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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24

NFT와 미디어아트에 지친 이들을 위해

도예가 박성욱과 한지 물성 탐구하는 캐스퍼 강의 그룹전
갤러리 구조가 박성욱과 캐스퍼 강(Casper Kang)의 그룹전을 오는 4월 16일까지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과거 회화, 사진, 오브제 등 각 미술 분야 거장의 작품을 전시했던 갤러리 구조가 젊은 작가의 작품을 다루는 공간으로 확장하기 위한 도약이기도 하다. NFT와 미디어아트 등의 전시가 활황인 가운데 이번 전시는 덤벙 분청 기법을 사용한 도예 작품, 한지의 물성을 실험하는 작품 등 전통에 뿌리를 둔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가진다.
갤러리 구조 4층 전시 전경, 좌측으로 크게 보이는 작품은 캐스퍼 강의 (2022) Ⓒ 갤러리 구조

 

전시의 제목인 ‘Semi Improvisation’은 어느 정도를 뜻하는 영어 단어 ‘Semi’즉흥을 뜻하는 ‘Improvisation’을 합친 것이다. 갤러리 구조 유진이 대표는 “어느 정도의 틀을 갖춘 상태에서 발생하는 즉흥성을 뜻하는 음악적 용어로, 도자를 물에 담갔다 말 그대로 ‘덤벙’ 빼는 덤벙 기법을 활용하는 박성욱과, 한지를 연소하는 캐스퍼 강 작가 두 명의 작업에서 발생하는 우연성을 의미하는 제목”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더해 “작가가 작업에 돌입하기 전 구상한 것과 다른 작품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통제된 우연성’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라고 말했다.

 

 

백토 물에 덤벙 담갔다 빼는 ‘덤벙 분청’

자연과의 조화 드러내

 

박성욱 작가 Ⓒ 갤러리 구조

 

박성욱(1972~)은 ‘달 항아리’를 의미하는 대호(大壺)에 사용하지 않았던 덤벙 분청을 사용해 독자적인 대호 작품을 만든다. 덤벙 분청은 1469년 경 경기도 광주에서 고안한 것으로 백토*물에 도자기 일부를 담그는 기법이다. 역사를 조금 들여보자면 조선시대 등장한 사기 제작법 중 가장 늦게 성행했다 사라졌다. 초기 분청사기가 화려하고 조밀한 문양을 특징으로 하는 것에 반해 단순하고 여백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 도자기를 만들 때 사용하는 백색 점토

 

박성욱 작가 도자 제작 현장 Ⓒ 갤러리 구조

 

도예에서는 작품의 지지대인 밑동을 ‘굽’이라고 하는데, 굽에서 이어지는 항아리의 형태가 중력을 이길 수 있느냐가 작품 제작의 관건이다. 흙을 빚어 만든 도자에 백토물을 부었을 때 무게를 버틸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뿐만 아니라 달 항아리는 습도에 예민해 바람이 많이 불거나 건조한 날을 찾아 제작해야 한다. 모든 요건이 완벽히 들어맞을 때에야 주저앉거나, 갈라지거나, 터진 형태의 달 항아리가 아닌 온전한 모양의 작품이 탄생한다.

거친 표면이 그대로 남아 있는 분청 Ⓒ 갤러리 구조

 

박성욱은 이러한 작업 과정을 설명하며 “작업을 하다 보면 반드시 자연과의 조화를 깨닫게 된다”고 덧붙였다. 아니나 다를까. 분청이 가진 미감은 ‘자연스러움’이다. 덤벙 기법을 사용한 흙에는 흔적이 남는다. 도자를 굽고 나면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달 항아리를 담갔다 뺄 때 생긴 하얗게 긁힌 자국이 예시 중 하나다. 바람이 할퀴고 간 작품도 그대로 남는다. 어두운 색으로 칠해 감추는 등의 기교 없이 수수하게 제 모습을 드러낸 작품을 보고 있자면 더없이 편안해진다.

 

 

시간 흐름 담은 사금파리

도자 파편 이어붙인 독특한 회화

 

박성욱 작가가 작업하는 가마 현장 Ⓒ 갤러리 구조
사금파리를 이어 붙인 박성욱의 회화 Ⓒ 갤러리 구조

 

이번 전시에서 감상할 수 있는 박성욱 작가의 또 다른 작품으로는 도자의 파편을 의미하는 ‘사금파리’를 모아 이어 붙인 것이 있다. 장작 가마에서 구운 얇고 납작한 사금파리를 나무나 철로 만든 틀에 채워 하나의 회화처럼 완성하는 것이다. 작가에게 이러한 작품을 만들게 된 계기를 묻자 “학부 시절 현장 체험을 하며 가마에 근처에 박힌 도자의 조각을 캐 분류했던 적이 있다. 그때 손에 쥐고 본 이 작은 조각에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등의 시간이 새겨져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껴 작품 소재로 삼은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장작 가마에 도편을 어디에 넣어두느냐에 따라 색의 명암이 달라지는데, 이를 배치해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것은 분청사기 고유의 백색 미감에 작가가 가진 색의 이해를 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박성욱 작가는 “시간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에 대해 관람자 각자의 인상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며 이번 전시 개최의 소회를 전했다.

 

 

건축 전공한 특이한 이력의 작가

동양과 한국 특징에 영감 얻어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캐스퍼 강의 모습 Ⓒ 갤러리 구조

 

캐스퍼 강(1981~)은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나 2004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건축을 전공한 이력으로 건축사무소 디자이너로 일했으나 그에게 있는 창의성과 예술성을 살려 본격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초기 작품은 건축설계도를 연상하게 하는 정밀한 선으로 한국 민화를 그린 것이었다. 당시 자신의 전공이자 직업이었던 건축에서 모티브를 얻어 벽, 계단, 지붕과 같은 요소를 회화에 반영하기도 했다. 이후 동양의 산수화에 기반해 대리석 가루와 아크릴을 섞은 후 물감을 겹겹이 쌓아 질감에 집중한 작업을 이어왔다.

 

 

한지 찢고, 태우고, 표백하고…

캐나다 교포인 이방인의 시선 담아

 

캐스퍼 강, (2021) Ⓒ 갤러리 구조
캐스퍼 강 작품 디테일 Ⓒ 갤러리 구조

 

작가는 “현재 작업은 구체적 형태 없이 한지라는 매체의 물성에 집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작업이 지금 같은 방향성을 가지게 된 것은 국가와 가족에 대한 영향을 보다 심층적으로 탐구한 것의 결과로 보인다. 캐스퍼 강은 “가족 모두가 영어로 대화하는 환경에서 자라 이방인처럼 한국을 본 것이 현재 작업으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그는 한국 문화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한국을 알린 것은 케이팝이나 김치 등이지만 내게 흥미로운 작업 소재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캐나다는 건국한 지 150년 정도 밖에 안된 나라인 반면, 한국은 5천 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전통을 중시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이는 곧 그가 한지를 작업의 주요 매체로 선택한 이유의 대답이기도 하다.

갤러리 구조 1층에서 전시 중인 캐스퍼 강의 (2021)
갤러리 구조 1층에서 전시 중인 캐스퍼 강의 (2021)

 

캐스퍼 강은 한지를 표백하거나, 그을리거나, 젖은 상태에서 강한 힘을 주어 찢는 등의 방식으로 매체를 해체한 흔적을 조형화한다. 그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의미’인데 이는 물질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본질을 의미한다. 과거 한국 미술의 주요 매체였던 한지를 해체하며 국가와 문화의 상징을 비워내고 새로운 물음표를 만드는 것이다.

 

 

디지털 아트 활황인 가운데

작가 숨결 느껴지는 반가운 전시

 

박성욱 작가의 시리즈 Ⓒ 갤러리 구조
갤러리 구조 3층 전시 전경, 정면으로 보이는 작품은 캐스퍼 강의 (2022) Ⓒ 갤러리 구조

 

많은 전시 공간이 앞다투어 메타버스, NFT와 같은 가상현실과 관련한 키워드를 쏟아내는 지금, 작가의 손길과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실물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Semi-Improvisation’이 반가운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갤러리 구조 유진이 대표는 “매체 물성을 실험하며 통제와 우연 사이 미적 층위를 만드는 두 작가의 작품을 소개하게 되어 기쁘다”라고 전했다. 2017년 ‘스페이스 노웨이브(Space No Wave)’라는 이름으로 개관했던 역삼동의 대안 공간은 아트컨설팅 회사로 옷을 바꿔 입더니 마침내 지난 2020년, 현대 미술을 다루는 갤러리 구조로 새롭게 탄생했다. 이 공간의 사명은 ‘매체 간의 병치를 통한 미학’을 알리는 것으로 현재 진행 중인 전시 기획 의도와 맞닿는다. 전시는 오는 4월까지 이어진다.

 

 

신은별 기자

자료 제공 갤러리 구조

장소
갤러리 구조
주소
서울 성동구 뚝섬로 419, 4층
일자
2022.03.16 - 2022.04.16
헤이팝
공간 큐레이션 플랫폼, 헤이팝은 공간을 만드는 사람들과 그 공간을 채우는 콘텐츠와 브랜드에 주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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