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2023 The Sydney International Arts Series’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서도호의 개인전은 시드니에서 세계 최고의 전시를 소개하고자 하는 아트 시리즈의 취지에 걸맞게 199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서도호의 지난 30여 년간의 업적을 총망라하는 포괄적인 프로젝트로서 회고전의 성격을 띠고 있다. 정체성과 집에 대한 서도호의 지속적인 명상이 담긴 작품들은 작가의 유년기부터 가족의 품에서 자란 서울의 집, 뉴욕, 베를린, 런던 등 타 도시로의 이주, 그리고 그가 성인이 된 이후 살아온 다양한 공간들에 대한 독특한 전기적 특징을 보여준다.
서도호의 작업은 기억, 장소, 그리고 디아스포라적 경험의 교차점에 놓여 있으며 내면과 외부 세계 사이의 미세한 균형을 상기시키면서 집단과 개인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다른 문화권의 도시를 이동하며 살아온 디아스포라적 경험은 그의 작품에서 반복되는 소재이며 이 중심에는 물리적 공간과 심리적인 기억으로서의 ‘집’이 항상 존재했다. 작가는 건축적 요소를 지닌 집들을 보여주지만 그 공간 안에 유년 시절의 추억과 정서를 복원하려 했고 타 도시에서 이방인으로서 살아가는 복잡다단한 기억을 풀어내기도 했다. 199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그의 초창기 작업을 볼 수 있다는 것도 의미 있지만 그가 예술가로서 이름을 알리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거주했던 공간을 실물 크기로 똑같이 복제한 설치 작업인 만큼 전시의 하이라이트 역시 실제적 구조물로서 집을 형상화한 작품들이다.
MCA의 3층부터 시작되는 전시는 테이트 컬렉션(Tate Collection)으로부터 대여한 작품 〈Staircase-III (2010)〉로 관람객을 압도한다. 천장에서 내려오는 반투명한 붉은색 천으로 만들어진 계단의 형상은 그가 20년간 살았던 뉴욕의 아파트에서 집주인의 공간과 연결되는 좁은 나무 계단을 1:1 크기로 재현한 것이다.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이어주던 계단은 물리적 공간뿐만 아니라 그 안의 삶과 기억을 연결하거나 분리하는 상징적인 도구가 된다. 서도호의 많은 작업이 그러하듯 이 작품 역시 관람객이 직접 작품이 놓인 공간을 걷고, 돌아다니고, 모든 요소를 여러 각도에서 바라 보기를 권한다. 부드러운 천과 바느질로 이루어진 그의 거대한 설치 작업들이 대부분 관람객의 움직임을 필요로 하는 것은 공간을 경험하기 위해 몸을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분홍색, 녹색, 보라색, 주황색 등 부드러운 색조로 터널처럼 이어진 〈Hub(2015-)〉는 성북동과 런던 등 작가가 거주했던 다양한 장소를 마치 하나의 집처럼 연결시켜 놓은 것이다. 관람객은 무한히 확장될 것 만 같은 이 아름다운 색채 구조물 사이로 걸어 들어가면서 한옥 문고리의 아름다움에 매료되거나 보안 잠금장치의 복잡한 구조를 살피며 집에 대해 무의식적인 추억을 떠올릴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의 기억을 재현하지만 그 기억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없고 오직 공간만을 전달할 뿐이다. 오히려 관람객이 이 공간 안에 들어올 때 저마다의 삶의 흔적이 반영된 다채로운 기억을 꺼내 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작가와 관객이 연결되는 지점일지도 모른다.
MCA의 1층에서 초연되는 대규모 신작 〈Rubbing/Loving Project: Seoul Home (2013–2022)〉이 전시를 마무리한다. 2013년, 서도호는 서울에 있는 그의 가족의 집을 재현하는 험난한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작가의 아버지(故 서세옥 화백)가 가꾼 아름다운 정원 안에 위치한 1970년대 한옥 건물의 외부에 수백 장의 뽕나무 종이를 붙여 그 표면을 흑연과 손끝으로 문질러 1:1로 본뜨는 작업이었다. 이 정도 규모로 문지르는 행위에는 막대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며 엄청난 집중력과 끈기, 심지어 집요함까지 수반된다.
작가는 그가 자란 곳이자 그의 아버지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한옥을 재현한 이 작품에 대해 자화상이자 아버지의 초상화이기도 하다고 언급했다. 삶의 시작과 끝을 수용하는 이 9년간의 걸작에는 부인할 수 없는 힘과 웅장함이 있다. 이 매혹적인 작품 앞에서 누군가는 아직도 집을 둘러싸고 있는 푸른 정원을, 누군가는 가족을 감싸고 지켜준 소중한 공간을, 누군가는 작가의 어린 시절 추억을 각자의 방식대로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글 김남은 객원 필자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Museum of Contemporary Art Austral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