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대 거리를 그리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공간이 있다. 친구가 약속 시간에 늦어도 30분 정도는 거뜬히 보낼 수 있었던 곳. 딱히 살 것을 정하지 않아도 처음 보는 브랜드가 눈에 들어왔고, 작은 액세서리 하나쯤은 손에 쥔 채로 나왔다. 에이랜드는 국내 편집숍 흐름에서 빼놓기 어려운 이름이다. 2005년 홍대를 시작으로 명동, 가로수길 등으로 영역을 확장하며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를 대중에게 소개해 왔다. 이름도 생소하고, 태그도 낯설던 브랜드가 이곳을 거쳐 더 많은 사람에게 닿을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쇼핑 방식은 점차 달라졌다. 온라인 플랫폼과 SNS가 더 많은 선택지를, 더 빠르게 보여주는 덕에 새로운 브랜드를 찾기 위해 어떤 장소를 애써 방문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편집숍의 역할 역시 그 흐름 안에서 조금씩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에이랜드가 새롭게 준비한 공간의 이름은 ‘ALAND 2nd PAGE(에이랜드 세컨페이지)’다. 그동안 매장을 확장했던 방식과는 결이 다르다. 에이랜드는 자문했다. 더 많은 브랜드를 보여주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브랜드가 가진 이야기는 공간 안에서 충분히 전달되고 있는가. 에이랜드는 단순한 소비의 장소를 넘어설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이 쌓여 두 번째 페이지를 출발했다.
연희동이라는 보폭을 따라
에이랜드 세컨페이지가 들어선 곳은 서울 연희동이다. 많은 브랜드가 성수와 한남에 자리를 잡는 흐름과는 상반된 선택이다. 연희동은 조금 다른 속도로 움직인다. 카페에는 단골이 앉아 진득한 시간을 보내고, 골목 안에 숨겨진 작은 가게까지 애써 사람들이 찾는다. 담벼락 너머로 계절이 바뀌고, 오래된 구옥은 여전히 골목의 결을 지킨다. 빠르게 소비되는 트렌드를 쫓기보다 머무는 시간에 끌리는 사람들이 이 동네를 찾는다.
에이랜드가 연희동을 선택한 이유도 그 속도와 닿아 있다. ‘ALAND 2nd PAGE’는 규모 확장보다 깊이를 따졌다. 하나의 브랜드가 가진 철학이 공간 안에서 더 온전히 전달되고, 고객의 일상 안에 천천히 스며드는 경험을 만들고자 한다. 20년 동안 빠르게, 넓게, 많이 소개해온 브랜드가 이번에는 느리게, 깊게 문화를 이야기하는 쪽으로 보폭을 옮긴 셈이다.
구옥 안에 펼친 취향
ALAND 2nd PAGE는 구옥을 개조한 공간이다. 뉴욕에서 패션과 아트 사이를 오가며 일하다 서울로 돌아온 30대 중반의 인물 ‘jeje’를 페르소나로 상상했다.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연희동 구옥을 완전히 새로 고치기보다, 시간의 흔적을 남긴 채 자신의 취향과 감각을 더한다는 이야기다. 그 설정처럼 ALAND 2nd PAGE는 새로 지은 매장처럼 보이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오래된 주택의 구조와 마당, 방과 방 사이의 동선을 살리고 그 안에 옷, 가구, 책, 작품 등을 들였다. 집이라는 형식은 편집숍의 익숙한 진열 방식에서 조금 멀어지게 만든다. 한눈에 모든 상품을 훑는 대신, 방을 옮기며 다른 장면을 마주하게 된다.
예술과 시간이 녹아든 방
ALAND 2nd PAGE에는 세 가지 방이 있다. 첫 번째 방은 ‘작가의 방’이다. 이 공간에서는 매달 한 명의 작가를 소개한다. 트렌드를 선도하는 작품보다는 공간의 온도와 닮은 작품을 조용히 걸어둘 예정이다. 오픈을 함께하는 첫 번째 작가는 김수정이다. 에이랜드가 김수정 작가를 선택한 이유는 공간을 압도하지 않는 태도에 있다. 일상의 장면을 조용히 담아낸 그의 작품들은 구옥의 분위기를 한층 더 짙게 만든다. 김수정 작가의 전시는 5월 31일까지 이어진다.
두 번째 방은 ‘시간의 방’이다. 완벽하게 정돈된 공간은 아니지만, 시간이 켜켜이 쌓인 곳으로 빈티지 숍 그런마인드가 함께했다. 제주를 기반으로 유럽 빈티지 가구와 오브제를 소개해온 브랜드다. 표면에 남겨진 흔적과 오래된 재료가 가진 무게가 공간에 이야기를 채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방은 ‘브랜드의 방’이다. 매달 에이랜드가 선택한 하나의 브랜드를 온전히 소개하는 공간으로, 첫 번째 주인공은 액세서리 브랜드 영리영리(YLYL)다. 영리영리는 클래식과 빈티지에서 영감받되, 이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다시 풀어내는 브랜드다. 키치한 분위기와 세련된 조형감, 독창적인 컬러 조합과 위트 있는 디자인이 특징이다. 진지하지만 무겁지 않고, 익숙한 클래식을 조금 낯선 방식으로 비트는 감각이 연희동 구옥의 분위기와 자연스럽게 맞물린다.
공간을 채우는 견고한 큐레이션
입점 브랜드에서는 연희동과의 연결성도 엿보인다. 지수(ZISOO)는 이 동네에서 10년째 공방을 운영해 온 브랜드다. 부산물 가죽과 스웨이드를 활용해 낭비를 줄이고, 손바느질로 가방을 만든다. 완벽히 똑같은 제품이 아니라 손으로 만든 흔적이 남는 물건을 선보인다. 유노이아 역시 연희동과 시간을 쌓아온 브랜드다. 한때 이 동네를 떠난다는 소식을 전했지만, ALAND 2nd PAGE를 통해 다시 연희동에 머물게 됐다. 그 외에도 오얏리, 폴리가든, 옴니브로, 볼삭 등 다양한 카테고리의 브랜드를 정성 어린 시선으로 소개한다.
더북소사이어티도 ALAND 2nd PAGE 안에 자리를 잡았다. 현대미술, 그래픽디자인, 건축, 영화 등 예술 전반의 독립출판물을 소개해온 서점이자 프로젝트 공간이다. 에이랜드와 더북소사이어티의 인연은 20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에이랜드는 워크룸프레스와 함께 책 『EVERY THING HAS ITS OWN LIST』를 만들었고, 이 작업을 계기로 더북소사이어티와 연결됐다. 14년 전 책 한 권으로 시작된 관계가 이제 연희동의 서재로 이어진 셈이다.
ALAND 2nd PAGE는 선택지를 넓게 펼쳐 보이기보다, 한 브랜드가 어떤 결을 지녔는지 오래 들여다보게 한다. 이러한 변화가 에이랜드의 지난 시간을 지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동안 쌓아온 감각을 다른 속도로 꺼내 보였기에, 공간이 전하는 진정성은 더 또렷해진다.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에 자리를 내어주던 태도는 여전하다. 달라진 것은 보여주는 방식이다. 많은 것을 한꺼번에 진열하는 대신, 각각의 브랜드가 독립된 서사를 가질 수 있도록 방과 방 사이에 이야기를 심었다. 한때 새로운 브랜드를 빠르게 찾아 헤매던 사람들이 이제는 다시 그 이름 앞에서 잠시 걸음을 늦추는 장면. 연희동의 두 번째 페이지는 아마 거기서부터 시작되지 않을까.
글 김기수 기자
자료 및 사진 출처 에이랜드, 그런마인드, 더북소사이어티, 지수, 유노이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