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헌주 작가는 장소를 보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함축적으로 담아내 공간을 살리는 그림을 그린다. 그의 작업은 길거리를 무대로 한다. 일상에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소재를 그리고, 거리를 지나치는 사람들이 자신의 그림을 무심히 보고 지나가길 바란다.
Interview with 구헌주 작가
— 미술을 전공하셨는데 캔버스가 아닌 벽화를 택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작가가 되겠다,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방향성보다는 그림을 좋아해서 미대에서 회화를 공부했어요. 학교를 다닐 때 저는 미술보다는 언더그라운드 문화나 서브 컬처에 더 관심 있어 하는 학생이었어요. 대학 3학년 때 학교생활과 당시 제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어요. 분명 그림이 좋아서 미대를 선택했는데 작품 활동에 대한 마음만으로 그림을 시작하기엔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현실이 막막했어요. 그때 제 고민을 음악적 취향과 문화적 취향이 비슷한 선배에게 털어놨어요. 선배는 제게 “당장 네가 가장 재미있어하는 것을 시작해 봐”라고 조언했죠. 당장의 흥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이라는 말에서 그래피티가 떠올랐어요. 그림을 시작하기 전까지 늘 동경만 하던 분야였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용기가 생겼죠. 처음 스프레이를 들고 학교 옥상 벽에 시도한 그림은 흑인 래퍼들의 얼굴들이었어요. 스프레이는 매력이 있는 재료예요. 스프레이로 뿌리는 작업은 붓으로 칠하는 것과 다른 재미가 있더라고요. 손가락으로 압력을 조절하면서 그리는 작업이 재미있어서 시작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게 되었어요.
— 작품이 사진처럼 생생해요. 제작 과정이 궁금합니다.
그림을 그릴 때 저는 ‘닮을 때까지 그린다. 안되면 비슷해질 때까지 그린다.’라고 생각하며 그려요. (웃음) 제 작품의 주재료인 스프레이는 건조가 참 빨라요. 또 물감처럼 색이 섞이지 않아요. 혼색이 되지 않는 것이 장점이자 단점인 재료예요. 별도의 재료를 쓰지 않고 진한 색은 연필 삼아, 연한 색은 지우개 삼아 밑그림을 그려요. 대부분 손가락 힘의 조절로 특정 면을 만들거나 거리 조절로 톤 조절을 해요. 선의 굵기나 분사의 양을 조절해서 선과 면을 반복하고, 여러 번 덮어 그리면서 섬세하게 표현하는 거죠. 대부분 큰 벽면에 그리기 때문에 자세히 바라보면 세필 붓으로 그린 것 같은 섬세함이 있지 않거든요? 하지만 멀리서 보거나 공간이 어우러지면 더 생생하게 느끼는 것 같아요.
— 작가님 작품 중에는 이 장소에 실제로 있으면 어울릴 것 같은 그림들이 참 많습니다. 소재를 어떻게 찾으시나요?
예전에는 ‘잘 그리는 것’이 목적인 그림을 그리다가 문득 공간이 눈에 들어왔어요. 길거리는 열려있는 공간이잖아요. 그래서 장소에 어울리는 것, 그 길을 다니는 누군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이미지를 고민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누군가 내 그림을 보면 ‘그 공간에 무언가와 함께 있다’라고 느껴지게 그려보고 싶었어요 처음에는 그림 속 이미지가 현실로 튀어나온 듯한 느낌의 작품들을 그렸죠. 그러다가 어떤 장면을 넣으면 내 의도가 들어가게 장소를 바꿀 수 있을까까지 이어진 것 같아요.
— 그림을 통해 전달하고픈 메시지를 쉽고 함축적으로 담는 과정에서 많은 고민의 시간이 있으실 것 같아요. 어디에서 영감을 얻어서 작품을 그리시나요?
사고방식과 작업태도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준 것은 음악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음악이 제 학창 시절에 미친 영향이 정말 컸어요. 특정 장르를 선호하긴 했지만, 다양하게 들어왔던 음악이 저의 여러 취향을 확장 시키고, 예술에 대한 관점을 가지게 했던 도구였어요. 음악을 그냥 듣기보다는 깊게 파고들어 분석하며 듣는 것을 좋아했어요 그 습관들이 정치, 사회, 문화 등 잡다한 정보들로 이어졌죠. 경험으로 채워진 정보들이나, 관심분야를 깊게 이해하기 위해 찾게 되는 정보들은 머릿속 어딘가 담겨 있어요. 그러다 작업을 할 때 이번에는 어떤 카테고리를 써볼까 하고 소재를 골라서 대입을 해보는 과정을 거치는 거죠. 저 또한 그 과정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한다고 생각해요. 함축적으로 담는 과정은 패러디나 콜라주 같은 방식으로 많이 표현하는 것 같아요. 상투적인 것을 조금 비틀어서 새롭게 볼 수 있게끔 많이 고민했어요. 어떻게 바꿨을 때 이야기를 전환시키면서 의도를 담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는 거죠.
— 여러 지역을 다니시면서 다양한 주제의 그림을 담는 과정이 어려울 수도 있는 데,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주제를 정하시나요?
최근 지역기반의 공공미술 프로젝트나 예술행사가 늘어나면서 제가 작업할 수 있는 기회들이 늘고 있어요. 그래서인지 ‘이것을 그려주세요’라는 의뢰보다는 ‘이 벽에는 뭐가 좋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내가 이곳에서 떠올릴 수 있는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려내는 과정이 작품이 되죠. 내가 바라봤을 때 느낄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소재나 아이디어를 어렵지 않은 방향으로 이끌어내 사람들이 바라봤을 때도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는 주제를 담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길거리와 공간을 이용하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대상이기 때문에 쉽게 접근해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어요. 비교적 다른 스트리트 아티스트들 보다 공공 미술 프로젝트에 자주 참여하면서 관객을 이해하려는 습관이 생긴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 거리에서 그림을 그릴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보는 사람이 덜 불편하게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에 귀여운 동물이나 친근한 사물들을 많이 인용하는 편이에요.
—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던 이 일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2005년부터 17년 동안 이 일을 하고 있어요. 부지런하게 다양한 활동들을 펼칠 때도 있고, 느슨하게 이어온 적도 있어요. 분명한 건 이 일을 좋아하는 거죠. 제가 하는 일에 덕후가 된 것 같아요. 아마도 이 장르에 대한 덕심으로 계속하게 되는 것 아닌가 싶어요.(웃음) 작품을 열심히 만들어 내는 것에만 욕심을 부렸다면 목적한 데로 안되었을 때 절망이나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었겠죠. 이 장르를 바라보는 사람으로서도 매력을 느끼고, 세계적인 작가들을 보며 더 좋은 작품으로 다가가고 싶은 욕심이 생기도 해요. 진짜 좋아하는 일을 하기에 지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구헌주 작가의 작품 세계
— 초기 작품과 다르게, 지금은 어떤 변화가 있으신가요?
처음에는 그래피티 안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왔어요. 그래피티라는 장르 속에서 재료, 기법을 변화시키며 자리 잡고 싶었어요. 문화적 시도도 전형성을 따르며 시도했습니다. 그런 시기가 지나면서 나만의 색 나만의 개성을 더한 스트리트 아트를 고민하게 되었어요. 후기 작품들이 조금 더 작가주의에 가까워요. 이전에는 그래피티 문화로 먼저 융화되는 것 위주로 그 안에서 메시지를 전하고 작품 활동을 했다면, 지금은 스트리트 아트라는 좀 더 넓은, 혹은 다른 범위 안에서 문화적인 시도들을 하고 있는 거죠. 공간성에 관한 고민으로 방향이 전환되면서 그곳을 공유하는 사람들에 어떤 식의 말 걸기를 시도하는 것이 좋을까라는 고민을 하게 된 겁니다. 잘 그림 그림이 아니라 뭘 그릴까, 어떤 것이 나의 방식과 색깔이 드러나는 소통일까라는 고민들로 작품을 만들고 있어요.
— 스트리트 아트는 자유분방함이 매력이기도 하고 사회와 환경 등 여러 문화 운동들을 공론화 시키면서 진화해 간다고 생각해요. 작가님이 특히 관심 있는 분야, 재미있게 느끼는 주제들이 궁금합니다.
사실 저의 표현 방식이나 기법들로 제 생각을 다 담아내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들 때도 있어요. 완성도 중심의 사실적인 표현이 주된 작업이 되다 보니 즉흥적이거나 돌발적인 작업에 갈증이 있기도 해요. 그래서 최근엔 제 방식과 비슷한 벽화 작품들 보다 개념미술이나 설치 미술처럼 보이는, 혹은 추상회화 같은 스트리트 아트에 관심이 더 가고 있어요. 작은 행위 하나로 공간성을 바꿔버린다거나 독특한 감각으로 거리의 시선을 뺏어 버리는 그런 작품들을 유심히 보고 있어요.
— 기억에 남는 일화도 많을 것 같아요.
늘 스프레이로 그리기 작업을 하는데, 가끔 길의 모습을 바꾸거나 설치 위주의 작업을 하기도 해요.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전단지 광고를 붙이는 청테이프를 재료로 활용해 설치미술을 시도한 적이 있어요. 접착성이 다한 테이프를 수거해 붙이면서 메시지를 만들었어요. 전단지는 보통 무언가를 원할 때 배부하잖아요. 여러 상업광고들이 그러하듯 한 개인이 원하는 바를 공적인 공간에 표현한다는 맥락으로 그 구한다는 의미를 작품에 담으면서 청테이프로 ‘일자리 구함’ 글자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밑에 실제 저의 전화번호를 만들어 붙였어요. 설치한 다음날 벽면 건너편에 있는 미용실에서 전화가 온 거예요 “뭘 잘할 수 있으신데요”라고 물어보시더라고요. 제가 만든 이미지에 맞는 상황이 벌어졌는데 정작 제가 당황해서 “저는 벽의 설치작가인데…”라고 구구절절 사연을 설명했죠. 이미지를 남기는 것이 작품의 완성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뒤에 벌어질 일도 예상해서 상황을 구상해놓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재미있는 경험이었어요.
— 외국에서도 작품을 만나 볼 수 있는데요. 영국에서 작업하신 손 모양의 작품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영국 셰필드 7개의 벽에 그려 넣은 작품이에요. 제가 초대받아 갔을 당시 서구 유럽권의 차별 문제가 대두되고 있었는데 그래서 평화와 평등 관련된 주제의 작업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확정적인 계획은 아니고 상황이 된다면 꺼내어 볼 주제로 염두에 두었던 것 같아요. 지역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작업 대상 지역의 공간 중 7개의 벽이 나누어진 곳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곳과 협의하여 작업을 진행하게 되었어요. 7개의 벽에 무엇을 그릴지 고민하다 7글자의 단어로 메시지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했고 저의 표현방식을 녹여내기 위해서 레터링 대신 글자 하나하나의 알파벳 수화(국제수화)로 표현하기로 계획을 잡았어요. 그리고 7글자의 단어와 비교적 구분이 명확해 보이는 수화 모양을 찾으며 존레논의 곡 제목인 Imagine을 표현하기로 결정했어요. Imagine의 가사 내용이 사랑과 평등에 관한 내용이고 그곳은 영국이라 뭔가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을 했어요.
거기에 더해 조금 더 의미를 담기 위해 손들의 색상을 요즘 핸드폰 이모지에서 표현하는 색상을 차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마치 국제 표준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해서 상식의 의미를 담기 좋을 것 같았어요. 이런 아이디어로 양 끝의 손은 기본 이모지 색상인 노랑으로, 그리고 나머지 손색상은 인종에 맞게 저의 외국인 친구들에게 부탁해서 각자의 손 사진을 받아서 표현했어요.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평등에 대한 상식을 의미하는 그림으로 보시면 될 것 같아요.
— 외국에서도 작품 활동을 다양하게 하셨는데요. 우리나라에서 스트리트 아티스트로 사는 건 어떠세요? 사회적인 인식이나 법적 제제 등이 외국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해요.
바깥에서 하는 예술 활동이기 때문에 어느 나라나 제약은 있어요. 저항의 문화라는 성격이 있는 장르기에 활동이 협의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인데 유럽이나 외국은 집회를 하거나 시민운동을 할 때도 다소 과격해 보이는 부분들이 있어요. 그걸 바라보는 시민들의 관점이 수용 적이냐, 비판적이냐 등의 인식의 차이를 느껴요,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이해받는 관점의 차이는 분명 있죠. 스트리트 아트의 경우도 이 예술을 대하는 사람들의 인식과 사회적 분위기가 긍정적 낙천적인 경우 폭발적으로 늘어나요.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은 부분들도 있죠.
— 아무래도 밖에서 하시는 작업이다 보니 날씨의 영향도 많이 받으실 것 같고 작품의 훼손 등도 신경 쓰이실 것 같아요. 그밖에 작업을 할 때 힘드신 점 이야기해주세요.
작품이 손상되는 것은 속상하긴 하지만, 공간의 특성상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있어요. 날씨도 물론 작품 제작에 영향을 줍니다. 그것보다 좀 더 어려운 것은 장소를 터전으로 사는 주민들의 이해를 구할 때인 것 같아요. 또한 최근에는 공공미술 프로젝트 또는 지역 예술행사 등 협의된 안정적인 상황에서 작업을 할 때가 많은데 그런 경우에도 원치 않는 마찰이 생길 때가 있어요. 예술행사를 기획하는 분들은 작가가 그림을 그리기 전에 활동 무대를 만들기 위해 지역민들과 소통을 해요. 기획하는 팀이 지역 상황을 리서치를 하고, 작품이 낯설어서 생기는 여러 문제점들을 대화를 통해 해결하려고 하죠. 하지만 그림을 보러 오고 찾는 사람들의 반응과 그곳을 터전으로 살고 있는 주민들의 반응들이 다를 수 있어요. 그 과정의 해결이 어려워 원하는 이미지를 그리지 못할 때나 혹은 전혀 의도 치 않은 민원적 문제가 생길 때 힘이 부칠 때가 있어요.
— 앞으로 하시고 싶은 작품들이 궁금해요.
저는 지금까지 여러 가지의 것들을 그리다 보면 내 것이 생긴다는 모토를 가지고 여러 작품을 시도하는 편이였던 것 같아요. 늘 다른 그림을 그리고 새로운 주제를 하다 보니까 아이디어를 떠올릴 때 조금 압박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나도 시그니처 작업을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까지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풀어내고 담아낼 때 사람들의 호응과 선호도가 있기 때문에 완성도 중심의 사실적 표현방식을 이어왔는데 닮음에 집착하기 보다 좀 더 재미있는 표현양식을 시도하면서 제 화풍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이와 더불어 최근까지 보여왔던 대형 벽화 형식이나 거창한 프로젝트형 작업이 아닌 소소하지만 보다 능동적인 거리를 탐구하는 작업과 여태껏 머릿속에만 담아 두었던 또 다른 방식의 아이디어를 과감하게 풀어내 보고 싶습니다.
글 이혜진 객원 필자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구헌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