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09

교토를 그대로 옮긴 파리 겐조 하우스

그는 떠났지만, 건축물은 그 자리에 남아
명품 패션 브랜드 겐조(Kenzo)를 설립한 다카다 겐조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으며 콧대 높은 파리 패션계에서도 아시아계 패션 디자이너도 성공할 수 있다는 첫 사례를 남긴 인물이다. 고정관념을 깨뜨리며 성공한 인물의 일생은 당연하게도 도전의 연속이었다.
사진 출처: drapersonline

1939년 일본 효고현 히메지에서 태어난 그가 대학을 가기 위해 선택했던 학문은 패션이 아니라 문학이었다. 고베대학교에서 문학을 전공했지만 기모노의 매력에 빠지게 되면서 패션 디자이너로 진로를 바꾸기로 결심한다. 결국 그는 대학을 중퇴한 후 도쿄로 갔고, 그곳에서 분카패션대학의 첫 번째 남학생으로 입학한다. 졸업 후 그는 또 한 번 도전했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살던 집이 철거 대상이 되자, 그는 보상금을 들고 파리로 향했다. 홍콩, 베트남, 인도를 거쳐 1965년 파리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패션업계에 뛰어들었다. 레노마를 비롯한 여러 백화점에서 스타일리스트로 일했으며, 1976년에는 드디어 자신의 성을 딴 브랜드, 겐조를 설립하게 된다.

사진 출처: 겐조 페이스북

우리가 겐조라는 브랜드를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은 양귀비꽃과 함께 하는 향수, ‘플라워 바이 겐조(Flower by Kenzo)‘일 것이다. 간결한 모양의 향수병에 양귀비의 화려함을 품고 있는 모습에서 그의 디자인 스타일을 알 수 있다. 그는 파리에서 패션 디자이너로 활동하면서 동양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서양인들이 보는 이국적인 스타일이 아닌, 동양의 이방인만이 가지고 있는 전통문화의 아름다움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해석해 발산했다.

사진 출처: ft.com

동서양의 다양한 문화를 조화롭게 섞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동양화에서 쓰이는 자연물들을 서양식으로 변화시켜 독특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디자인으로 만들어냈다. 그와 더불어 일본 전통 의상인 기모노에서 영감을 받은 실루엣을 서양 복식에 적용하기도 했다. 동시에 그는 멕시코에서 북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권의 다양한 복장 요소를 융합하여 다채로운 문화의 조화를 꾀했다. 그의 ‘에스닉 룩(Ethnic Look)’은 누구에게나 이국적이지만 친근함도 함께 느껴지는 스타일로, 파리 패션계를 열광시키기에 충분했다.

사진 출처: carmelasdesignerproject.weebly.com

그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스타일, ‘빅 룩(Big Look)’은 자유를 강조하는 그의 철학을 반영한 디자인으로 패션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당시에는 몸에 딱 맞는 실루엣이 유행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트렌드와 반대로 넉넉한 원단을 여러 겹 겹쳐 입어 부피감을 주는 디자인을 선보였다. 자연스럽고 편안한 스타일은 사람들에게 신선함을 주기 충분했고,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이렇게 그의 일생만큼이나 도전 정신이 가득했던 그의 디자인은 현재까지도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사진 출처: nst.com.my

그의 성공은 일본 디자이너들의 파리 진출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승승장구할 일만 남았을 것만 같던 그의 패션계의 커리어는 조금 급작스러운 느낌으로 끝을 맺는다. 1993년 그는 자신의 브랜드를 LVMH에 매각했고, 1999년에는 패션계를 돌연 은퇴한 후 다양한 일에 도전했다. 예술에 도전한 그는 개인전을 열었으며 가구를 수집하는 등, 패션과는 조금 거리를 두면서도 자신만의 개성을 살리는 일을 꾸준하게 해오고 있었다.

사진 출처: 뉴욕 타임즈

2020년 10월 4일, 다카다 겐조가 향년 81세의 나이로 프랑스 뇌이쉬르센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전 세계에 애도의 물결이 이어졌다. 사인은 코로나로 인한 합병증이었다. 한때 패션계를 호령하며 휘어잡았던 인물도 팬데믹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브랜드 겐조는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반세기 동안 다카다 겐조는 패션 산업에서 상징적인 인물이었으며 창의성과 색채를 세상에 불어넣었습니다. 그의 낙관주의와 삶에 대한 열정과 관용은 계속해서 겐조의 기둥으로 남을 것입니다.”라며 애도했으며, LVMH 그룹 회장인 베르나르 아르노는 “다카다 겐조는 1970년대부터 패션에 시적 가벼움과 달콤한 자유를 불어넣어 많은 디자이너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라며 애도의 입장을 밝혔다. 그 밖에도 패션계의 유명인들과 전 세계의 그의 팬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사진 출처: christiesrealestate.com

그의 죽음 후, 그가 파리에 남긴 집이 다시금 조명을 받고 있다. 4층에 14,000평방피트(약 393평) 규모를 가진 이 집은 1993년에 지어져 올해로 30주년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이 집의 가장 큰 특징은 파리의 번화가인 바스티유 지역 주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일본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꾸며졌다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대나무, 벚나무, 단풍나무가 졸졸 흐르는 개울과 잉어 연못을 둘러싸고 있는 일본식 정원을 중심으로 차분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집을 짓기 위해서 자그마치 7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는데, 그 이유는 일본에서 모든 재료를 공수해왔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그가 얼마나 파리에서 일본을 구현하려 애썼는지 알 수 있다. 이런 노력 때문인지, 겐조는 이 집을 가리켜 ‘이곳에서 교토를 느낄 수 있다’라고 자신 있게 주장했다고 한다.

사진 출처: christiesrealestate.com

그가 집을 지을 때 참고한 것은 태국 실크의 아버지로 불리는 짐 톰슨(Jim Thompson)이 방콕에 지은 집이었다. 짐 톰슨은 태국에 매료되어 평생을 태국에서 살면서 태국의 실크 산업을 전 세계에 알린 인물로, 집을 짓기 위해서 야유타야 등 태국 전역에 있던 몇 백 년 이상 된 오래된 집을 방콕에 이전시켜 재건축했다. 서양인이 동양의 문화에 매료되어 그 전통을 살려가며 집을 지었기에, 집 존재 자체가 태국 내에서 전통문화유산 가치가 높은 곳으로 유명하다. 이런 모티프가 있었기에 겐조의 집도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뒤섞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서양식으로 지어진 내부에는 일본식 정원뿐만 아니라 일본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공간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집 안에는 골동품과 현대 디자인, 동양과 서양의 가구와 미술품 등이 곳곳에 혼재되어 있다.

사진 출처: christiesrealestate.com

2007년 겐조는 자신이 가진 것들의 규모를 축소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그동안 소유했던 다양한 미술품과 골동품들을 경매에 부쳤고, 작은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 후 이 집은 몇 차례 다른 주인을 맞이했다. 2016년 글로벌 마케팅 및 커뮤니케이션 그룹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s)의 공동 설립자인 올리비에와 이사벨 슈베(Olivier and Isabelle Chouvet) 부부가 이 집을 소유하게 되면서 조금씩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었다. 2018년 부부는 세계적인 건축가인 켄고 쿠마에게 집의 리모델링을 의뢰했다. 건축가는 겐조가 집을 지으면서 이곳을 서양과 동양을 잇는 다리로 만들려던 의도를 살리기로 결심한다. 이를 위해 현지 건축가이자 겐조와 함께 집을 지었던 로익 코레(Loïk Corre)와 협업을 진행했다.

사진 출처: christiesrealestate.com

그는 정원을 그대로 둔 상태로 정원에 딸린 침실을 재배치했다. 또한 미닫이문과 다다미가 깔린 다도실이 있는 일본관을 설계했다. 전통적인 일본 건축 자재인 대나무, 세라믹, 석재 및 목재를 사용하여 공간에 따스한 자연의 분위기를 더했다. 대부분의 변화는 미묘했지만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목재 플로팅 계단이나 새로운 테라스로 이어지는 미닫이문에 알루미늄 프레임을 더해 현대적인 분위기를 접목시키기도 했다. 켄고 쿠마의 섬세한 리모델링은 집을 더욱 자연과 가깝게 만들었으며 동시에 동서양의 조화를 현대적으로 매끄럽게 만들었다. 전설적인 패션 디자이너에게 찬사를 보내는 세심한 리모델링에 대해 겐조 또한 기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사진 출처: christiesrealestate.com

파리에서 수많은 업적을 이루었던 패션 디자이너는 이제 이 세상에 없고, 집의 주인도 더 이상 그가 아니지만 파리의 겐조 하우스는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계속해서 서양에서 이국적인 풍경을 더하고 있다. 집이 세워진 지 30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집에서 느낄 수 있는 감성은 디자이너의 디자인 철학 그 자체다. 시간의 흐름에 상관없이 아름다움을 간직한 건축물은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은은한 감동을 선사하리라 본다.

박민정 객원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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