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09

미술관에서 잠든 고양이

라이언 갠더 개인전, 변화율.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개념미술가, 라이언 갠더 Ryan Gander의 개인전이 마곡 스페이스K 서울에서 9월 17일까지 열린다. 일상적인 사물에 위트를 더한 작가의 작품은 관객에게 시간과 상실, 기호 등 다양한 질문을 던진다.
따뜻하니 노곤하다, 또는 불법 거주자들 (고양이 스모키가 조각가 조나단 몽크의 를 만났을 때). 2020

 

고상한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는 갤러리 안에 약간은 지저분한 고양이 한 마리가 단상에 누워서 낮잠을 자고 있다. 어디서 들어왔는지 궁금해서 주변을 둘러보니 그런 고양이가 한, 두 마리가 아니다. 세어보니 총 다섯 마리. 세상 상관없다는 듯이 자고 있는 고양이 무리를 보며 안절부절한 건 오히려 관객이다.

 

라이언 갠더의 <불법 거주자들> 연작은 길고양이들이 주요 현대 조각가의 논쟁적인 작품들이 놓였던 좌대를 하나씩 차지한 모습을 구현한 작품이다. 작가는 미술관에 들어온 고양이를 보고 그들이 어떤 의도도 없이 우연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자연적 기호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작가는 자연적 기호인 고양이가 인위적인 의도를 가진 관습적 기호인 좌대에 누워있는 모습을 통해서 관객에게 놀라움과 그 내면에 있는 이야기를 상상하도록 이끌어 낸다.

 

젊은 작가에게. 2019-2020

 

관객의 상상을 이끌어내는 스토리텔러

 

벽을 뚫고 나와 이야기하는 쥐, 뒤집힌 상태로 눈이 쌓인 의자, 진흙이 가득 묻은 스니커즈, 바닥에 버려진 편지… 전시 <변화율>에 전시된 28점의 작품들은 그 뒤에 있는 사연을 궁금하게 만든다. 이중 몇 가지 작품은 탄생 배경을 알아야 작가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다.

 

작가는 어린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업하기도 하는데, 바닥에 편지를 떨어뜨린 ‘젊은 작가에게 Letter to a young artist’는 작가가 실제로 8살 때 쓴 편지를 꾸겨서 전시장 바닥에 전시한 것이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뜨린 아이스크림을 청동으로 제작한 ‘움직이는 오브제, 또는 의도 A Moving Object, or Intent’와 천장 높이 날아간 검은색 헬륨 풍선을 재현한 ‘모든 종류의 0보다 257도 낮은 온도 Two hundred and fifty seven degrees below every kind of zero’는 작가가 어렸을 때, 풍선을 놓치고 아이스크림을 바닥에 떨어뜨렸을 때를 떠올리며 만든 작품이다. 라이언 갠더는 사물을 재현하는 방식으로 당시의 상황을 고스란히 갤러리 안으로 가져옴으로써 어린 시절 자신이 느꼈던 상실감을 전달한다.

 

끝. 2020

 

유머 속에 담긴 뼈아픈 진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어디선가 끊임없이 말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이 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벽에 구멍을 뚫고 나와 열변을 토하는 쥐 한 마리를 발견하게 된다. 자세히 들어보니 시간, 변화, 발전에 대한 이야기로 매우 철학적이다. 라이언 갠더의 <철학 쥐> 3부작 중 마지막 작업 ‘끝 The end’는 이렇게 모두가 피하고 더러워 여기는 쥐가 철학적인 주제를 이야기하고 인간의 잘못을 지적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심각한 쥐의 모습에서 피식, 웃음이 나지만 올바른 말만 하는 쥐의 이야기를 계속 듣다 보면 관객은 인간이 살아온 모습을 다시 되돌아보게 된다.

 

전시장에는 쥐가 한 마리 더 있다. 하지만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에 관객은 으레 짐작할 뿐이다. 작품 ‘끝’처럼 똑같이 전시장 벽면에 구멍이 뚫려 있지만, 쥐가 아닌 20파운드 지폐가 밀려 나오기 때문이다. 돈을 잡아당기고 싶은 충동이 일지만, 엄연히 작품이므로 참아야 한다. 이 작품은 인간의 욕심을 경계하라는 교훈을 담은 옛 동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작가는 쥐를 통해 돈이라는 사물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몇 인치의 눈이 쌓인, 뒤집힌 브로이어 의자. 2016

 

흐르고 변화하는 시간

 

전시 제목이자 ‘바뀌어 달라지는 비율’을 뜻하는 변화율은 시간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보여주는 단어다. ‘시간’은 라이언 갠더가 천착하는 주제 중 하나로, 작가는 시간의 흐름은 변화를 통해 인지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작품 속에서 시간의 흐름과 변화는 ‘눈 Snow을 통해 표현된다. 유명 디자이너 의자가 엎어져 있는 ‘몇 인치의 눈이 쌓인, 뒤집힌 브로이어 의자 Up ended Breuer chair after several inches of snowfall’와 ‘눈 내린 오후 뒤집힌 르 코르뷔지에 의자 Up turned Le Corbusier chair following an afternoon of snowfall’는 모래시계처럼 쌓인 눈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보여준다.

 

한편, 전시장 루프탑에 놓인 거대 조각 ‘우리의 긴 점선(또는 37년 전) Our Long Dotted Line (or 37 years previous) ‘는 작가의 아버지가 은퇴할 때 받은 손목시계로 집 앞 해변에서 주운 자갈을 묶은 형상을 높이가 2m 정도되는 조각상으로 재현한 것이다. 엄청난 크기로 확대된 시계는 그 자체로도 하나의 이야기를 내포하고 동시에 시간의 무게와 중요성을 떠올리게 한다. 이렇게 라이언 갠더는 시계라는 사물의 크기만 변화시켜 시간의 물리적 개념을 철학적 개념으로 바꾼다.

 

전시 전경 © 스페이스K

 

라이언 갠더는 일상의 물건을 미술관으로 가지고 들어와 약간의 위트를 섞은 후, 관객들이 스스로 작품 속 메시지를 상상하고 연상하도록 안내한다. 그러므로 전시 <변화율>은 작가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읽으려는 노력보다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무언가를 발견하는 데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도 잘 모르겠다면 28점의 작품을 모두 상세히 설명해 주는 오디오 가이드를 들어보도록 하자. 참, 한 가지 더. 벽 뒷면, 바닥, 천장, 창문… 작품이 곳곳에 숨어 있으므로 지나친 작품은 없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자.

 

 

허영은

자료 협조 스페이스K

장소
스페이스K 서울 (서울시 강서구 마곡중앙8로 32)
일자
2021.06.24 - 2021.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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