밤에 퇴근하게 되더라고요. 이렇게 지내니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금방 지치고 업무와 작업 모두 온전히 집중을 못 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지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최근에 패턴을 바꾸는 실험을 하고 있죠. 퇴근 시간엔 업무가 남아 있어도 아쉽지만 덮어두고 집으로 돌아가려 애쓰고 있어요. 아직 노력이 더 필요하지만 이렇게 지내보니 마음의 여유가 달라진 것 같아요. 당연히 해내야 하는 업무는 계속 쌓이고 쌓여 가족이나 지인과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체력이 조금 남으니 다음 날 좋은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더군요. 업무의 패턴을 바꾼 후, 부정적인 생각보다 긍정적인 생각을 주로 하게 되는 것 같아서 좋아요.
— 앞으로 롤드페인트로 전하고 싶은 소식이 있다면요?
오프라인 상점이 대구에 있다 보니 지역적인 한계를 느낄 때가 있어요. 그래서 올해는 다른 지역에서도 롤드페인트를 만날 수 있도록 다양한 기획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팝업 스토어, 전시 등 어떤 형태가 될지 구체적으로 정해지진 않았지만, 좀 더 다채로운 롤드페인트의 소식을 전해드리고자 해요.
— 공간을 찾는 분들이 어떤 기억을 안고 돌아가길 바라세요?
작은 공간이지만 한 시간 이상 머무르는 손님들이 종종 계세요. 저 역시 처음에 마스킹 테이프를 찢고 오리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서너 시간씩 흘러 버려서 놀랄 때가 있죠. 손님들도 저희 공간에서 마스킹 테이프를 천천히 즐기고 사용해 보면 좋겠어요. 처음에는 조금 낯설더라도 롤드페인트를 떠날 때는 마스킹 테이프를 이용한 재미있는 상상을 잔뜩 안고 가시길 바라죠. 저는 소비자가 다양한 상상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좋은 공간이라 생각해요. 예를 들어, 이 옷이 어떤 상황에 어울릴지, 이 노트는 내가 언제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지를 구체적으로 떠올려 보는 것처럼요. 롤드페인트도 마스킹 테이프를 활용한, 조금 쓸데없어도 즐겁고 호기심으로 가득한 상상을 그려주는 공간이 되길 바라요.
글 이건희 객원 필자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롤드페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