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05

산업 부품에서 발견한 미학, 아트퍼니처 디자이너 이형준

파이프 피팅에 불어넣은 생명력
프랑스 오흘레앙 보자르에서 디자인을 공부하고 서울 문래동에 터를 잡은 신진작가 이형준은 남다른 시각의 디자이너이자 제작자다. 문래동 철공 단지에서 발견한 산업 부품을 자신만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재해석한 아트퍼니처를 선보인다. 유체의 흐름을 바꿔주는 산업 부품인 파이프 피팅(Pipe Fitting)을 공예 소재로 활용해 이를 생명력 있는 이야기로 탈바꿈했다. 자신이 속한 지역 사회를 관찰하고 이를 작업 활동에 적용한 그의 시선에 대해 들어보았다.
프랑스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후 3년 전 문래동에 자리 잡은 신진작가 이형준. | 사진: 그리드 스튜디오

문래동 철공소 한가운데 작업실이 있습니다.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프랑스 국립미술학교 오흘레앙 보자르(ESAD d’Orleans)에서 디자인을 공부하고 서울로 돌아와 처음 작업실을 구한 곳이 여기예요. 집과 가깝기도 했고 흥미로운 산업 부품과 공장이 밀집되어 있어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리고 근처에 문래 창작촌이 있어 숙련된 철공소의 장인과 젊은 창작자들이 어우러지며 소통할 수 있는 동네라고 생각했어요. 이 지역을 거니는 것만으로도 재밌는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어요.

이형준 작가가 즐겨 찾는 파이프 피팅 공장. | 사진: 그리드 스튜디오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며 여러 소재를 경험했다고요. 그중에서도 금속 소재에 집중하는 것 같아요.

금속, 나무, 도자 등 다양한 소재를 경험하며 저에게 맞는 재료와 방식은 무엇일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한 분야에 집중하는 한국의 공예 학교와는 달리 제가 다닌 학교에서는 다양한 소재를 경험하게 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디자인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 그 과정을 연구하고 스스로 습득하게 합니다. 작업 초기에는 나무와 금속을 주로 사용했어요. 나무 특유의 따뜻한 감성과 금속의 고급스러우면서도 차가운 매력이 잘 어우러진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다 문래동에 자리를 잡으며 스테인리스 스틸에 관심을 갖게 됐고 자연스럽게 파이프 피팅이라는 산업 부품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대량생산 체제에서 쏟아져 나오는 산업 부품과 제품에서 물질의 지속 가능성과 존재 가치에 대한 의구심이 들기도 했고요.

 

그러한 의구심이 들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산업혁명 이전에는 수공예 장인들이 쌓아온 기술을 활용해 물건을 생산했어요. 하지만 기계를 활용한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며 제품이 쉽게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이로 인해 장인들은 무너졌고요. 산업혁명 이후 우리는 쉽게 제품을 구입하고 사용하고 버리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문래동 작업실 생활을 하며 다시 떠올린 거죠. 기계에 의해 틀에 갇힌 기준으로 만들어진 인공물들이 그 탄생의 속도만큼 빠르게 소모되고 버려지는 것 같아요.

 

다양한 산업 부품 중에서도 여러 형태의 파이프 피팅을 조합해 만든 작품을 선보이고 있어요. 작업 과정과 디자인 특징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파이프 피팅은 유체의 흐름을 바꿔주는 산업 부품이에요. 공장에서 생산되는 것들은 생명이 없다고 여겼는데 파이프 피팅은 나무와 비슷한 특징과 형태를 가지고 있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여러 개의 파이프 피팅을 알곤용접해 튼튼하게 성형하며 가구나 소품의 기능 있는 오브제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 위에 그라인더로 나이테와 같은 텍스처를 새겨 넣습니다. 텍스처를 새기는 작업은 수련을 하듯 상당한 시간과 반복 행위를 요하는데 이를 통해 저의 기운을 사물에 부여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어요.

이형준 작가는 나무의 개념과 파이프 피팅의 기능을 결합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 사진: 그리드 스튜디오

공장에서 생산되는 것은 생명이 없다고 여겼는데 파이프 피팅은 나무와 비슷한 특징과 형태를 가지고 있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파이프 피팅 안에서 흐르는 유체의 흐름이 마치 나무 안에서 흐르는 물의 흐름과 비슷하다고 느꼈습니다.

이형준

 

 

파이프 피팅과 나무의 모습을 연결 지은 이유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처음에는 파이프 피팅의 곡선을 유심히 관찰했어요. 큰 방향에서 작은 방향으로, 작은 방향에서 큰 방향으로,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흐름을 연결하거나 막는 역할을 합니다. 파이프 피팅 안에서 흐르는 유체의 흐름이 마치 나무 안에서 흐르는 물의 흐름과 비슷하다고 느꼈습니다.

 

파이프 피팅 시리즈 중 검은색 오브제의 표면처리 기법이 독특한 것 같아요.

검은색이 아닌 오브제는 모두 폴리싱(윤을 내는 연마 작업)을 하는데 검은색은 폴리싱을 하지 않고 그 위에 먹을 칠해요. 날것의 스테인리스 스틸 표면에 먹이 스며드는 거죠. 두세 번 먹을 칠한 후 바니시로 코팅을 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그라인더로 텍스처 작업을 하는 거예요. 스테인리스 스틸 위에 먹을 입히는 방식은 제가 고안한 것인데요, 생명력 있는 자연, 나무를 표현한 것인 만큼 자연의 재료를 활용해 색감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이형준의 파이프 피팅 시리즈. | 사진 제공: 이형준

금속공예를 전공하지 않았는데 소재나 기법 등의 공부는 어떻게 하나요?

금속공예를 전공한 다른 작가님과 비교한다면 기술적인 부분이 부족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학교에서 기획과 완성을 위한 다양한 방법을 가르쳐 준 덕분에 제 생각을 표현하고 결과를 도출해 내는 데에 큰 어려움을 느끼지는 않아요. 금속의 특징과 기법은 전문 자료를 통해 터득해 나가고 있고 철공소 사장님들께 여쭤보며 해결해 나가고 있습니다.

금속공예 관련 기법을 스스로 터득해나가고 있는 이형준 작가. | 사진: 그리드 스튜디오

파이프 피팅 시리즈를 선보이기 전 ‘U 시리즈’를 만들었어요.

가구와 조형에 관심이 많아 최대한 기능을 빼고 형태에 집중해 만들었던 시리즈예요. 금속과 나무를 조합해 디자인했죠. 간결한 형태가 특징인데, 이 시리즈를 들고 여러 페어에서 전시했어요. 그런데 U 시리즈와 비슷한 디자인이 꽤 있더라고요. 그 작업물을 만든 작가 또는 브랜드들은 수작업이 아니래요. 공장에서 찍은 것이라 제 것보다 가격도 저렴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마감이 더 좋았어요. 결코 시장 경쟁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없을 것 같아 U 시리즈는 접었습니다.(웃음)

 

특별히 어떠한 공간을 염두에 두고 작업하는 편인가요?

어떠한 공간에서든 잘 스며드는 작품이길 바라요. 특히 가정집에서 잘 쓰이면 좋겠다 싶다가도 그러기에는 제 작품의 인상이 조금 세지 않을까 싶은데, 또 생각보다 집에서 사용하겠다고 구입하는 분들이 꽤 있어요. 2m 대리석 테이블을 제작 중인데 다리를 파이프 피팅 작품으로 해달라는 주문도 있었고요. 모던한 디자인의 아파트 인테리어를 한 분들이 조금 특별한 공간을 만들고 싶을 때 제 작품을 찾아줘요. 브랜드 편집 숍 같은 곳에서는 선반 기능이 있는 제 작품을 활용해 주면 좋을 것 같아요.

 

3월 22일부터 4월 16일까지 인사동 KCDF윈도우갤러리에서 개인전 <불안공존>을 선보입니다. 지금껏 보여준 파이프 피팅 시리즈와는 조금 다른 모습인 것 같아요.

파이프 피팅을 활용해 나무의 형태를 만들던 기존의 작품에서 한 가지 개념을 더했습니다. 위로 뻗어 오르려고 하는 나무의 중간중간에 사각형 프레임의 인위적 형태를 끼어 넣은 것인데요, 이는 자연 안에 사각형 건물이 자리 잡으며 자연의 흐름을 끊어 놓은 도시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사각형의 인공물과 나무의 형태를 가진 생명력의 불안정한 공존, 지금 우리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3월 22일부터 4월 16일까지 인사동 KCDF윈도우갤러리에서 열리는 . | 사진: 그리드 스튜디오

프랑스에서 5년간 생활하다 이제 국내에서 활동한지 3년 정도 되었어요. 어떠한 작가로 성장하고 싶나요?

파이프 피팅 하면 이형준이라는 작가가 떠오를 수 있도록 많은 양의 작업과 활동을 보여줄 거예요. 해외 활동도 생각하고 있고요. 지금 머릿속에 여러 형태의 아이디어가 있지만 사실 모든 걸 다 실제로 만들 수는 없어요. 하지만 그 아이디어를 3D 이미지라도 만들어서 SNS에 올립니다. 파이프 피팅을 활용해 이러한 형태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제안하는 거죠. 그것이 저를 보여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지금 우리는 1인 창작자가 활동하기 좋은 시대에 살고 있어요. 해외 활동도 계획 중이라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세운 계획과 자신만의 홍보 방법에 대해 알려주세요.

해외 갤러리나 플랫폼 등에 지원하며 제 작품이 계속 노출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SNS을 통해 홍보할 때는 지역 타깃을 해외로 설정하고요. SNS 홍보는 가격 대비 효과가 좋아요.(웃음) KCDF갤러리 공모전시 사업에 지원한 이유도 작품 제작과 전시 지원은 물론 약 한 달간 불특정 다수가 다니는 길에 제 작품을 노출할 수 있다는 기회를 주기 때문이에요. 앞으로도 제 작업을 소개할 수 있는 자리라면 적극적으로 움직일 거예요.

박은영 객원 필자

사진·영상 그리드 스튜디오

자료 제공 이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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