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26

카메라를 쥐고 밖으로, 포토그래퍼 표기식 ②

나가는 사람, 발견하는 사람
결, 무른 것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무늬. 사진가 표기식의 시선은 자주 그 무늬에 닿는다. 물이 흘러가다가 바람과 빛을 만나 만드는 무늬라든가, 연한 잎들이 가지에 끈질기게 매달려 출렁이는 모습처럼. 결이란 결국 시간이 쌓여야만 만들어지는 모양일 테니, 표기식이 찍은 사진으로 무언가의 생(生)을 그려보게 되는 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카메라를 쥐고 밖으로, 포토그래퍼 표기식 ①
▼ 1편에서 이어집니다.
서울 ⓒ 표기식
교토 ⓒ 표기식

개인 작업도 꾸준히 해 왔습니다. 서울, 제주 등 도시의 풍경과 나무와 강을 찍었어요. 어쩌면 ‘익숙한 것’을 찍게 된 이유가 있나요?

아마 ‘지금 할 수 있는 걸 하자’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일 거예요. 그러려면 가까이에서 뭘 해야 하죠. 일단 뭔가를 마음먹기까지도 시간이 걸리잖아요. 어디를 가기로 결심하기까지도, 가는 데도 시간이 걸릴 텐데…. 가끔 그런 시간이 그냥 날아가 버리는 것처럼 느껴져요. 빙하나 오로라를 찍기 위해 특별한 장소로 가는 것도 좋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려다 보니 주변에 있는 걸 보게 됐어요.

ⓒ 표기식
ⓒ 표기식

일단 나가면 찍고 싶은 게 생겨요?

미친 듯이 돌아다니진 않아요. 그냥 아까 말했듯 제가 좀 산만하거든요. 산만하니까, 뭘 보다가 아니다 싶으면 다른 데로 가거나 하지 오래 머물지는 않아요. 물론 길게 두고 보는 프로젝트도 있기는 하지만요. 제가 어딘가에 있을 때 뭘 볼 수 있다면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행운이 아무리 흔치 않다고 해도, 나간다면 만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최대한 자주 나가서 행운을 만날 확률을 높이려고 하는 편이죠. 매일 나가진 못하고 할 수 있을 때는 나가는 거예요.

 

할 수 있어도 안 하기를 택하기가 더 쉽죠. 기본적으로 성실한 듯해요.

뭐 그럴 수도 있겠네요. 이왕이면 정말 10원어치라도 건설적인 일을 하고 싶거든요. 지금 나갈지, 넷플릭스를 볼지를 고민한다고 쳐요. 근데 넷플릭스는 나갔다 와서도 볼 수 있잖아요. 해가 떠 있는 풍경을 찍는 건 지금 나가야지만 할 수 있고요. 그럴 땐 지금만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죠. (눈 내리는 창밖을 가리키며) 저기 눈 오잖아요? 그러면 저는 지금 밖이어야 하는 거죠. (웃음)

3. 나무와 강

나무가서있다. 자라는나무가서있다. ⓒ 표기식

2013년부터 2014년까지 이어온 ‘나무가서있다. 자라는나무가서있다.’ 작업에선 시간의 힘을 느껴요. 같은 곳에 선 나무를 날마다 찍은 거죠?

한강에 자주 산책하는 코스가 있어요. 어느 날 그 코스 한편의 벤치에 앉아 있는데 나무 한 그루가 딱 보였어요. 그래서 한 장 찍었어요. 며칠 뒤 문득 내가 또 거기 앉아 있는 거예요. 여기로 와야겠다고 마음먹고 나오지는 않았는데, 그 장소가 제가 좋아하는 조건을 다 갖췄거든요. 사람이 없는 곳, 그렇지만 갈 수 있는 곳이었죠. 그날도 또 한 장 찍었고요. 긴 호흡으로 작업해 보기로 하고는 수도 없이 가서 찍었어요. 누굴 만날 때마다 “나 이런 작업 시작했다” 얘기하고 그랬어요.

 

 

어쩌다 긴 호흡의 작업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저 이 나무의 일 년을 기록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저한테는 그 작업이 공부였더라고요. 해와 빛 위치를 공부하고, 바람이 언제 어떻게 부는지 알게 되고…. 시간대별로 달라지는 풍경을 배우기도 하고요. 그 나무 아직 있어요. 지금 가보면 엄청나게 자랐어요. 몸집이 두꺼워지고 키도 커지고. 나무 작업은 일 년 가지고는 어림없는 것 같아요. (웃음)

ⓒ 표기식
ⓒ 표기식
ⓒ 표기식

한강을 찍은 시리즈가 또 멋지죠. 물과 윤슬을 언제부터 찍었나요.

2013년쯤인 것 같아요. 서울에서는 거의 집, 스튜디오, 한강. 이 세 장소에만 머무르거든요. 10년 전 겨울 한강엔 아무도 없었어요. 조용해서 정말 좋았죠. 스튜디오와 집을 오가는 길에 한강을 지났는데, 윤슬이 계속 보이더라고요. 그걸 보다 보니 저 빛을 찍어서 갖고 싶어지더군요. 왜 저걸 이토록 홀린 듯이 보고 있는 건지 스스로 궁금했는데, 몇 년 뒤 우연히 라디오에서 나온 레드벨벳의 노래 ‘피카부’를 듣고 퍼뜩 납득이 됐어요. ‘새것만 좋아해요. 반짝거리죠. 다들 그렇잖아요, 맞죠?’ 그 노랫말을 듣고 그래, 다들 그런 거구나 싶더군요.

ⓒ 표기식
ⓒ 표기식

사진가님의 한강 시리즈를 보면서 물결과 윤슬이 얼마나 다채로운지 새삼 알아요.

이 물은 이래서 좋고 저 물은 저래서 좋아서 고르기도 힘들어요. 어쨌든 다시는 못 만나는 장면이기도 하고요. 물의 결은 계속 달라지고 색깔도 바뀌어요. 사실 물의 면에 반사된 하늘과 그 주변 풍경의 색이라고 해야 더 정확하겠죠. 그런데 잘 보면 물색도 좀 바뀌어요. 여름에는 비가 많이 내리니까 흙탕물 때문에 좀 노란빛이 돌죠. 겨울엔 더 깨끗하고요. 다 가라앉으니까.

대전 옛 충남도청사 for 코리아. 에디터 이경진|이미지 출처: 표기식 인스타그램 @pyokisik

후반 작업에도 공을 많이 들여요?

아뇨, 지금은 작업물이 너무 많아서 할 수가 없는 단계예요. 한편으로는 해서 뭐 하나 싶은 맘도 들고요. 어쨌든 찍을 때 끝났는데, 이걸 한다고 해서 이 사진이 더 매력적으로 되느냐 생각해 보면 본질은 그게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 앞으로 또 찍을 거니까요. 지금 찍는 사진이 마지막이라면 좀 더 정제된 무언가를 남기려고 뭘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도 공부하고 있고, 또 찍고, 또 찍을 거니까. 어쨌든 재현할 수 없는, 돌아오지 않는 순간이 중요하죠.

일본의 아라시 산 ⓒ 표기식

그러면 어떤 순간, 어떤 장면에 특히 눈이 가요? ‘저건 내가 찍고 싶다’ 하는 생각이 드는 장면이 있어요?

있어요. 좀 수상한 기분이 드는…. 예를 들어 메타세쿼이아 숲에 플라타너스가 딱 한 그루 있다든가, 숲을 멀리서 봤더니 가운데가 뻥 뚫려 있다든가. 이런 거 좀 수상하잖아요?

 

 

그 수상함이라는 것도 모두가 느끼지는 않죠. 그걸 진짜로 알아채는 사람이 또 있다고 생각해요. 무덤덤하게 지나칠 수도 있는 풍경을, 사진가님은 또 달리 보는 사람일지도요.

모르겠네, 그냥 제가 그런 풍경을 좀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런 것만 자꾸 보이는데 어떡하지. (웃음)

4. 프레임을 들여다보면

ⓒ 표기식

계속 혼자서 일해 왔잖아요. 사진을 비롯한 이미지의 유행은 정신없이 빠르게 바뀌고요. 가끔 불안이 찾아오지는 않아요?

왜 없겠어요. 다만 나는 불안한 채로 가만히 있는 사람이 아니라, 가만히 있지 않는, 산만함을 가진 나이지 않을까요? (웃음) 불안하다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으면 바뀌는 게 없잖아요. 프레임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싹 날아가니까, 나가자 싶죠. 지금 시간 있지, 촬영 나갈 상황 되지, 그러면 나가자. ‘나가서 아무것도 못 건져도 괜찮지만, 이왕이면 한두 장은 건지면 좋겠지’ 하는 마음으로 나가면 그만큼은 건지더라고요.

밤 for 요기레터 31호. 에디터 박찬용|이미지 출처: 표기식 인스타그램 @pyokisik

그렇게 개인적으로 촬영할 때는 이것저것 떠올리지 않고 자유롭나요?

겨를이 없어요. 내가 좋아하는 게 지금은 여기 있지만 잠깐 뒤에는 또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찍는 것만 생각하죠. 생각은 나중에 사진 데이터 정리하면서 해요. 마음에 안 드는 사진까지 안 지우고 다 가지고 있어요.

 

왜요?

반성하려고요. 사진들을 자주 들여다봐요. ‘이거 왜 이렇게 찍었지?’ 생각하기도 하고요. 근데 당시엔 분명히 별로였는데 지금 봤더니 괜찮은 게 있어요. 그 사이에 제가 달라진 거겠죠. 월별, 날짜별로 정리해 두고 쭉 보다 보면 내 관심사가 어떻게 달라져 왔는지 보여요. 이런 날씨에는 내가 어떻게 찍었더라? 확인해 보기도 하고요. 내가 만들어낼 수 있는 변화를 찾으려고 볼 때도 있어요. ‘이 중에 없는 걸 찍어야지’ 생각하면서 보죠.

ⓒ 표기식

앞으로 바라는 일이 있어요?

지금 스튜디오가 네 번째 스튜디오인데 여기 좀 오래 있고 싶어요. 그러려면 일을 또 많이 해야 하겠죠. 어시스턴트 행진이가 잘 되기를 바라고 있고요. 사수의 마음으로.

 

먼 미래를 그려보기도 하나요.

요즘은 넥스트를 자주 생각해요. 오래 찍었던 고양이 사진도 이렇게 책으로 엮였고, 작년에 전시도 한 번 했고요. 한강을 찍는 일도 쉽게 말하자면 제 딴에는 재미가 좀 없어졌거든요. 오랫동안 너무나 많은 상황을 보고 찍고 하다 보니 요즘엔 찍고 나서도 ‘어, 이거 비슷한 거 이미 찍었는데’ 싶은 거죠. 더 좋은 걸 찾기 위해서 계속 아카이빙해 나가야 할지, 또 다른 뭔가를 쌓기 시작해야 할지, 어떤 변화를 주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어요.

김유영 기자

자료 제공 표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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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영
에디터. 이야기를 듣고 기사를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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