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27

디자이너의 감도 높은 취향으로 압축된 공간

PDF 서울
디자이너 개인의 취향과 안목을 자재 삼아 만든 공간은 어떤 모습일까? 서울시 이태원동의 호젓한 골목을 지나다 보면 모던한 공간이 모습을 드러낸다. 최근에 문을 연 PDF 서울이다.
©PDF 서울

Photo사진, Design디자인Fashion패션의 앞 글자를 따니 PDF가 됐다. 아트 북 책방뿐만 아니라 디자인 스튜디오, 팝업 스토어로도 활용될 수 있는 이 공간은 오롯이 개인의 취향과 관심사로 꾸려진 곳이다. 

 

일단 공간에 들어서면, 스틸steel과 유리의 차가움이 느껴진다.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면 그제야 다양한 소재와 색감을 지닌 아트 북이 공간과 대비를 이루며 존재감을 뽐내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한동안 공간에 머무르다 보면, 어떤 기기에서도 깨지지 않고 호환되는 PDF 문서처럼 취향과 안목이 하나의 형태로 응집돼 뚜렷하게 그려진다. 어떤 이의 취향이 반영된 곳일까? 공간에 놓여있는 물건에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사람에게로 눈길이 간다.

Interview with 

이승현 대표 (@LAYER1)

©PDF 서울

—PDF 서울을 열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미국에서 유학하면서 좋아하던 동네가 있었어요. 브루클린 덤보라는 곳이에요. 그곳을 자주 돌아다니곤 했죠.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괜찮은 디자인숍에 들어가게 됐어요. 디자인 상품도 팔고 있었지만, 한쪽 벽면에서는 전시를 열고 있었고, 코너에서는 커피를 팔고 있었어요. 일종의 복합 문화 공간이죠. 요즘 한국에는 그런 공간이 많잖아요. 그런데 제가 유학할 당시만 해도 그러한 공간은 굉장히 생소했습니다. 복합 공간을 처음 마주하고 굉장히 신선한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막연하게 ‘나도 한국 돌아가면 그런 공간을 만들고 싶다’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PDF 서울을 열기 전에 한 번의 시행착오도 거쳤다면서요. 

유학 생활 후 한국에 돌아온 시기가 2010년이었어요. 한국에 온 뒤 무턱대고 도전을 했어요. 상호는 ‘LAYER1’이였고, 2013년부터 아트 북 카페를 약 1년 정도 운영한 것 같아요. 그때는 브랜딩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기획과 노하우도 없었던 터라 막연하게 시도를 했는데 결국에는 실패를 맛봤죠. 그 이후에 차츰차츰 공간을 준비하면서 여러 직장에서 일을 했어요. 포토그래퍼, 디자이너, 미술관 큐레이터, 광고 분야에서 아트 디렉터로도 있었습니다. 무언가를 시각화하는 영역에 꾸준히 발을 담그고는 있었어요. 그런데 직업이랑 제가 하고 싶은 것 사이에 계속 간극이 벌어지더라고요. 늦기 전에 정말로 하고 싶은 걸 해야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섰습니다.

©LAYER1
©LAYER1
©LAYER1

—그간 다양한 일들을 해오셨네요. 전공은 무엇인가요?

전공은 그래픽 디자인이에요. 한국에서 2년 정도 건축공학과를 다니다가 코네티컷주에 위치한 대학, 산업 디자인 학부로 편입했어요. 제품 디자인을 1년 공부하다 보니 그래픽 디자인이 저와 더 잘 맞더라고요. 그래서 교수님과 상의 후에 그래픽 디자인 학과 3, 4학년을 다니고 졸업했어요. 졸업 이후 뉴욕에서 약 2년 반 정도 일하다가 한국에 돌아오게 됐습니다.

—‘PDF’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공간과 너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이름을 짓기까지 어떤 숨겨진 이야기가 있나요?

좋은 이름을 만나기 위해 온라인 검색을 엄청 했어요. 심지어 영한사전까지 구매해서 찾아봤습니다. 공간과 이름, 사람 등 모든 것의 결을 맞추는 게 곧 브랜딩의 기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중을 가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디자인 작업하는데 PDF 파일이 눈에 확 띄더라고요. 제가 좋아하는 취향의 앞 글자를 조합해도 PDF가 된다는 것을 알고, 이름을 짓게 됐는데 굉장히 만족스럽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름에 대해 흥미롭게 생각해 주시더라고요. 

©PDF 서울

—공간에 있는 책들은 어떤 기준으로 모였나요?

제 취향이 담긴 컬렉션으로 이뤄져 있고 사진, 디자인, 패션 분야의 아트 북들이 주를 이뤄요. 많은 분들이 책들을 판매하기 위해 구입한 줄 아시는데, 사실 이 책들은 10년 동안 제가 모은 것이에요. 그래서 판매하지 않는 소장용 책들도 있습니다. 현재 온라인에서 구입할 수 있는 책들을 판매는 하고는 있는데 판매하지 않는 책들도 많아요. 

—기존에 소장하고 있었던 도서들이라니. 막대한 도서를 어떻게 보관했어요?

이전에 다녔던 회사 사무실에 제 공간이 있었어요. 거기에 보관하고 있었죠. PDF 서울에 있는 컬렉션의 70%는 사무실에 있었고, 30% 정도는 제 집에 있었어요. 이제까지 모아온 것들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어요. 한 공간에 모아 놓으니 그제야 많다는 것을 실감했죠. 

 

—원래 무언가를 수집하는 것을 좋아했나 봐요.

어렸을 때부터 약간의 수집벽이 있었던 거 같아요. 초등학교 때 종이 잡지를 오려서 모으곤 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술, 담배로 나가는 돈을 꾸준히 모으면 나만의 컬렉션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30대 때 하게 됐어요. 그때부터 취향의 물건을 제대로 모으기 시작해서 관심 있는 사진과 디자인, 패션 관련 서적들이 모이게 된 거죠. 한 달에 30만 원 정도 예산을 잡아 놨고, 그 안에서 꾸준히 수집을 하다 보니 10년 치 컬렉션에 다다르게 됐네요.

베를린에서 이승현 대표가 포착한 복합 공간 ©LAYER1

—시장 조사도 열심히 다녔다고요.

제가 이제까지 모아온 시장조사 자료들은 뉴욕의 공간들 위주였어요. 어떤 콘셉트를 지정하는 게 좋을지 연구하는 과정에서 베를린이 끌리더라고요. 제가 유학할 당시만 해도 뉴욕이 독보적인 세계의 문화 중심 도시였지만 지금은 베를린이 뜨거우니까요. 그래서 베를린에 가서, 미술관과 갤러리, 디자인숍, 편집숍들을 돌아다니면서 마음에 드는 곳을 찾아다녔죠. 그때 본 것들이 정말 도움이 많이 됐어요. 그전까지는 막연하게 구상만 하다가 베를린에 다녀오면서 본격적으로 실행하게 되었죠. 

 

—터를 잡을 공간의 형태에 대해서도 심사숙고했을 것 같아요. 

맞아요. 베를린 시장 조사를 다녀오고, 약 6개월 동안 적합한 곳을 찾아 헤맸어요. 가장 우선시했던 게 직사각형이거나 정사각형일 것, 그다음에 기둥이 없어야 하고, 층고가 높았으면 좋겠다는 거였어요. 공간 찾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공간이 마음에 들면 너무 비싸거나, 가격이 괜찮으면 조건이 맞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작년 9월 정도에 이 공간을 만나게 됐는데, 들어가자마자 각이 딱 나오더라고요. ‘이곳이다’ 싶었죠.

—PDF 공간 안에서 특별히 아끼는 소장품도 있을 텐데. 소개해 줄 수 있나요?

애정 하는 물품들은 공간의 높은 층고를 활용해 윗편에 진열해 뒀어요. 수요가 많은 책들은 재판이 되는 편인데, 사진 화보집은 계속 발행되지는 않더라고요. 그래도 몇몇 개의 책들은 아마존이나 이베이 등에서 찾을 수는 있는데, 수량이 많지는 않아요. 그러다 보니 구하기 어려운 한정판 에디션이 더더욱 소중하게 느껴지곤 해요. 이외에도 제가 좋아하는 패션 브랜드 전시회에서 직접 구입한 포스터나 좋아하는 포토그래퍼의 작품도 있는데 판매하지는 않고, 공간 내에 따로 보관하고 있습니다.

©PDF 서울

—그간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일해왔어요. PDF 서울의 경우 개인이 모든 과정을 직접 담당했는데 장단점이 있지는 않았는지.

PDF 서울을 준비하면서 가장 걱정한 부분은 ‘내 취향을 어떻게 구체적인 형태로 실현할 수 있을까?’였어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 저 혼자 해야 하는 것이었으니 고민이 많이 됐습니다. 사실 이 부분이 단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사실 저에게는 장점이었습니다. 제가 회사를 다니면서 느꼈던 것은 늘 기획이나 아이디어가 좋은데 항상 아웃풋이 아쉽게 나오는 거였거든요. 내부 회의 또는 클라이언트의 요청에 따라 이리저리 바꾸다 보면 원래 기획했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오게 되더라고요. 그 과정이 항상 아쉬웠기에 PDF 서울은 브랜딩도 직접 했고, 인테리어와 설치, 디스플레이, 심지어 작은 소품 진열까지도 제가 다 담당했습니다. 더 많은 노력을 쏟아부어야 했지만 그 결과물이 저는 만족스럽습니다. 

—공간을 유지하는 것에 대한 걱정도 있지 않아요?

없다면 거짓말이죠. 한국에 복합 문화 공간이 많긴 하지만, 오랫동안 유지되는 곳이 많지 않아요. 일단은 안정적인 사업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워낙 트렌드와 같이 가는 일이라 늘 주시하고 있어야 하고요. PDF 서울은 당장의 이윤보다 나만의 공간을 내고 싶은 욕심이 컸기에 시작을 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경제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다면 버티지 못할 겁니다. 만일 앞으로 공간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면 그래픽 작업과 인테리어, 브랜딩 작업 등을 계속해서 보완을 해 나갈 예정이에요. 이와 더불어 PDF만의 굿즈나 디자인 상품들을 제작해 카테고리를 확장할 생각입니다.

©PDF 서울

—PDF 서울은 다목적 공간이에요. 예정된 프로젝트가 있나요? 

일단, 제가 자체 디자인한 상품이나 작업했던 사진들도 판매할 생각입니다. 이외에도 라이프스타일 관련 물건이나 문구, 사무용품 등도 판매를 구상하고 있고요. 팝업스토어의 경우, 현재 몇 개의 업체와 미팅 중에 있어요. 구체적인 일정이나 비용 절감 문제 등을 협의한 후에 결정해야 해서 빠르면 3월이나 4월 중에 선보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앞으로의 포부는?

한국의 경우, 유행의 전환이 굉장히 빠른 편이잖아요. 그래서 기존에 탄탄하게 갖춰 놓은 이미지일지라도 유행이 지나면 금방 식상하게 여겨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점차 단계를 밟아 가면서 디스플레이와 구성도 변화를 주고, 트렌드를 읽어 가며 이를 공간에 반영해 나갈 예정이에요. 최종 목표는 거창한데요 (웃음). PDF 서울을 도심 속 문화공간으로 정착시키는 것입니다. 브루클린에 MoMA PS1이라는 곳이 있어요. 신진 작가의 작품이나 실험적인 예술 실천이 많이 이뤄지는 곳이라 제가 유학시절부터 참 좋아했는데요. 무엇보다 이곳이 흥미로웠던 이유는 시즌마다 파티를 했기 때문입니다. 미술관에서 여는 파티라니 당시에 저에게는 문화 충격이었어요. 아이디어와 영감이 떠오르는 그곳에서 저는 영감을 많이 받았습니다. 미래의 PDF 또한 도심 속에서 진정으로 즐길 수 있으면서 예술적 영감도 얻을 수 있는 문화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도경 기자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PDF 서울

하도경
수집가이자 산책자. “감각만이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현실”이라는 페소아의 문장을 좋아하며, 눈에 들어온 빛나는 것들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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