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하 작가는 저마다의 질감과 색감을 지닌 기하학적 도상 층들을 쌓고 포갠다. 색들은 서로를 투과하거나 전혀 다른 색면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작품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시점이 모이는 곳이 있다. 비현실적이지만 익숙한 체험을 하게 하는 점이다. 마치 깊지만 평평한 바다에 있는 소실점같이 다가온다. 시선을 조금 돌려 보면, 작은 사각형들과 별 장식들도 보인다. 이들은 작품을 추정하는 데 도움을 주는 단서가 되기도 하고 일종의 기호가 되기도 한다. 장식이 되는 사각형들이나 별들을 제외한 면들은 재현 불가능한 것들을 한 화면에 담아보자 하는 작가의 행위이다. 행위가 모여 흔적이 되고, 흔적이 모여 입체적인 면이 된다. 면은 움직임과 시점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며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 낸다.
빛이라는 소재로 회화 작업을 해오고 있는 박민하 작가는 이전까지 빛이 남긴 잔상을 정신적인 풍경으로 구현해 왔다. 이를테면, 빛이 피부나 점막에 닿으면서 생겨나는 형상 혹은 그을림을 포착하거나, 날씨와 감정이 얽힌 장면을 회화로 기록하는 데 집중했다. 반면 이번 전시는 자연적인 빛보다는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발산하는 빛, 네온사인, LED 등 인공적인 빛에 특히 주목한 결과물이다. “이제까지 빛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작업을 해오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운전을 하며 마주하는 풍경에 집중했어요. 특히 터널을 통과할 때의 감정이요. 어린아이들이 터널을 지나가면서 ‘숨 참기 놀이’ 많이 하잖아요. 왜 우리는 터널에 들어갈 때 두려움과 불안을, 터널을 통과하고 난 뒤에는 쾌감 같은 일련의 감정을 느끼는지 빛이라는 소재와 묶어서 생각해 보았어요.”
과거와 예측된 미래의 연결과 공존
밝음과 어둠이 교차하는 곳, 외부와 내부가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곳, 터널. 밝음과 어둠에 민감한 우리는 터널을 통과할 때 크게 두 가지 경험을 하게 된다. 터널 진입과 동시에 어둠에 순응하기. 출구라는 한 점을 향해 가면서 또 다른 빛에 순응하기.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이게 되고, 보였던 것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경험이다. 그 사이에 무수히 많은 빛과 어둠이 형체를 바꾸며 스쳐가고, 우리의 시각 세포도 감도를 지속적으로 조절하며 중심을 잡아간다. 터널에서 경험하는 시간은 어떨까? 터널 체험을 시간 단위로 쪼개 보자. 터널 진입과 동시에 찰나는 과거로, 터널을 빠져나오며 현재는 예측된 미래로 나아간다. 터널이라는 장소는 지나온 과거와 예측된 미래가 공존하는 곳이다.
터널의 통과 이미지는 고대 서사의 소재인 ‘노스토스’를 연상시킨다. ‘긴 여행 끝의 귀가’라는 뜻의 노스토스는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 전쟁 및 사건 사고를 겪은 뒤 바다를 통해 집으로 돌아오는 서사적 영웅을 묘사한 용어다. 고대 사회에서는 전쟁 뒤에 무사히 귀환한 사람들을 신화화하고 위대하게 여겼다. 작가의 작품 ‘Nostos’는 현대 사회에서 과업 혹은 일과를 마치고 난 뒤 밤이나 새벽을 맞이하는 도시인들의 모습과 중첩된다. “이 작품은 일을 마치고 귀가했을 때 무언가를 이룬 듯한 감정 상태를 드러내 보이고 싶어서 시작한 작업입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밤 길을 표현한 거죠.”
다양한 시간에 반사된 빛을 한 화면에 포획하기
박민하 작가는 물감 층을 쌓는 것이 과거와 예측된 미래를 잘 보여줄 수 있는 수단이라고 본다. 그는 작업 재료도 직접 만들어 사용하는데, 작가가 포착한 아름답지도, 밝지도 않은 애매한 빛에 부합하는 물질 재료를 시중에서 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는 작품을 바라보는 각도와 시점에 따라 달라지는 빛을 구현하고자 한다. “작업에 활용되는 재료의 90%를 직접 만들어 쓰고 있어요. 광택이 있는 미라발(MIRAVAL) 페인트나 스프레이 페인트, 자동차를 도색할 때 사용하는 안료 등을 같이 써요.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색을 쓰다 보니 안료를 왁스나 기름 등에 섞어 물감을 직접 제조하게 됐어요.”
이 세상에는 수많은 현상과 물질이 있는데, 그는 왜 빛을 탐구하는가? 또한 빛, 빛의 표현이라는 주제가 동시대에는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 않은가? 이에 대해 작가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제 행위가 현대적이지 않아 보일 수 있어요. 하지만 오히려 역사가 깊은 영역이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괜찮은 주제라고 생각해요.” 그는 터널이라는 주제는 수단일 뿐, 본질은 빛에 있다고 말한다. “정물화를 그리는 분들이 정물보다는 정물에 떨어지는 빛이나 그림자에 주목해 경계를 읽는 연구를 하잖아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제 작업은 움직임에 따라 빛이 보였다가 사라지고, 빛에 의해 색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거나 변하는 일련의 과정과 함께해요.”
빛을 탐구하고, 그것이 어떤 함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연구하는 일. 형체도 없고 가변적인 소재에 대한 연구는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점과 관점을 탐구하는 과정과도 맞닿아 있다. “빛의 테두리는 어디까지인지, 빛과 빛이 만나는 지점의 경계는 어디까지인지 탐구하는 과정이 동시대적이라고 생각해요. 제 행위는 회화 매체의 한계를 실험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관점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풍경의 범주는 어디까지일까? 박민하 작가는 무심코 스치는 장면들과 몸에 닿는 감각까지 확장해 풍경을 인지하고, 무형의 시간과 빛, 색을 관찰한다. 상반되는 대상으로 여겨지는 빛과 어둠이 실은 공존하며 서로를 드러내는 데 일조하는 것처럼, 찰나라는 시간, 불가능성의 가능성, 잡히지 않는 무형의 존재들은 보이지 않지만 세계를 드러내는 데 이바지하는 대상이다. 이들을 감지하고 인지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는 움직임, 통과라는 동적 과정이다. 작가가 포획한 통과의 흔적들을 실물로 마주했을 때 비로소 그 층위를 체감할 수 있다. 전시는 오는 31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