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 탄생 90주년을 기념하며
(왼쪽) 백남준, <시스틴 성당>, 1993, 가변크기, 비디오 프로세서 2대, 프로젝터 34-42대, 비계구조물, 4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울산시립미술관 소장 ⓒ백남준 에스테이트
(오른쪽) 백남준, 거북, 1993, 비디오 설치, 단채널 비디오 3점, 컬러, 무음; 모니터 166대, 재생장치 3대, 철제 구조물, 150×600×1000cm
백남준의 탄생 9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국내외 미술관에서 끊임없이 열리는 중이다. 국내에서는 백남준아트센터에서 한 해 동안 백남준과 그의 예술 세계를 기념하는 축제 <나의 축제는 거칠 것이 없어라>를 진행하고 있다. 앞서 상반기에는 두 개의 회고전 <아방가르드는 당당하다>와 <완벽한 최후의 1초–교향곡 2번>을 진행했고, 지난 7월 20일부터 오는 2023년 1월 24일까지는 백남준의 대형 미디어 설치 작품을 주목한 전시 <바로크 백남준>을 선보이는 중이다. 1993년 백남준에게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안겨 준 작품 ‘시스틴 성당'(1993)을 직접 마주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아울러 해당 작품은 미디어 아트 중심의 미술관을 표방하는 울산시립미술관 소장품으로 이외에도 지난 7월 28일부터 9월 23일까지 선보인 전시 <백남준 탄생 90주년 특별기획전: 땅의 아바타, 거북>에서는 백남준 작가의 ‘거북'(1993)도 선보인 바 있다.
한편,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기념해 제작한 ‘다다익선'(1988)을 복원하여 재가동했다. 1,003대의 브라운관(CRT) 모니터를 활용한 18.5m 높이의 대형 작품은 1988년 10월 3일 제작된 이후 지난 30년 간 보존과 복원을 반복해 왔다. 백남준의 ‘다다익선’은 비디오 아트의 고질적인 난제를 대표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기술은 시간이 흐를수록 발전한다. 초기 작품 제작에 활용한 제품과 부품은 시간이 지나면 그 형태가 낡고 성능은 낙후되기 마련이다. 8, 90년대 널리 사용되던 브라운관 모니터는 오늘날 더 이상 생산하지 않는다. 결국 2018년 2월 다다익선은 가동을 멈췄다. 지난 3년 간 ‘다다익선’ 재가동을 위해 대대적인 작품 보수 작업을 진행했다. 손상된 모니터를 대체하기 위해 737대의 중고 모니터를 수급했고, 나머지 266대는 모형은 유지하되 그 화면만 평면 디스플레이(LCD)로 교체했다.
조선의 도련님에서 코스모폴리탄으로
코스모폴리탄(cosmoplitan)이라는 말을 들어봤는가? ‘세계주의’, ‘세계주의자’, ‘세계시민주의’라는 뜻으로 세계를 무대로 거주하고 활동하는 이를 일컫는다. 백남준(1932~2006)은 코스모폴리탄이다. 한국에서 태어나, 일본과 독일에서 수학하고, 미국에서 활동한 작가 백남준은 세계를 무대로 활동했다. 오늘날 다양한 문화 배경 속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의 등장과 그들의 활약은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지만, 백남준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20세기 중반만 해도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면 활약한 작가를 찾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32년 서울 종로에서 태어난 백남준은 성인이 된 이후로 도쿄, 홍콩, 뮌헨, 쾰른, 뒤셀도르프, 뉴욕, 마이애미 등 도시를 옮겨 다니며 자신의 예술 세계를 쌓아 왔다.
그가 세계 곳곳에서 작품 활동을 끊이지 않고 이어 갈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의 집안 환경도 큰 영향을 끼쳤다. 백남준의 아버지 백낙승은 우리나라 최초의 재벌 기업으로 불리는 태창방직을 운영했다.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백남준은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 자리한 한옥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약 3천 평 규모를 자랑하는 그의 집은 일대에서 소위 ‘큰 대문 집’이라고 불렸다. 그 또한 당대 조선 최고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불렸을 정도. 백남준은 유복한 집안 환경 덕분에 일찍이 음악과 미술 등 예술을 접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음악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당시 국내에서 보기 힘든 그랜드 피아노가 그의 집에는 있었기 때문이다. 백남준은 큰 누나가 피아노 레슨을 받는 걸 어깨 너머로 구경하며 음악에 대한 관심을 키워 왔다.
피아노 레슨은 누나가 받았지만 오히려 음악 실력이 뛰어난 건 백남준이었다. 그는 경기공립중학교를 재학하며 본격적으로 음악에 심취했다. 당시 음악 교사로 재직 중이던 피아니스트 신재덕과 작곡가 이건우를 만나 백남준은 연주부터 작곡 그리고 성악까지 배우며 음악가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했다. 특히 그가 관심이 있었던 음악은 기존의 클래식과 달랐다. 기존의 ‘도레미파솔라시’로 이어지는 7음계 규칙을 거부했던 아르놀트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의 현대 음악과 그 전위적인 성격을 동경했다. 하지만 갓 성인이 된 백남준의 시대는 혼란스러웠다. 한국 전쟁을 피해 백남준은 일본 도쿄로 건너간다. 바야흐로 코스모폴리탄 백남준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
비록 전쟁에 떠밀려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그의 예술혼은 어느 때 보다 또렷했다. 백남준은 음악을 하고 싶었다. 상과 대학에 진학하길 바란 부친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그가 도쿄 대학교 미학과를 선택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다. 무엇보다 현대 음악은 그에게 여전히 매력적인 영역이었다. 미학과를 다녔지만 백남준은 주로 음악학, 화성학, 작곡을 공부했다. 재학 중에는 클로드 드뷔쉬(Claude Debussy)에 관한 논문을 학교 신문과 잡지에 기고했고, 졸업 논문으로는 아르놀트 쇤베르크 음악을 연구한 이론집 2권과 악보 1권으로 구성한 ‘스터디 오브 쇤베르크(Study of Schöberg)’를 제출했다. 하지만 백남준은 일본에서의 음악 공부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당대 현대 음악의 중심지로 꼽히던 독일로 향했다. 1956년 뮌헨 대학교에서 음악학과 철학 석사 과정을 밟았지만, 그가 상상했던 전위적인 현대 음악을 알아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듬해 백남준은 프라이부르크 대학교로 학교를 옮겼다. 독일 신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 볼프강 포르트너(Wolfgang Fortner)를 사사하기 위해 찾아간 것. 백남준은 자신의 음악을 들려 달라는 그의 요청에 가방에서 도끼를 꺼내 그 자리에 있던 피아노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시도했다. 백남준이 생각하기에 피아노가 부서지는 소리 조차도 음악이었던 것이다. 그의 모든 관심은 온통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현대 음악에 쏠려 있었다. 볼프강 포르트너는 백남준의 음악을 ‘비상한 현상(Extraordinary Phenomenon)’이라고 표현하며, 그에게 전자 음악의 다양한 실험이 일어나던 서부 독일 방송(Westdeutscher Rundfunk Köln)의 전자 음악 스튜디오를 추천했다. 백남준은 이 무렵부터 자신이 생각하는 현대 음악의 틀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1958년은 백남준의 현대 음악이 새로운 예술의 형태로 나아가게 된 해이다. 당시 독일 다름슈타트에서는 현대 음악을 함께 경험하고 논의하는 ‘국제 신음악 여름 강좌’를 매년 개최했는데, 백남준은 이곳에서 자신의 음악과 나아가 예술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친 존 케이지(John Cage)를 만나고 그의 대표작 <4분 33초>(1952)를 접했다. 4분 33초 동안 아무 연주도 하지 않는 무대 위 연주자를 두고 당황스러운 웃음 소리와 헛기침 소리 그리고 불평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소리 등 이 모든 소리를 존 케이지는 음악이라고 말했다. 이는 백남준이 생각해 온 현대 음악의 정의와 형태에도 맞닿아 있었다.
(왼쪽) Nam June Paik sitting on TV Chair. Image courtesy ZADIK © Friederich Rosenstiel.
(오른쪽) Nam June Paik performing Zen for Head at Fluxus Festspiele neuester Musik in Wiesbaden 1962
Photo: Harmut Rekort, Courtesy Kunsthalle Bremen © The Estate of Nam June Paik
존 케이지의 작업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그는 이듬해 뒤셀도르프 갤러리22에서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 테이프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1955)이라는 제목의 콜라주 작업과 퍼포먼스 초연을 선보였다. 베토벤 교향곡 5번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 2번부터 독일 가곡 등 클래식 음악과 수탉 울음 소리, 복권 발표와 뉴스 소리, 비명과 유리 깨지는 소리 등 일상 속 소음을 릴 테이프에 녹음한 소리 콜라주 작업과 함께 그는 무대 위에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재생된 릴 테이프 소리를 배경으로 그는 무대 위에서 피아노를 넘어뜨리고, 밝고, 부수는 등 존 케이지 못지 않은 기이함과 황당한 해프닝을 관객에게 선사했다.
“
영원성의 숭배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질병이다.
The worship of eternity is humankind’s oldest ailment.
백남준, 1965
”
상식을 벗어난 그의 음악과 퍼포먼스는 당시 뒤셀도르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전위 예술 그룹 ‘플럭서스(Fluxus)‘에게도 전해졌다. 당시 ‘미치광이 예술가 집단’이라고 불리던 플럭서스에는 요셉 보이스, 오노 요코, 구보타 시게코, 샬롯 무어먼, 존 케이지 등 전통 예술 개념을 전복하기 위해 기이한 해프닝을 주도한 이들이 속해 있었다. 백남준도 이들과 함께 활동하며 다양한 해프닝을 주도했다. 1960년에 선보인 ‘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연습곡(Performance of Etude for Piano Forte)‘에서는 쇼팽의 에튀드를 연주하던 중 돌연 청중석으로 내려가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잘라버렸고, 1961년에는 자신의 머리를 붓으로 삼아 먹물에 담근 뒤 종이 위에 선을 긋는 퍼포먼스 ‘머리를 위한 선(Zen for Head)‘을 선보였다. 백남준은 플럭서스 그룹 안에서도 독보적인 행보로 주목 받았는데, 그와 그의 예술 세계를 일컬어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라는 별명도 붙었다.
비디오 아트 창시자, 백남준
백남준은 시대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선구안을 지닌 예술가이다. 1950년대 말부터 60년대 중후반까지 그가 퍼포먼스와 해프닝 실험 작업을 선보이는 동안 세상도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그는 일찍이 TV라는 기술 매체에 관심을 지녔는데, 1963년 독일 부퍼탈에서 열린 첫번째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에서 백남준은 13대의 TV를 활용한 작품을 소개했다. 단순히 물체의 형태를 조명한 조각 작업이 아니라 화면 속 이미지가 관객의 움직임과 반응에 따라 변형되는 방식이었는데, 이는 기존의 예술 작품이 ‘작품에서 관객으로’라는 일방적인 소통과 감상의 방향에 반하는 것이었다.
이후로도 백남준은 TV를 활용한 실험적인 작업을 꾸준히 이어갔다. 오디오 신호로 텔러비전 내부 회로를 조작해 예상하지 못한 패턴 이미지를 얻어내는 ‘TV 왕관'(1965)부터 관객이 직접 자석을 움직이며 TV 화면을 왜곡하고 변화시키는 ‘자석 TV'(1965) 그리고 1974년 퍼포먼스와 함께 종교와 기술을 결합한 ‘TV 부처’까지 선보이며 기술을 결합한 예술 작품을 선보였다.
한편, 1964년 뉴욕으로 활동 무대를 옮긴 백남준은 세계 최초의 기록을 여럿 남겼다. 1965년 그는 세계 최초의 휴대용 비디오 카메라인 소니 포타백을 구입했는데, 마침 뉴욕을 방문한 교황 요안 바오르 6세의 카 퍼레이드를 찍어 주변 예술가들 앞에서 상영했다. 약 20여 분 길이의 비디오 작업은 곧 최초의 비디오 아트가 되었다. 일본인 전자 엔지니어 아베 슈아와 함께 제작한 ‘로봇 K-456’은 로봇 기술과 예술을 결합한 최초의 시도였으며, 1974년에는 물리적 거리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난 소통, 즉 오늘날의 인터넷 개념을 적용한 ‘전자 초고속도로(Electornic Super Highway)‘를 소개했다.
백남준의 역작으로 꼽히는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도 기술과 예술의 결합이라는 백남준의 관심으로부터 탄생했다. 인공위성을 통해 뉴욕과 파리를 실시간으로 연결한 생방송은 TV를 통해서 세계 어느 곳에서나 시청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도 KBS를 통해서 생방송으로 그의 작품을 볼 수 있었는데 전 세계적으로 약 2천 5백만 명이 시청한 것으로 추산되었다. 1949년 조지 오웰은 자신의 소설 <1984>를 통해 기술과 통신의 발전으로 빅브라더에 의해 감시 받는 인간의 우울한 미래상을 그렸지만, 백남준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전 세계의 사람들이 쌍방향으로 소통할 수 있는 긍정적인 미래상을 제시한다. “오웰 씨, 당신의 예상은 반은 맞았지만 반은 틀렸어요.”라는 말과 함께.
“
위성으로 강자의 자유를 증대시킨다 함은 곧 약자의 자유를 보호하고
다양한 문화들 사이의 질적 차이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다양한 소프트웨어를 창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백남준, ‘예술과 위성’ (1984)
”
비록 그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지만, 백남준이 남긴 비디오 아트 유산과 그 담론에서 시대를 앞서 간 그의 천재성을 여전히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