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08

남산 주변, 근현대 건축 탐방 코스

〈힐튼 서울 자서전〉 전시와 함께 돌아보기 좋은 공간 4

어느덧 서울살이 14년 차. 여전히 서울에는 매일 새로운 것들이 생겨나고, 밤이 깊어도 거리는 사람으로 붐빈다. 많은 이들이 활기찬 에너지에 이끌려 서울을 찾지만, 정작 이 도시에 머무르게 하는 힘은 흘러온 시간 속에 켜켜이 쌓인 이야기가 아닐까. 수많은 발걸음이 오간 자리에는 자연스레 기억이 축적되고, 그 기억은 곧 도시의 얼굴이 된다. 

 

남산은 서울이 쌓아온 시간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지역이다. 예나 지금이나 서울의 중심지였고, 한결같이 활기로 가득한 동네이기 때문이다. 골목 하나, 건물 하나마다 도시의 시간이 농축되어 있다. 서울의 축소판인 남산 일대를 걸으며 근현대 건축물 사이로 쌓인 시간의 결을 따라가 보자.

피크닉 〈힐튼 서울 자서전〉

〈힐튼 서울 자서전〉 포스터와 힐튼 서울 철거 현장 ⓒ유한솔

힐튼 서울은 1983년 건축가 김종성이 설계한 호텔이다. 당대 모더니즘 건축의 대표작이면서, IMF 연차총회와 서울 올림픽 등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순간들을 품어온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근 경영권 이전과 코로나19 시기 수익 악화로 재개발이 결정되며, 호텔은 철거 절차에 들어갔다. 〈힐튼 서울 자서전〉은 공간이 축적해 온 기억을 복원하고 기념하는 자리다.

〈힐튼 서울 자서전〉ⓒ유한솔

전시의 시작은 1층이다. 여러 작가의 시선이 담긴 설치, 영상, 사진 등 다양한 매체의 작품을 통해 힐튼 서울을 새롭게 조망한다. 그중에서도 나의 시선을 붙잡은 건 입구에 놓인 서지우 작가의 작품이다. 힐튼 철거 과정에서 나온 건축 자재를 활용한 작품으로, 한때 건물이었던 물성이 전혀 다른 존재로 변주되며 마치 생명체처럼 느껴진다.

〈힐튼 서울 자서전〉 ⓒ유한솔

한 층 더 올라가면 건축 과정에서 오간 서신, 호텔 교육 방침이 적힌 책, 다양한 사인물 등 힐튼 서울의 운영과 일상을 보여주는 아카이브를 만날 수 있다. 이어지는 3층에서는 힐튼 서울 철거를 둘러싸고 형성된 여러 담론이 정리돼 있고, 마지막 4층에는 힐튼 로비를 장식했던 크리스마스 조형물이 놓여 있다. 호텔의 가장 찬란한 순간을 상징하는 기억이자, 공간의 마지막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전시를 둘러보면 힐튼 서울은 더 이상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수많은 기억과 사건이 축적된 하나의 생애로 다가온다. 전시장을 따라 걷는 시간이 마치 한 생명의 장례식에 참여하는 일로 느껴졌다. 〈힐튼 서울 자서전〉은 사람들의 기억을 환기하고, 건축의 생애를 다시 묻는다는 점에서 진정으로 참여적인 전시였다. 마침 근처에서 힐튼 서울 철거 공사가 진행 중이니, 사라지기 전 풍경을 직접 눈에 담아보는 것도 좋겠다.

 

주소: 서울 중구 퇴계로6가길 30

라칸티나

라칸티나 ⓒ유한솔

전시를 보니 허기가 진다. 남대문시장과 서울시청을 지나, 높고 커다란 빌딩 사이 삼성빌딩 지하에 이탈리아로 통하는 입구가 있다. 1967년에 오픈한 라칸티나(La Cantina)다. 라칸티나는 삼성 이병철 회장이 즐겨 찾던, 우리나라 최초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다. 여러 차례 리모델링을 거쳤지만, 여전히 세월이 느껴지는 분위기와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라칸티나 ⓒ유한솔

음식은 대부분 정통 현지식을 고수하지만, 나는 이탈리아에는 없고 서울 라칸티나에만 있는 메뉴를 골랐다. 형식은 퓨전이지만, 재료의 신선함은 이탈리아 여행에서 먹었던 그 맛이다. 파스타 면과 소스를 취향에 따라 조합할 수 있다는 점도 이곳의 특징이다. 흥미로웠던 건 손님 대부분이 중년 남성이었다는 사실이다. 파스타를 즐기는 부장님들인가.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 곧 생각을 고쳐먹는다. 왜, 아저씨도 파스타 좋아할 수 있지!

 

주소: 서울 중구 을지로 19 삼성빌딩 지하1층

가배도 남대문시장점

가배도 남대문시장점 외관 ⓒ유한솔

고층 호텔이 들어선 대로변 한편에 카페 가배도가 있다. 1910-20년대 유행하던 벽돌조 2층 한옥 상가를 복원한 건물이다. 단층 건물이 대부분이던 시기, 2층 한옥 상가는 그 자체로 신식의 상징이었다. 점심시간에 찾은 가배도는 직장인들로 붐볐다. 바쁜 하루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짧은 대화를 나누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다. 이 건물이 복기하려던 1910년대 경성의 모습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휴대폰을 잠시 내려놓고, 100년 전 경성을 떠올려 보자. 건물 구조와 공간을 채운 가구, 소품은 이미 그 시절을 품고 있다. 머릿속으로 사람들의 옷차림만 살짝 바꿔주면 현재의 풍경은 자연스럽게 과거와 겹친다.

 

주소: 서울 중구 남대문로 11
가배도 남대문시장점 내부 ⓒ유한솔

안중근의사기념관

안중근의사기념관 ⓒD.LIM ARCHITECTS

남산 아래 자리한 안중근의사기념관은 일제강점기 식민 지배의 상징이었던 남산 신궁 터에 세워졌다. 식민 지배의 치욕을 기억하고 새로운 서사를 쓰기 위해 조성한 공간이다. 개관 당시에는 단층 건물이었으나, 공간이 협소해 현재 형태로 다시 지었다. 지금은 ‘전시’라는 실용적 목적을 넘어, 방문자가 공간을 거닐며 안중근 의사의 삶과 그 시대의 의의를 자연스럽게 되짚을 수 있도록 설계됐다.

안중근의사기념관 ⓒD.LIM ARCHITECTS

형식적으로는 재건축에 가깝지만, 장소가 지닌 역사적 맥락과 기억을 존중하고 계승했다는 점에서 이 공간은 하나의 리노베이션이라 볼 수 있다. 건물은 새로워졌지만, 이 자리가 품은 역사의 무게는 그대로 남아 있다.

 

주소: 서울 중구 소월로 91

민주화운동기념관

민주화운동기념관 ⓒ민주화운동기념관, 유한솔

민주화운동기념관은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건물로, 동선을 따라 자연스레 한국 민주주의 역사를 이해하도록 구성됐다. 군사정권 시기 고문이 자행됐던 남영동 대공분실이 원형에 가깝게 보존된 공간이기도 하다. 전시 공간에는 민주화를 향한 단단한 의지와 기록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지금 이 역사를 비교적 차분한 마음으로 마주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이 남긴 유산 덕분이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남영역 인근에 있어 동선상 조금 떨어져 있지만, 그 거리를 감수하고서라도 찾아갈 의의가 있는 장소다.

 

주소: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71길 37
민주화운동기념관 ⓒ민주화운동기념관

남산 일대는 ‘서울의 축소판’이라 할 만큼, 과거와 현재가 겹겹이 공존하는 곳이다. 소개한 장소들을 거닐며 시간이 축적된 공간만이 품을 수 있는 깊이를 실감했다. 무언가를 새로 짓는 것도 좋지만, 오랜 시간 쌓아온 유산을 지키는 게 더 가치 있는 일 아닐까. 새삼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이 도시를 어떻게 기억하고 이어갈지에 대한 고민이 지금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진 헤이팝 서포터즈 유한솔

프로젝트
〈힐튼 서울 자서전〉
장소
피크닉
주소
서울 중구 퇴계로6가길 30
일자
2025.09.25 - 2026.01.04
시간
화요일 - 일요일 10:00 - 18:00 (월요일 휴무)
헤이팝
팝업 공간 마케팅 플랫폼, 헤이팝은 공간을 만드는 사람들과 그 공간을 채우는 콘텐츠와 브랜드에 주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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