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Films 100 Posters〉(이하 백필백포)는 상업 포스터가 갖는 관습과 규칙을 배제하고 창작자가 오롯이 자신만의 시선으로 영화의 정체성을 새롭게 해석한다는 데 의의가 있다. 프로젝트를 통해 제작된 영화 포스터들은 약 일주일간 열리는 전주국제영화제에서만 만날 수 있어 그 가치를 더한다.
전주에 도착했다면 먼저 영화의 거리로 발걸음 해보자. 영화의거리는 전주시 구도심 극장가를 중심으로 조성된 길로, 객사길과 맞물리는 고사동 오거리문화광장에서 전주영화제작소까지를 이른다. 오래전부터 영화관이 밀집해 있던 거리는 전주국제영화제의 중심 무대이기도 하다. 매년 봄, 영화제 기간에 영화 그 자체가 되는 이곳에 포스터 100점이 프린트된 현수막이 걸렸다. 눈을 사로잡는 그래픽을 따라 걷다 보면 영화의거리를 몇 번이고 돌게 될지도 모른다.
전시는 팔복예술공장으로 이어진다. 팔복동 산업단지에 위치한 문화예술플랫폼, 팔복예술공장은 한때 카세트테이프를 만들던 공장이었다. 운영을 멈추고 25년 동안 방치되어 있다가 황순우 건축가의 레노베이션을 통해 다시 문을 연 것이 2018년. 두 개의 동으로 이뤄져 갤러리, 창작 스튜디오, 예술교육관 등 다양한 공간이 들어선 이곳의 ‘이팝나무홀’에서 영화제 기간 동안 벽면 전체에 포스터 100점이 전시된다. 포스터 구매는 물론 에코백, 엽서집과 같은 다종다양한 굿즈도 함께 만날 수 있으니 세심히 살펴보자.
(좌) 영화 <너를 줍다>, 포스터 디자인: 정새우
(우) 영화 <체다를 만드는 법>, 포스터 디자인: 정미정
2023 백필백포의 큐레이션은 디자인 스튜디오 ‘포뮬러(Formula)’가 맡았다. 포뮬러의 멤버인 그래픽 디자이너 신건모와 타입 디자이너 채희준은 지난 전시에 디자이너로도 참가한 경험이 있다. 올해, 선수가 아닌 감독으로 프로젝트를 이끌며 이들은 무엇보다 참가자를 구성하는 일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픽 디자인’만의 영역으로 인식되기 쉬운 포스터 디자인의 개념을 보다 확장하고자 한 것이다. 사진, 회화, 일러스트, 영상, 3D 등 다양한 분야의 창작자들이 선보인 100점의 포스터는 어느 한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경계를 넘나드는 모양새다.
(좌) 영화 <빠라빠라미따>, 포스터 디자인: 파일드
(우) 영화 <밤 산책>, 포스터 디자인: 전채리, 홍기웅
영화를 보고 느낀 개인의 감상이 개인의 특성을 반영한 디자인으로 구현되기까지 또 백필백포가 포스터 100점을 세상에 내보이기까지 물밑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2023 백필백포의 큐레이터, 포뮬러를 만나 프로젝트 뒤편의 이야기를 물었다.
Interview with 포뮬러(신건모, 채희준)
2023 〈100 Films 100 Posters〉 큐레이터
ㅡ 백필백포는 ‘포스터’를 중심 요소로 둔 프로젝트죠. 디자인 스튜디오가 큐레이터를 맡은지라 이번 전시의 포스터에 가장 먼저 눈이 갔습니다. 어떤 부분을 강조하고자 했나요?
신 다양한 언어권의 영화들이 출품되는 국제영화제의 성격을 직관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100 Films 100 Posters’라는 전시명을 여러 언어로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관람객이 다국어에 초점을 맞출 수 있도록 글자를 제외한 요소들은 의도적으로 배제했으며, 영어와 한국어를 포함한 총 8개 언어가 ‘영어-한국어’, ‘독일어-힌디어’, ‘프랑스어-일본어’, ‘스페인어-중국어’로 짝을 이루어 하나의 모듈이 되고, 그 모듈들이 조합되는 방식으로 그래픽을 전개했고요. 포스터에는 8개의 언어만 사용되었지만, 더 다양한 언어들로 확장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 거예요.
ㅡ 포스터에 여러 언어가 등장하는 부분이 흥미로웠어요. 이전 작업에서 영감을 얻었다고요.
신 2018년, 〈100 Films 100 Posters〉에 디자이너로 참가해 <타카라, 내가 수영을 한 밤>이라는 영화 포스터를 작업한 적이 있어요. 일본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일본 감독과 프랑스 감독이 공동으로 연출한 작품이어서 감독들의 모국어로 제목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2개 언어에 한국어 제목을 더해 총 3개 언어를 담아 포스터를 완성했죠. 당시에도 다른 요소들은 배제하고 글자로만 작업했었는데, 그때의 작업이 영감이 된 것 같습니다. 그 밖에도 동일한 포스터를 반복해서 붙이는 타일링 방식이나, 국제적 행사인 올림픽에서 사용되는 색상들도 작업에 참고가 되었고요.
ㅡ 앞서 말한 내용들을 시각화하는 과정에서 특히 고려한 부분이 있나요?
신 글자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글자가 단순히 텍스트로 ‘읽히는’ 것이 아니라 조형적으로 ‘보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서체를 선택하고 글자를 배치하는 방식이 중요했어요. 우선 라틴 알파벳과 숫자는 기하학적인 형태의 서체를 선택했는데, 예를 들어 숫자 ‘100’은 마치 선과 원을 작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한글을 비롯한 전각 문자들은 셰리프가 있는 서체를 사용하고, 힌디어의 경우 쓰기 방향을 90도로 돌려 라틴 알파벳과 대비를 이루게 했습니다. 또 글자를 배치함에 있어서도 의도적으로 읽기를 방해하고 글자의 조형성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기 위해 각 단어의 음절과 무관하게 행을 구분했고요.
채 이전 백필백포 포스터들이 대부분 영문 전시명을 포함하고 있어 올해 포스터에서는 그 부분을 배제하고 싶었습니다. 마침 신건모 디자이너가 다국어 개념을 활용하지 않겠냐는 의견을 냈고요. 셰리프가 있는 서체라면 제가 생산한 ‘신세계’와 ‘탈’ 서체가 잘 맞을 것 같아 활용하게 되었습니다.
(좌) 영화 <건축학 고양이>, 포스터 디자인: 손미현
(우) 영화 <삼사라>, 포스터 디자인: 최건혁
ㅡ 참가자 구성을 위해 많은 조사 과정을 거쳤다고요. 올해 백필백포의 참가자는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신, 채 그래픽 디자인 외에도 다양한 분야 창작자들을 섭외하고자 했습니다. 또 동일한 포맷으로 9년째 열리는 전시이다보니 이전에 참가한 적 없는 새로운 창작자를 섭외하는 일에 주안점을 두었고요. 그 결과 올해 참가자 중 70%가 처음으로 본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ㅡ 참가자는 어떤 과정으로 작업을 진행하게 되나요?
채 참가자에게는 희망하는 영화를 고를 수 있도록 영화 리스트와 시놉시스를 함께 제공합니다. 이후에는 영화가 중복되지 않는 선에서 저희가 참가자와 영화를 매칭하고요. 배정이 완료되면 전주국제영화제 측에서 참가자가 영화를 관람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합니다. 종종 “참가자가 정말 영화를 보고 디자인하냐”라는 물음을 받을 때가 있는데, 상세한 답변이 되겠죠?(웃음)
(좌) 개막작 <토리와 리키타>, 포스터 디자인: 비주얼스프롬
(우) 폐막작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포스터 디자인: 신신
ㅡ 프로젝트를 이끌며 예상과 다르게 흘러간 부분도 있나요?
채 그래픽 디자인 외 분야 창작자를 섭외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래픽 디자이너들은 백필백포에 대해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상대적으로 그 외 분야 창작자에게는 낯선 프로젝트일 수 있겠더라고요. 이런 면에서 앞으로 여러 분야의 창작자들에게 본 프로젝트가 많이 알려지길 바라요. 프로젝트를 접하는 경험이 곧 참가로 이어지는 기회가 될 지도 모르니까요. 선순환을 통한 확장이 백필백포가 추구해야 할 다음 스텝이라고 생각합니다.
ㅡ 지난 4월 30일에는 2023 백필백포 참가자 중 3명이 패널로 등장하는 ‘토크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3명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려요.
채 정미정 디자이너는 백필백포에 참가한 경험이 꽤 됩니다. 지금까지 보여준 포스터들에서 드러나는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과 그 표현 방식이 흥미로워 ‘포스터 디자인’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길 바랐습니다. 많은 그래픽 디자이너들과 타 분야 창작자들에게 영감이 될 것 같았거든요.
비주얼 스프롬은 서울과 LA에 기반을 둔 스튜디오예요. 혁오 밴드의 ‘공드리’ MV를 비롯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D.P.〉의 오프닝을 제작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죠. 같은 영상 매체를 다루고 있기도 하고, 특히 패널로 선정한 정진수 감독의 꿈이 할리우드 영화를 찍는 일이라고 해 매료되었던 것 같아요.(웃음) 전주국제영화제의 특별전시인 만큼 영화에 대해 이야기 나눠도 좋겠더라고요.
마지막 패널은 디자인 스튜디오 CFC의 전채리 디자이너와 홍기웅 사진가인데요. 디자이너와 사진가 조합이라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아무래도 ‘협업’을 떼어 이야기할 수 없는 시대이니까요. 다채로운 컬래버레이션이 시선을 사로잡는 흐름 속에서 협업을 주제로 관객과 소통하고자 했습니다.
ㅡ 2023 백필백포에서 특히 주목하면 좋을 포인트를 꼽는다면.
신, 채 본 행사의 장점은 단순히 전시된 포스터들을 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자신이 원하는 포스터를 구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 속으로 자신만의 순위를 만들어보거나, 자신의 공간에 어울릴만한 포스터를 고른다는 느낌으로 관람을 하면 더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모든 포스터를 다 소장할 수 있는 엽서집도 만날 수 있고요. 전시 브로셔에는 참가자들의 작업 코멘트가 담겨있는데, 코멘트와 함께 포스터를 보면 미처 알지 못했던 작업자의 의도나 매력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전시 기간에 아쉬워 말자. 오프라인 전시는 오는 6일을 끝으로 막을 내리지만, 백필백포 홈페이지에서 올해를 비롯해 2015년부터 아카이빙 된 참가 포스터들을 만나볼 수 있다. 포스터는 물론 창작자 소개와 함께 코멘트까지 기록되어 있으니 자유롭게 둘러보면 좋을 듯하다.
아울러, 오는 9월 문화역서울284에서 개막하는 <타이포잔치 2023: 국제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에 백필백포가 하나의 섹션으로 연계 전시될 예정이다. 아직 구체적인 정보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현장에서 다시 한번 포스터를 관람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니 눈여겨볼 것.
큐레이션 신건모, 채희준
그래픽 디자인 포뮬러
참가 고정민, 구기정, 권수진, 권영찬, 권정현, 김경림, 김경수, 김국한, 김규호, 김다빈, 김도현(빠른손 스튜디오), 김새롬, 김세윤, 김소망, 김소희, 김영선, 김재민, 김재영, 김주애, 김지혜, 김현진, 김형진, 김혜수, 나종위, 나하나, 노혜림, 디디비비엠엠, 로호타입, 문정환, 문혜성, 박부미, 박성원, 박수미(서브서비스), 박신영(도시), 박신우, 박연미, 박영하, 박채희, 보이어, 북극섬, 비주얼스프롬, 손미현, 손요, 수명, 슬기와민, 신나리, 신신, 신용혁, 심우진, 아페퍼, 안도영, 어플리카, 와이팩토리얼, 유나킴씨, 유윤석, 유현선, 유혜리, 윤선영, 윤진, 윤현학, 이기준, 이대우, 이민영, 이에스더, 이하나, 이해인, 이형석, 인현진, 임솔, 임하영, 입자필드, 장수영, 장우석, 장준혁, 전채리&홍기웅, 정미정, 정새우, 조소희, 조슬기, 조열음, 조은주, 조태용, 최건혁, 최보연, 최서훈, 최종원, 트리샤킴, 파일드, 페어스튜디오, 필립킴, 하수임, 한나은, 한만오, 한사라, 한아림, 한정훈, 함지은, 홍성우, 홍은주&김형재, 황예지
글 김가인 에디터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전주국제영화제, 100 Films 100 Posters, 포뮬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