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과 배색으로 직조한 브랜드, 플라이스 ①
▼ 1편에서 이어집니다.
— 2017년 ‘제13회 삼성패션디자인펀드(이하 SFDF)’의 수상자로 선정됐습니다. 이를 계기로 이듬해에 삼성물산의 패션 편집숍 비이커(BEAKER) 한남점에서 레지나표와 함께 수상자 전시를 열기도 했고요. SFDF 이후로 어떤 활동을 펼쳐 왔는지 궁금해요. 수상 이후로 달라진 점이 있다면요?
수상 자체로도 큰 영광이었지만, 아직도 SFDF측에 감사해요. 패션업에 종사하며 느낀 건 여느 업계처럼 인복을 무시할 수 없다는 점인데요. 비즈니스적인 면은 말할 것도 없고 그때 만나 지금은 친구가 된 삼성 관계자들이 인적 자산을 넘어 보물 같은 존재예요. 여전히 이 업계에서 배움이 필요한 저는 굉장히 운이 좋은 케이스인 거죠.
— 특히 니트를 걸친 소년이 해변가를 거니는 장면이 나오는 18FW 캠페인 영상이 인상적이었어요. 형광색 의상과 푸르른 배경 덕에 가을·겨울 컬렉션인데도 계절감이 다채롭게 느껴지더라고요. 지금도 이 컬렉션을 기억하고 언급하는 분들이 많다고요.
SFDF 수상 이후 정말 제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게 지원해 주셨어요.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며 이익구조를 극대화하는 게 중요한 브랜드 운영에서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하고 싶었던 염색과 촬영을 마음껏 진행할 수 있었던 게 큰 행운이었습니다. 영상에 등장하는 아이가 입고 있는 모헤어 소재 니트는 색상도 특이하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양이 ‘미니멈(최소 주문량)’이었어요. 이 시즌에 사용할 수 있는 예산이 있는데 그 비중을 드라마틱하게 늘릴 수 없는 거잖아요. 삼성이 있었기에 생산이 가능했던 컬렉션인 거죠. 제가 하고 싶은 걸 가장 마음껏 펼칠 수 있었던 컬렉션이라 의미가 깊어요.
— 베를린에서 서울로 돌아온 이후 9개월간 혼자 작업하셨다고요. 작년 5월, 서울에 작업실을 마련한 이후 브랜드에 어떤 변화가 생겼나요?
코로나가 터지고 더는 외국에서 브랜드 운영을 이어가기 어렵다고 판단해서 서울로 돌아왔어요. 생산 시스템 가동이 어려울 정도로 외국에서는 심각한 상황인 시기가 있었거든요. 함께 있던 많은 친구들이 각자의 나라로 귀국했고요. 고독하더군요. 복합적인 상황으로, 10여 년의 해외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다시 돌아왔어요.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요.
플라이스를 잠시 쉬고, 다시 운영하려고 고민해 보니 제가 생각한 가장 이상적인 비즈니스의 형태는 일인 기업이더라고요. 제품을 생산할 때 누구에게도 평가받지 않는 구조였을 때 저의 투명한 비전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 무턱대고 저지른 작은 프로젝트를 통해 예홍씨와 유진씨가 플라이스에 합류하게 됐는데요. 모든 프로세스를 함께 의논하며 진행하고 있어서 이들 없이는 브랜드를 유지할 수 없다고 느꼈어요. 팀원들이 제게 너무 소중한 존재예요.
제가 연차가 있다 보니 또래의 친한 친구들이 업계에서 큰 브랜드를 운영하거나 패션계에서 자리 잡은 경우가 많아요. 친구들이 훨씬 규모 있는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지만, 제가 작은 브랜드를 운영한다고 해서 불행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저는 그동안 일하면서 어떻게 했을 때 브랜드 수익이 늘어날지 체득한 부분이 꽤 있어요. 어떤 제품을 생산해서 판매하고, 이를 어떻게 홍보했을 때 효과적일지에 대한 데이터도 가지고 있고요. 하지만 브랜드 규모를 늘리면 자연스럽게 팀원이 늘어날 테고, 결국은 브랜드 운영 면에서 제 손에 닿지 않는 부분도 있을 거예요. 지금, 이 사람들과 아이디어를 나누며 일하는 게 행복하기에 점진적으로 브랜드를 확장하고 싶어요. 물론 매출은 중요하지만요(웃음).
— 제3자로서 나이 차이가 확연한 조직에서 이렇게 유연한 소통이 가능하다는 게 놀라워요. 80년대생, 90년대생, 2000년대생이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피드백하는 분위기인 거잖아요. 팀원 각자가 생각하는 브랜드의 모습도 궁금하네요.
민예홍 디자이너 플라이스는 정말 독특한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회사입니다. 저희가 모든 체계를 만들어 나가고 있으니 정해진 것이 없다고 봐도 무방해요. 처음에는 이런 부분 덕에 업무가 쉬워 보이기도 했는데요. 때문에 스스로 고민해야 할 점이 많았고, 의사 결정을 하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했습니다. 고민을 반복하고 더 나은 답을 찾기 위해 애쓰는 일의 반복이었죠. 지금은 이러한 프로세스가 익숙해졌고, 이 과정을 통해 스스로 성장하고 있다고 믿어요. 팀원들에게 큰 격려를 받기도 하고요.
플라이스는 언뜻 보기에 규모가 작은 회사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플라이스가 ‘작기 위해 작은 회사’라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플라이스는 거대한 조직의 시스템에서 벗어나 놀이처럼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어요. 그렇기에 무한한 성장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어쩔 수 없이 규모를 키워야 하는 순간에 직면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이를 충분히 누리며 일하고 싶어요.
김유진 팀원 저는 국민대학교 의상디자인 2학년에 재학 중인 학생이에요. 예홍 선생님 덕에 플라이스를 알게 됐고, 지난 6월에 합류했습니다. 학부생으로서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게 정말 행운이에요. 제가 원래 알고 있던 한국 브랜드와 전혀 다른 결의 브랜드라고 생각해서 신선하고 새롭더라고요. 개인적으로 흥미로워서 SNS 팔로우를 하고 살펴봤는데, 새 게시물 업데이트가 전혀 안 되더라고요. 계속 그래픽 관련 티셔츠만 출시하고 예전에 호응이 좋았던 니트웨어 판매도 안 하고 있어서 ‘여기는 뭐지?’ 싶었어요. 안 내주니까 더 궁금한 거 있죠? (웃음). 원래는 심플한 스타일을 좋아했는데, 플라이스를 합류한 이후로 터닝 포인트처럼 제 취향도 많이 변했어요.
— 합이 좋은 TF팀 같네요(웃음). 그동안 플라이스는 니트, 티셔츠, 맨투맨뿐만 아니라 그래픽 포스터나 덕트 테이프까지 다양한 제품을 다뤄 왔습니다. 초반에는 니트가 주력이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지금은 제품군이 확장된 느낌이에요.
베를린에서 플라이스를 운영할 때는 생산과 오더를 납기 기간 안에 맞추느라 제가 원했던 이미지가 흐려졌던 시즌도 있어요. 하지만 작년에 서울로 돌아와 작업실을 마련한 이후 이전보다 작은 규모의 스튜디오로서 정말 하고 싶은 것만 선택해서 해 보는 게 어떨까 싶었죠. 디자인을 위한 디자인이 아니라, 제가 어떤 걸 원하고 만들고 싶은지 탐색해 보고자 했어요.
사실 제품군이 다양하지만 결국은 제가 관심 있어서 만든 것뿐이에요. 하루에도 수시로 바뀌는 관심사에 따라 마음이 동하면 작업해 봅니다. 이렇게 운영하는 방식이 재정적인 면에서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에 어느 순간 브랜드가 없어지는 건 아닐까 우려되는 순간도 있어요. 오직 호기심과 자아실현을 충족하기 위해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들이 누군가의 눈에 우습게 보일 수 있겠죠. 다만 분명한 건 이 ‘소꿉장난’ 같은 작업이 플라이스에게 큰 동력이 되고 있으며, 관심을 가져 주는 분들 덕에 꾸준히 수익이 난다는 거예요.
— 플라이스 제품에서 그래픽 디자인도 중요한 요소예요. 작업실에 프린팅 기기까지 갖춘 모습을 보고 놀라웠어요. 모두 직접 디자인하시나요? 주로 그래픽의 레퍼런스는 무엇으로 삼는지 궁금해요.
학생으로서의 작업과 지금의 작업 방식에 차이가 있다면 학생 때는 하나의 테마를 정해 영화 혹은 한 시대와 무브먼트를 공부했다면, 상업적인 방향이 있어야 하는 컬렉션에서는 직감적인 리서치로 작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정해진 틀 없이 엄청난 양의 레퍼런스를 풍부하게 수집하고 상관관계가 별로 없는 이미지들의 점점을 찾다 보면 어느 정도 구현하고 싶은 이미지를 설명할 수 있는 워딩이 생겨요. 이를 좁혀가는 동시에 제가 실제로 뭘 입고 싶은지에 대해 생각해 봐요. 저는 직접 디자인한 옷이 스스로도 입고 싶은 옷이었으면 좋겠거든요. 저와 뗄 수 없는 레퍼런스 가운데 의약품 패키지와 과자 봉투 디자인, 국가별 코믹물 등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작업을 합니다.
— 현재 홈페이지 자사몰 외에 어디에서 플라이스 의상을 만나볼 수 있나요?
분더샵과 피크닉(piknic)에서도 플라이스의 의상을 만나볼 수 있어요. 이외에는 오프라인이나 편집숍 입점을 자제하는 편이에요. 국내외 여러 편집숍에서 입점 문의와 함께 좋은 제안이 지속적으로 들어왔는데요. 아직은 자사몰의 힘을 키우고 싶더라고요. 실제로 온라인 자사몰을 통해 어느 정도 안정적인 수익 구조가 만들어졌고요.
— 피크닉과의 인연은 작년 연말 협업으로 시작됐죠. 피크닉과 함께 선보인 니트 상품이 수차례 재입고 요청을 받을 정도로 호응이 좋았다고요.
현재 저희의 키 아이템은 그래픽 티셔츠라, 니트 아이템 반응이 뜨거울 줄 몰랐어요. 가격대도 좀 있는 편이었는데 원사가 워낙 좋아서 촉감이 보드랍고 색상도 선명하고 독특해서 많이 찾아 주신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한국에서 선보인 협업 컬렉션이었는데 많은 분이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한 마음이 큽니다.
— 새 컬렉션 소식과 니트웨어 출시가 기다려지는데요. 앞으로 어떤 디자인의 제품을 선보일지 들려주세요. 준비 중인 행사가 있다면 소개해 주시고요.
저는 멀티미디어 아티스트도 아니고, 그래픽 디자이너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제가 패션디자이너 같지도 않고요. 매 시즌 아이템을 기다리고 있는 고객들이 있다면 그에 부합하는 제품을 선보이는 게 제 역할이기도 하겠죠. 그동안 브랜드를 운영하며 반응이 좋았던 아이템을 파악해 다시금 선보일 예정입니다. 또 내부적으로 다음 컬렉션 준비에 대한 마음은 항상 있습니다. 그렇다고 저희가 시즌에 맞춰 매번 새 컬렉션을 낼 것 같지는 않아서 대외적으로 ‘언제까지 뭘 만들겠다!’라는 포부를 전하기는 어렵고요. 코로나를 거치며 패션계에도 시즌리스가 보편적인 개념이 됐잖아요. 사람들이 어떤 정해진 타임라인에 맞춰 새 컬렉션을 내지 않더라도 괜찮다는 인식을 만든 계기였다고 생각해요. 예전 컬렉션도 한 번씩 돌아보고요. 무언가 늘 하고 있고, 올해 안에 재미있는 팝업을 열기 위해 준비 중이라는 정도만 귀띔하는 게 좋겠습니다(웃음).
— 마지막으로, 플라이스를 어떤 브랜드로 운영해 나가고 싶나요?
플라이스의 브랜드 비전도 매우 중요하지만, 같이 일하며 이끌어 나가는 구성원의 행복이 제게 더 가치 있답니다. 팀과 일을 하며 같이 보내는 시간을 계산하면 제 삶의 엄청난 시간을 공유하는 셈이잖아요. 하루 중 가장 긴 시간을 보내는 일터에서 즐겁지 않다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동안 쌓아온 저의 노하우와 지금까지 습득한 데이터를 팀원들에게 ‘선물’하고 싶어요. 그리고 팀워크란 단순히 나의 업무만 돋보일 때가 아니라 조화 속에서 이루어질 때 더 큰 결실을 맺는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차근차근 프로젝트를 하나씩 공개할 예정이니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글 김세음 기자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플라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