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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24

불교미술 새 지평 연 성소수자 박그림

미술적 페르소나 통한 자기혐오 극복의 길 <虎路>
한남동에 위치한 스튜디오 콘크리트는 오는 3월 27일까지 박그림의 개인전 <호로(虎路)>를 개최한다. 호랑이가 제 길 찾아가듯 자아를 받아들이는 지난날을 승화한 박그림의 작품을 만날 기회다.
박그림, 尋虎圖_樂流(심호도_낙류), 2019, 비단에 담채, 145x290 cm

 

불교 미술에서는 붓의 선을 일컫는 필선(筆線)을 초라 부른다. 불모(佛母)*는 아난존자초, 시왕초, 보살초, 사천왕초와 같은 밑그림을 수백 장 그리며 자신의 필력을 쌓는다. 심호흡을 가다듬고 선 하나를 그리는 일은 고난과 수행을 방불케 한다. 속세를 떠나 근교 논밭에 거처를 마련한 스승에게 도제교육**을 받은 박그림 작가는 탱화 그리는 이로 살리라 결심했다. 하지만 동국대학교 불교미술학과에서 수학하며 자신의 성 정체성을 표현한 독창적 불교 미술 세계관을 확립한다. 비단 양면에 맑고 옅은 색을 수차례 겹쳐 칠한 그의 작품에서는 정통 불화에서 볼 수 없던 현대 남성이 아름다운 육체미를 뽐낸다. 명주실로 짠 비단인 사라(紗羅)를 쓴 성별 없는 보살이 등장하기도 한다. 모두가 평등하다는 불교 교리에 기반한 그의 현대 불화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듯 고결하고 평화롭다.

* 어미 모(母)는 불교 미술을 낳는 사람을 뜻하며 그림 그리는 것이 산고와 같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 스승 곁에서 일대일 가르침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Interview with 작가 박그림

 

박그림 작가 ⓒ 범경

 

국내 불교미술의 사조와 특징이 궁금합니다.

고려 시대부터 계승되어 온 국내 불교 미술은 기교 없이 소박한 멋을 부각하는 고려 불화와, 강렬한 색채와 도식화된 구성이 특징인 조선 불화로 나뉩니다. 고려 불화의 경우 비단 앞뒤에 물감을 덧입혀 은은한 색감을 구현하는 배채법(背彩法)을 따르지요. 이와 같은 그림의 영향을 받은 현대 불화 역시 사찰에 봉안되어 불교의 교리를 전하는 역할입니다.

도제 미술 교육을 행한 스승님께 받은 영향은 무엇입니까?

풀 끓여 아교(阿膠)* 만드는 법, 선 긋는 법 등 불교화를 그리는 데 필요한 모든 과정을 배웠습니다. 스승님은 원색에 다른 색을 조색해 만든 ‘고색’으로 탱화를 그렸습니다. 고색은 여러 번 물감을 섞은 것이기에 원색과 비교하면 훨씬 옅게 발립니다. 저의 그림 역시 안개가 낀 듯 은은한 색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 본래 동물성 접착제를 뜻한다.

 

박그림, 無明(무명), 2022, 비단에 담채, 27.3x22 cm

 

본인의 성 정체성 반영한 고려 불화를 그리시지요.

스승님께 불교 미술을 배우고 대학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불모의 삶을 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학부에서는 현대성을 접목한 불교 미술을 가르쳤는데, 그때 출강했던 강사인 기민정 작가가 제 작품을 보고는 “현대 남성이 불화에 등장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면 팬아트(Fan Art)*에 그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저는 성 소수자임을 밝히지 않아 항상 마음 한편에 답답함이 있는 상태였지요. 그런데 내게 솔직하지 않은 그림에는 한계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번쩍 들더군요. 이후 심기일전(心機一轉) 하여 이름까지 ‘박그림’으로 바꾼 후 본격적으로 나를 드러낸 작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 유명 영화, 책, TV 시리즈 등에 나오는 인물을 좋아하는 팬(fan)이 창조한 예술 작품을 뜻하는 말이다.

 

박그림 작가 ⓒ 범경

 

자기애(自己愛) 가득한 남성을 불화로 그리는 데 이유가 있습니까?

이상과 현실의 차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예쁘고, 잘 생기고, 성격도 좋고, 능력도 출중하지 않은 나와 마주하며 괴로운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때 접한 게이 커뮤니티에서 많은 이들이 얼굴뿐만 아닌 신체, 직업, 취향 등을 자신감 있게 드러내는 모습을 보았는데 참 아름다웠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비단 폭으로 불러와 색을 입힌 것이지요. 성 소수자는 우스꽝스러울 것이라거나, 여성스러운 척한다는 사회 편견이 있습니다. 제게도 그들이 완벽할 것이라는 일종의 편견이 있었던 셈입니다. 그들에게도 감추고 싶은 부분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실상 그들을 만나고 난 뒤에는 ‘모두가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깨달음을 얻고 자기혐오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박그림, 尋虎圖_柬擇(심호도_간택), 2018, 비단에 담채, 92x70 cm

 

현대 불화 그리는 박그림 작품에도 고전 불화 요소가 있는지요?

첫 번째 개인전이었던 ‘화랑도(花郞徒)-꽃처럼 아름다운 사내들’에서는 작품에 등장하는 모델의 제스처, 즉 수인(手印)*으로 불교적 상징을 드러냈습니다. 불교 미술에서는 창 든 사람이 쓰고 있는 그물 같은 면사포를 사라(紗羅)라고 합니다. <심호도_간택(尋虎圖_柬擇)>에서는 코마다 구슬이 달린 사라인 인다라망(因陀羅網)을 쓴 보살 두 명이 서로를 비추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이 작품에서의 그물은 혼자서는 살 수 없이 타인과 촘촘하게 엮인 사회 네트워크를 뜻합니다. 나아가 세상의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어 결국 하나에 이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깨달음을 얻은 성인(聖人)이자 보살이기에 성별이 없습니다. <심호도_불이(尋虎圖_不二)> 하단에 등장하는 호접난은 서양에서 들여온 꽃입니다. 서양의 성당이나 교회에서 볼 수 있는 천장화에서 영감을 얻은 분할 구도를 통해 성별과 국가와 같은 경계를 허물고자 했습니다.

* 모든 불 ·보살의 소원을 나타내는 손의 모양이다.

박그림, 尋虎圖_不二(심호도_불이), 2021, 비단에 담채, 189x225 cm

 

다양한 경계를 허물고 불교의 가르침 중 하나인 ‘만물 평등’의 가치를 전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스튜디오 콘크리트에서 진행 중인 전시 <호로(虎路)>에서는 호랑이를 박그림 작가의 페르소나로 삼았습니다.

불교미술에서의 주인공은 부처나 보살입니다. 호랑이는 주변을 맴도는 영물이지요.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주변인이 되기도 하는 인간사와 닮아있다고 생각했기에 이번 전시의 페르소나로 설정했습니다.

박그림, 味尾(미미_자), 2022, 비단에 담채, 16x22 cm
박그림, 味尾(미미_자), 2022, 비단에 담채, 16x22 cm

 

불교미술 계승의 사명감을 가지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불교미술은 한국화 중에서도 비주류에 속합니다. 무엇보다 종교적 상징을 가졌기에 현대 미술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요. 제 그림이 시대에 등장한 새로운 불교 미술이자, 현대 미술이 되길 꿈꾸며 앞으로도 열심히 선을 그리고 색을 덧입힐 생각입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연작 시리즈인 <심호도(尋虎圖)>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종교의 성물과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변신 도구를 접목한 신작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작가님께 영감을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과의 관계에서 많은 영감을 얻습니다. 무수한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상황과 감정을 불교의 교리에 비유해 작품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각별한 친구인 정찬용 큐레이터와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런 대화가 작품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주요 모티브가 되지요.

스튜디오 콘크리트 2층 테라스에서 진행한 박그림 작가와의 인터뷰 현장 ⓒ 범경
박그림, 虎亂之交(호란지교), 2022, 비단에 담채, 35x35 cm

 

마지막으로 작품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려주십시오.

이분법적 고정관념이 조금이나마 허물어지기 바랍니다. 이를 통해 차별과 혐오의 시선 또한 줄어들기를 소원합니다. 무엇보다 여타 종교가 하나의 절대적인 신을 숭배하고, 추앙한다면 불교의 기본 교리는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자라면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하지요. 어려운 길이겠지만 작품 활동을 통해 부처와 같이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고요함에 다다르고자 합니다.

박그림(1987~)은 불교미술을 도제식으로 수학한 후 동국대학교 불교미술학과를 졸업했다. 주요 전시로는 2018 개인전 <화랑도(花郞徒)-꽃처럼 아름다운 사내들, 불일미술관>, 2021 <CHAM; The Masquerade, 유 아트스페이스>와 단체전 2021 <BONY, 뮤지엄 헤드>, 2020 <남성 모양, Space9>, 2019 등이 있다. 2018 앱설루트 보드카 아티스트 어워즈 위너로 선정되었다.

 

 

신은별 기자

자료 제공 스튜디오 콘크리트

장소
스튜디오 콘크리트
주소
서울 용산구 한남대로 162
일자
2022.01.26 - 2022.03.27
헤이팝
공간 큐레이션 플랫폼, 헤이팝은 공간을 만드는 사람들과 그 공간을 채우는 콘텐츠와 브랜드에 주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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