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인구가 전 세계 인구의 절반 가까이 되면서, 게임은 이제 우리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로 급부상했다. 그래서 게임을 마케팅에 활용하는 경우도 늘어났다. 패션, 음식, 제품 등, 일상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제품들에서 게임 캐릭터가 함께 하는 모습은 이제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게임을 기반으로 한 실사 영화도 꾸준히 개봉하고 있다. 현실과 게임의 경계가 점차 허물어지는 가운데, 게임과 다른 영역으로 보였던 예술 분야에서도 게임과 협업을 시도하며 시대에 적응하고 있다.
게임과 예술의 만남이 낯설지 않은 시대가 되면서, 이제는 게임 캐릭터가 전설적인 예술 작품과 만나는 일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오히려 신선한 조합으로 여겨지며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이색적인 마케팅 포인트로 인정받는다. 이런 가운데 수십 년 동안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게임 시리즈인 포켓 몬스터와 세계적인 미술관으로 손꼽히는 암스테르담의 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이 손을 잡았다는 소식에 전 세계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이 놀라운 만남의 이야기는 포켓 몬스터의 유튜브 채널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협업을 드러내는 티저 영상은 빈센트 반 고흐 작품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요소들인 해바라기와 풍차가 있는 풍경 속을 포켓 몬스터의 대표 캐릭터 피카츄와 이브이가 달리면서 시작된다. 게임 내 화면인 줄 알았던 풍경은 물감 한 방울이 떨어지면서 갑자기 반 고흐의 스타일로 탈바꿈한다! 어리둥절하는 캐릭터들에게 게임 스타일로 변신한 해바라기들이 다가오면서 영상이 마무리되고, 마지막에는 화가의 대표적인 정물화인 해바라기가 게임 캐릭터처럼 변경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포켓 몬스터와 반 고흐 미술관의 협업을 알리는 영상
협업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제대로 공개되지 않았지만 티저 영상 속의 모습만으로도 두 팬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 충분하다. 자연스럽게 게임을 좋아하는 이들의 참여가 활발해질 것은 너무나 자명해 보인다. 아마도 미술관 측도 이런 면을 염두에 두고 전 세계 사람들이 좋아하는 게임과 협업을 진행하지 않았나 싶다.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조합이지만, 자유롭고 신선한 아이디어가 각광받는 시대의 분위기 덕분에 두고두고 회자될 만남이 주선된 듯하다.
게임은 알고 보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힘을 합쳐야 만들어질 수 있다. 시나리오, 디자인, 음악, 영상, 기술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시너지를 내야만 완성된다. 게임을 하는 사람의 시각, 청각, 촉각 등 다양한 감각을 자극하는 동시에 감동까지 선사해야 한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보다 상업적인 영역에 신경 쓰는 예술 분야, 또는 종합 예술이라고 불러도 마땅하다.
이미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는 미디어 아트나 인터랙티브 아트에서는 게임 기기를 활용하거나 게임 문화를 활용한 작품들이 자주 선보이는 편이다. 새롭고 파격적인 작품 세계를 선보이고 싶어 하는 작가들이 자신의 아이디어에 게임 분야를 접목시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기존에 없던 것을 새롭게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예술계가 추구하는 방향이기에, 이런 도전은 환영받고 있다.
샨텔 마틴 Shantell Martin이 참여한 아케이드 게임 디자인
사진 출처: aspiremetro.com
마이크로소프트의 콘솔 게임기 엑스박스의 주변 기기인 키넥트(Kinect)를 활용하거나 차세대 게임 기기로 각광받는 VR 기기를 활용한 작품들이 차례로 선보이고 있다. 아예 예술가들이 게임 디자인을 새롭게 선보이면서 새로운 분야를 만들어나가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점차 사람들은 게임의 예술적인 면이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왼쪽부터 미야모토 시게루, 미셸 앙셀, 프레데리크 헤이날, 프랑스 문화부 장관
사진 출처: ouest-france.fr
이런 도전 덕분에 정부 차원에서 게임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프랑스의 경우 2006년 문화부 장관이 게임을 문화적 생산물이자 ‘예술적 표현의 형식’으로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게임 산업에 대한 세금 지원을 하고 있다. 또한 프랑스 게임 디자이너 미셸 앙셀(Michel Ancel), 프레데리크 헤이날(Frederick Raynal)과 함께 일본 게임 디자이너 미야모토 시게루에게 문화 예술 공로훈장을 추서하며 게임을 예술과 동등한 입장으로 대했다.
미국에서는 2011년 미국 국립 예술기금(National Endowment for the Arts)이 예술 프로젝트 보조금 분야에 게임을 포함시키며 예술의 한 장르로 인정했다. 같은 해에 미 연방대법원은 판결 과정에서 게임의 표현은 다른 예술 형식들처럼 보호받아야 한다고 법적으로 규정하며 게임의 예술성을 인정했다.
이런 대우에 힘입어 미술관, 박물관에서 게임을 주제로 한 전시가 진행되기도 하며, 미술관에서는 게임을 수집품 목록에 포함시키기도 했다. 특히 미국에서 게임에 관련된 전시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어 눈길을 끈다. 1989년 뉴욕 동영상 박물관이 ‘뜨거운 회로: 비디오 아케이드(Hot Circuits: A Video Arcade)’ 전시를 통해 예술로서의 게임을 소개했고, 2012년 스미스 소니언 미술관은 ‘비디오 게임의 예술(The Art of Video Games)’ 전시를 열어 예술적 매체로서 게임이 40년 동안 발전해 온 과정을 공유했다. 같은 해 뉴욕 현대미술관(MoMA)은 팩맨, 마인크래프트, 스페이스 인베이더, 심시티, 테트리스 등 총 14개의 게임을 소장품 목록에 포함시키며 게임의 예술적인 가치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게임과 예술: 환상의 전조
사진 출처: about.ncsoft.com
게임 사회
사진 출처: mmca.go.kr
우리나라의 경우 서서히 게임과 예술이 접점을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지난해 국회에서는 문화 예술 분야에 게임을 포함시키는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는 문화예술진흥법이 제정된 이후 50년 만의 일이다. 이런 분위기에 게임과 연계된 예술 전시도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엔씨소프트는 대전시립미술관과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이 공동 주최한 ‘게임과 예술: 환상의 전조’ 전시에 후원 및 참여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게임 사회’ 전시를 진행하며 게임의 역사와 더불어 게임이 동시대 예술과 사회에 미친 영향을 조망하는 자리를 선보였다.
물론 아직까지도 게임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은 존재한다. 게임과 예술의 만남에 관대한 미국에서조차 게임의 가치가 예술에 도달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유명한 영화 평론가인 로저 이버트(Roger Ebert)는 “게임은 다른 예술처럼 인간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게임은 규칙을 가지고 있으며 목표 기반의 상호작용성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예술이 될 수 없다고도 주장했다. 일본의 유명 게임 프로듀서인 코지마 히데오 또한 이버트의 주장에 동의하는 모습을 보이며, 게임은 예술과 달리 일종의 서비스 같은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의견을 밝혔다.
MoMA ‘Never Alone: Video Games and Other Interactive Design’ 전시
사진 출처: moma.org
이런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 게임과 예술의 관계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이들의 목소리도 높다. 구석기 시대의 동굴 벽화나 근대의 영화가 초기에는 예술로 인정받지 못했던 것처럼, 게임 또한 같은 수순을 밟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모든 게임이 예술에 포함될 수는 없지만, 일부 게임들은 예술로 봐도 좋을 만큼 타당한 요소를 갖추고 있다고 인정하는 논문도 나왔다.
전 세계 사람들이 모두 게임과 예술에 대해 같은 의견을 도출해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에는 저급 문화로만 여겨졌던 게임이 현재에는 문화 예술 산업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존재로 발전했다는 점은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로도 게임의 가치가 상승했다는 것은 너무나 명확해졌다. 빠르고 다채롭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앞으로 게임과 예술과의 관계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또 어떻게 변화할지 계속해서 지켜봐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글 박민정 객원 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