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01

계절을 감각하게 하는 공간, 참 제철 ②

시간이 빚은 맛, 제철의 맛
서울 종로구 서촌, 좁은 골목길에 선 건물 4층에 작고 단정한 바가 있다. 지난해 10월 문을 연 참 제철(Cham in Season)이다. 이 자리에서 손님을 맞은 지는 반년 남짓 되었지만, 임병진 대표·오너 바텐더와 서촌의 연은 훨씬 더 오래되고 깊다. 2018년 오픈해 국내 대표 바 중 한 곳으로 우뚝 선 바 참(bar Cham)을 시작으로, 2020년 문을 연 바 뽐(bar Pomme), 마침내 참 제철까지 서촌에 옹기종기 모여 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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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효

참 제철이 선보이는 음료에서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는 발효와 제철 재료다. 바텐더가 발효에 매력을 느낀 이유는 무엇일까. “원래 와인을 깊이 즐기는 사람은 아니었어요. 내가 하는 일과 와인은 다른 카테고리에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바텐더가 와인을 다시 바라보게 된 건, 참을 오픈하고 얼마 되지 않아 회식 겸 방문한 레스토랑 오스테리아 오르조에서다. “당시 김호윤 셰프가 체코의 양조장 밀란 네스타렉(Milan Nestarec)에서 빚은 ‘러브 미 헤이트 미(Love Me Hate Me)’라는 와인을 추천해 마셔 봤어요. 난생처음 경험하는 와인의 맛이었어요. 발효가 아주 잘 됐을 때 나오는 에스테르(ester) 질감, 플로럴한 향기와 홍차의 쌉싸름한 맛이 한데 어우러지며 입안을 황홀하게 만들더군요. 이런 풍미를 칵테일로 풀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죠.”

칵테일을 만드는 임병진 바텐더 ⓒ heyPOP

참 제철에서는 콤부차와 테파체(tepache)* 등 발효 재료들을 직접 만들어 사용한다. “발효하는 데는 절대적인 시간이 들잖아요. 그래서 아직은 이곳에서만 쓸 수 있을 만큼 조금씩 조금씩 준비하고 있어요. 점차 자리를 잡아서 대량으로 생산하게 되면 참이나 뽐에서도 사용할 수 있겠죠.”

* 파인애플 껍질로 만든 발효 음료.

제철

팜 투 바(farm to bar), 농장에서 자란 신선한 농산물을 바에 사용한다는 의미인데, 임병진 바텐더는 이 개념을 보다 폭넓게 해석한다. “직접 농장을 운영하며 작물을 재배해서 사용하는 곳도 있지요. 그것도 아주 좋은 방법이지만, 저는 지역의 특산물이라든지 각각의 개성을 가진 생산자들을 살피는 일이 흥미로워요. 같은 작물이라도 생산자의 가치관이나 재배 방식에 따라 다른 특징을 가지게 되잖아요. 특징이 느껴지는 재료를 받아서 사용하는 게 재미있어요. 참과 뽐을 운영하며 그런 방식을 취하고 있죠.” 참 제철을 열고 ‘제철 재료’에 보다 집중하다 보니, 뜻밖에 좋은 효과가 있었다고. “제철 재료는 우선 수급이 쉬워요. 선뜻 사용하기 어려운 고가의 재료도 제철엔 저렴하죠. 또 어디서 사든지 싱싱하고요. 제철이라는 콘셉트가 어렵거나 대단하지 않아요. 오히려 더 가볍게 신선한 재료에 다가가는 하나의 방법이 됩니다.”

ⓒ heyPOP

“술이 먼저 확 돋보이고 그 후 여러 향이나 맛이 느껴지는 칵테일도 좋지만, 여기서는 좀 다른 걸 추구해요. 다양한 재료가 만들어 내는 복합적인 풍미가 느껴지는 가운데, 술이 자연스레 드러나는 칵테일을 선보이려고 하죠.” 참 제철에서는 알코올이 확실하게 도드라지기보다는 조화로운 하나의 맛으로 다가가는 메뉴를 내놓겠다는 것.

참 제철 백바의 술 일부 ⓒ heyPOP

이 업장의 정체성을 떼어 두고, 임병진 바텐더 개인의 철학은 어떤지도 궁금했다. “맛의 일체감을 중요하게 여겨요. 또 서브하고 시간이 좀 흘러서 칵테일이 풀어졌을 때 느껴지는 향과 맛에 신경 씁니다. 뇌로 먼저 만들지 않으려고 하죠.” 뇌로 만들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물었다. “마티니는 이래야지, 맨해튼은 이래야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무조건 어떤 맛이 나야 한다고 정해 두지 않는 거죠. 칵테일마다 개성이 다 다르다는 사실을 계속 상기하려고 해요. 여러 재료의 특징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음료가 아니라, 한 잔 안에서 온전히 완성된 작품이 나오게 하고 싶다고 할까요.”

Ι 참 제철의 칵테일

2023년 봄 메뉴. 차후 메뉴가 변경된다.

1. 봄날은 간다(One Fine Spring Day)

ⓒ heyPOP
재료 진, 당귀, 더덕, 라임, 직접 만든 진저비어

한국의 봄을 담은 칵테일. 산에서 나는 풀의 향을 당귀로 표현했다. 더덕과 진저비어를 배합한 덕분에 흙 향이 은은하게 풍긴다. 진저비어는 직접 발효해 만들어 사용한다. 뮬(mule) 타입 칵테일이므로 구리에 에나멜을 입혀 만든 워크샵와이의 잔에 낸다.

2. 와드 8(Ward 8)

ⓒ heyPOP
재료 아이리시 위스키, 체리, 쑥, 간장, 식초, 압생트, 레몬, 우유

1920년대쯤 미국에서 나온 칵테일 와드 8을 재해석한 칵테일. 봄이 제철인 쑥과 체리가 주재료다. 식초를 떨어뜨려 자칫 느끼할 수 있는 우유의 풍미를 잡아준다. 간장은 칵테일에 감칠맛을 부여한다. 산뜻하면서도 입에 남는 맛이 흥미로운 한 잔. 얼음에 심어 둔 당근 모양 초콜릿을 뽑아 먹는 재미가 있다.

책처럼 구성한 메뉴판. 메뉴는 계절마다 달라진다. ⓒ heyPOP

팀과 자부심

참과 뽐, 참 제철까지 업장이 늘어난 만큼 자연스레 그와 함께하는 이들도 퍽 많아졌다. 구성원이 늘었을 뿐 아니라 오래 일한 이들이 독립해 자신의 바를 열기도 한다. 조직이 성장해 나감에 따라, 더 많은 구성원과 소통하는 방식이 궁금했다. “업장을 열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땐 바 오너로서도 바텐더로서도 무척 예민한 성격이었어요. 직원들이 모두 나처럼 하길 바랐고, 어긋나는 점이 보이면 곧바로 지적하고 수정하게 했죠. 그러다 보니 오너가 늘 주인공이고, 다른 친구들은 백업하는 모양새가 되더라고요.”

ⓒ heyPOP

불현듯 그렇게 느낀 후, 임병진 바텐더는 직원 개개인의 장점을 끌어내면서 자율적으로 일하는 조직을 꾸리려는 노력을 시작한다. “분위기를 좀 더 편하게 만들어서 자기 의견을 자연스레 말하게끔 했어요. 그렇다고 무조건 마음대로 하라는 건 아니에요. 음료에 있어서는 기본적으로 가게의 스타일을 존중해야 하지요. 제가 바 참에 근무하고 있는 날 공간의 완성도가 100이라고 한다면, 없을 때는 90에서 95 정도 될 거예요. 그런데 제가 있는 날은 저 때문에 직원들이 긴장하겠죠. 그들이 긴장한 채로 일하는 경우와 저 없이 일하면서 직원들 스스로 ‘이 공간의 주인은 나’라고 생각하며 일하는 바이브가 또 다르거든요. 길게 봤을 때는 후자가 훨씬 좋을 거라고 믿어요.”

테이블에 고정된 조명 역시 워크샵와이의 작품 ⓒ heyPOP

그의 말 곳곳에 팀을 향한 신뢰와 애정이 묻어났다. “식구가 는 만큼 이제는 이들을 먼저 챙기려고 합니다. 다들 항상 자부심을 갖고 일했으면 좋겠어요.” 그가 말하는 건강한 자부심이란, 부끄럽지 않게 일궈 온 시간에서 비롯하는 것처럼 보였다. “저는 우리가 음료인으로서 존중받길 원해요. 존중을 받기 위해서 완성도 높은 잔을 내놓으려고 노력하자는 얘길 자주 하죠. 나의 자부심 역시 중요하지만, 우리 스스로 완성되어 있는지도 항상 돌아보자고요.”

임병진 바텐더는 바텐더로 일을 시작한 시기를 2006년에서 2007년으로 넘어가던 즈음으로 기억한다. 그가 이 일에서 처음 발견한 기쁨은 무엇이었을까. “제가 일을 시작할 당시엔 플레어 바* 중심으로 바 문화가 형성돼 있었어요. 바 앞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손님들을 보면서 문득 즐거웠어요. 사람을 대하는 일도, 사람들이 만족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았습니다. 내향적인 편인데요, 바텐더로 일하며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알게 되는 제 모습도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아요.”

* 화려한 퍼포먼스를 통해 시각적 즐거움을 함께 제공하는 바
ⓒ heyPOP

그로부터 15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한 가지 일을 십 년 넘게 해 왔다면, 그 사이사이 또 다른 기쁨이 찾아들지 않았을까. 시간이 흘렀으므로 알게 되는 기쁨에 대해서도 물었다. “바텐더는 낮에 일하는 사람들과는 다른 시간대를 살잖아요. 그래서인지 바 씬(scene)이 크지는 않아도 돈독해요. 서로가 서로를 알고, 격려하고 경쟁도 하고요. 이 문화 안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 꽤나 즐거워요.”

ⓒ heyPOP

글·사진 김유영 기자

장소
참 제철
주소
서울 종로구 사직로 133-10 4층
김유영
에디터. 이야기를 듣고 기사를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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