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국수, 막걸리, 막춤, 막사발. 우리에게 익숙한 이 단어들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정해진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과 투박하지만 생동감 넘치는 에너지가 느껴진다는 것. 디자인하우스가 50년을 맞아 ‘막’이라는 글자에 주목했다. 서울 장충동 디자인하우스 사옥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막(MAK)〉은 디자인과 건축, 공예, 패션, 미식 등 다양한 분야의 창작자 26명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막’을 해석한 자리다. 익숙한 물건을 엉뚱하게 변형하고, 버려진 재료로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가 하면, ‘막’을 직접 맛보고 경험할 수도 있다. 조금은 낯설고 때로는 유쾌한 이 전시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 눈여겨볼 포인트를 짚어봤다.
사옥 곳곳에 펼쳐진 낯선 풍경
이번 전시의 첫 번째 관람 포인트는 ‘장소’다. 평소 직원들이 일하는 디자인하우스의 장충동 사옥이 전시장으로 변했다. 건축가 승효상이 설계한 이 건물은 네 개의 동이 서로 연결된 구조다. 이번에는 로비와 복도, 회의실, 정원 등 17개 공간이 전시에 활용되면서 건물 곳곳을 오가는 과정 자체가 관람의 일부가 됐다. 전시는 건물 밖에서부터 시작된다. 사옥 외벽을 장식한 그래픽은 디자인 스튜디오 일상의실천 권준호의 작업이다. 서로 다른 형태와 색채, 패턴을 자유롭게 조합해 ‘막’이 가진 역동성을 표현했다. 안으로 들어서면 플라워 아티스트 레오킴이 손길을 더한 감나무 정원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새로운 식물로 빼곡하게 채우기보다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데 집중했다.
업무 공간이 뜻밖의 분위기로 바뀌기도 했다. 공간 디자이너 종킴은 약 9평 규모의 사무실에 이국적인 장막을 설치했다. 한국 민화 〈호피장막도〉에서 출발해 유목민의 텐트, 유럽 살롱의 레이스, 페르시안 러그 등 서로 다른 문화의 요소를 뒤섞었다. 장막을 걷고 들어서면 다양한 색과 패턴이 겹쳐진 낯선 풍경이 펼쳐진다. 한국 차와 공예를 연구하는 김동현은 전통 너와집에서 영감을 얻은 단칸 초막과 현대적인 오피스 다실을 마련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조선 시대 문인 매월당 김시습의 사유에 뿌리를 둔 ‘망형(忘形)’이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본질을 좇는 태도를 전통 차 문화와 현대적인 공간에 풀어냈다. 종킴이 서로 다른 문화를 과감하게 뒤섞었다면, 김동현은 꾸밈을 덜어내고 소박함을 택했다. 같은 사옥 안에서도 ‘막’을 해석하는 방식은 이처럼 다채롭다.
사방탁자에 ‘방’을 하나 더하면?
사방탁자는 꼭 사방으로 트여 있어야 할까? 공간 디자이너 백종환은 전통 가구인 사방탁자의 구조를 자유롭게 변형해 ‘삼방탁자’와 ‘오방탁자’를 만들었다. 삼방탁자는 사방탁자의 구조를 최소한으로 압축해 간결한 균형을 찾았고, 오방탁자는 동서남북과 중심이라는 오방의 개념을 바탕으로 탁자 안에 여러 공간을 만들어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정구호는 전통 반닫이에 현대적인 소재를 결합했다. 개성반닫이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백골동’으로, 투명한 플렉시글라스에 전통 장석을 더했다. 나무로 된 몸체를 투명하게 바꾸면서 장석의 화려한 문양과 장식이 한층 선명하게 드러난다.
새로운 시도에 꼭 낯선 재료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디자이너 박길종은 이전에 실현하지 못했던 아이디어를 다시 꺼냈다. 2024년 9월 월간 〈디자인〉에 시안을 선보였던 자전거 거치대를 실제로 제작하고, 양산을 염두에 뒀지만 완성하지 못한 테이블도 구현했다. 디자인하우스 카페 차지소에서 버려진 테이블 세 개와 이전 프로젝트에서 남은 재료를 모아 만든 작업도 있다. 이름하여 ‘여기저기, 이것저것’. 유치원 시절 선생님의 손을 잡고 함께 완성했다는 생애 첫 그림도 전시장 벽 한쪽을 채우고 있다.
패브릭 아티스트 김은하는 헌 옷과 자투리 원단으로 디자인하우스의 50번째 생일상을 차렸다. 조선 왕실의 잔칫상인 고임상에서 착안해 석류와 유과, 약과 같은 전통 음식부터 마카롱과 케이크까지 천으로 만들었다. 쓰임을 다한 옷과 천 조각들이 형형색색의 음식으로 변신한 것이다. 익숙한 형식을 바꾸고, 미처 실현하지 못한 아이디어에 다시 도전하고, 남겨진 재료에 새로운 쓰임을 부여하는 일. 창작자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보여주는 ‘막’의 모습이다.
같은 의자에서 시작된 여섯 가지 이야기
똑같은 의자를 여섯 명의 창작자에게 건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다다친구들은 프랑스 디자이너 필립 스탁이 디자인한 ‘루이 고스트 체어’를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했다. 배우 박상원, 사진가 김용호, 음악가 김수철을 비롯한 여섯 명의 구성원은 그림을 그리거나 장식을 더하며 저마다의 경험과 취향을 녹여냈다. 의자 사이에 놓인 긴 테이블에는 여섯 개의 상자가 이어져 있다. 각자의 작업과 삶에서 가져온 물건과 기록을 자유롭게 펼쳐놓은 것으로 여섯 사람의 내밀한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다. 각자의 개성을 유지하면서도 하나의 풍경을 완성하는 이들의 협업 방식이 흥미롭다.
서로 다른 시대의 물건을 한데 모으는 작업도 눈길을 끈다. 공간 디자이너 이길연은 지난 20여 년 동안 수집한 가구와 작품을 꺼내놓았다. 제작 시기도, 형태도 제각각인 물건들을 삼베로 감싸고 옷핀으로 연결했다. 오랫동안 간직해 온 물건들이 하나의 공간에서 동일한 소재를 만나 새로운 관계를 맺었다. 김양수와 서영희는 동서양의 예술과 여러 시대의 작품을 과감하게 뒤섞었다. 도예가 신상호의 작품부터 현대미술가 데이미언 허스트의 작업까지, 익숙한 분류와 시대적 구분을 벗어난 작품들이 한자리에 놓인다. 최중호는 가구와 음악, 패션을 하나의 공간에 결합했다. 직접 디자인한 가구와 스피커를 중심으로 소리와 색채, 스트리트 문화가 어우러지는 풍경을 연출했다. 저마다 다른 취향과 경험, 시대와 문화가 만나 예상치 못한 조화를 이루는 것 역시 이번 전시가 보여주는 창작의 한 방식이다.
‘막’을 맛보고, 직접 만들어보고
이번 전시에서는 관람객도 잠시 창작자가 되어볼 수 있다. 크리에이티브 그룹 레벨나인은 디자인하우스가 걸어온 50년을 돌아보는 그래픽 월과 참여형 디지털 그라피티 ‘Color Shake’를 선보인다. 디지털 그라피티 앞에서는 관람객이 스프레이 버튼을 눌러 화면에 자유롭게 색과 그림을 남길 수 있다. 누군가 남긴 흔적 위에 또 다른 사람의 표현이 쌓이면서 화면은 계속해서 새로운 모습으로 바뀐다. 구병준이 기획한 공예 전시도 눈여겨볼 만하다. 50명의 공예가가 금속과 도자, 유리, 나무 등 서로 다른 재료로 제작한 작품 50점을 선보인다. 작가마다 서로 다른 재료와 기법으로 완성한 작품들로, 마음에 드는 건 현장에서 구매할 수도 있다.
‘막’을 맛으로 경험할 수 있는 공간도 있다. 사옥 내에 있는 카페 ‘차지소’는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한 모습으로 변신했다. 스타일리스트 듀오 세븐도어즈가 공간을 꾸미고, 미쉐린 1스타 레스토랑 소울의 김희은·윤대현 셰프가 다섯 가지 한정 메뉴를 개발했다. 대표 메뉴는 강원도 메밀가루로 직접 뽑은 카펠리니를 활용한 ‘막, 국수’다. 윤세호 작가가 만든 막사발에 담아내 그릇까지 하나의 작품처럼 즐길 수 있다. 막걸리로 발효한 증편에 세 가지 버터를 곁들이거나, 감자 뇨키를 응용해 새로운 감자전을 만드는 등 익숙한 한식에 색다른 조리법을 더했다. 서로 다른 식재료와 조리법을 자유롭게 조합한 메뉴를 통해 ‘막’의 또 다른 해석을 만날 수 있다. 작품을 감상하고, 직접 흔적을 남기고, 음식을 맛보는 동안 ‘막’이라는 한 글자가 품은 다양한 가능성을 자연스럽게 경험하게 된다.
전시를 한 바퀴 둘러보고 나면 ‘막’이라는 단어가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무언가를 대충 만들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익숙한 방식에서 벗어나 자신의 감각을 믿고 시도해 보라는 일종의 제안처럼 느껴진다. 누군가는 오래된 물건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누군가는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것들을 과감하게 섞는다. 한때 완성하지 못했던 아이디어를 다시 꺼내거나, 오랫동안 지켜온 형식을 조금 비틀어보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만나고, 때로는 새로운 길을 발견한다.
50년을 맞은 디자인하우스가 ‘막’이라는 단어를 꺼내 든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는 동시에 앞으로 펼쳐질 수많은 시도를 기대하는 마음. 생각해 보면 창작이 꼭 거창할 필요는 없다. 늘 지나치던 것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고, 망설이던 일을 일단 시작해 보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달라질 수 있다. 전시장을 나서는 길, 문득 무언가를 ‘막’ 해보고 싶어진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글 김기수 기자
사진 및 자료 제공 디자인하우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