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을 모으는 곳
15년간 어린이집으로 쓰이던 공간을 리모델링한 매장에는 정다운 훈기가 감돈다. 아이들의 키에 맞춘 나직한 나무 계단부터 화장실 타일 벽에 붙은 스티커까지, 곳곳에 어린이집의 흔적이 고스란하다. “차마 뗄 수가 없었어요. 이 자취들이 품고 있는 정서가 브랜드를 이끌어가는 데 영감을 줄 거라고 확신했거든요.”
직접 시공을 도맡은 첫째 이유는 비용 절감이었지만, 그래서 더욱 주인과 닮은 공간이 탄생할 수 있었다. “공간을 설계할 때 하루 종일 이곳에서 일하며 사람들을 맞이하는 상상을 했어요. 손님들도 저도 편안할 수 있길 바라면서 구석구석을 손수 매만졌죠. 사실 다시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웃음) 그래도 힐링 되는 공간임엔 틀림없어요.”
평상시엔 브랜드 작업실로 사용하지만 주 4일은 지속 가능성에 대한 신념을 공유하는 제작자들을 소개하는 편집숍이 되어 문을 활짝 열어 둔다. 남들이 집중하지 않는 자리에 시선을 두는 사람, 선뜻 손을 뻗치기 꺼려지는 곳에 다가서는 사람, 꺼지지 않는 마음으로 빛을 모색하는 사람. 손기쁨 디자이너는 그들의 진심을 그러모으고 고운 체에 거른 뒤 가지런히 늘어놓는다. “제 머릿속은 온통 연결 짓는 일로 가득해요. 사람, 동물, 식물, 모든 것이 이어져 있잖아요. 인과관계를 파악하고 선한 고리로 엮으며 연대로 나아가는 것, 그게 셉틱탱크 스토어의 방향성이지요.”
트렌드보다 가치, 속도보다 방향
하얀 햇살이 비끼는 소박한 가게의 풍경은 얼핏 한가롭지만 실은 분주하게 움직인다. 계단 앞 유리창엔 멸균팩 수거 안내문이 정연하고, 매대 한쪽에선 깨끗하게 소독을 마친 공병들이 새 주인을 기다린다. 매출, 효율과 대척점에 놓인 일들을 끊임없이 벌이는 이유를 물었다. “셉틱탱크가 실제로 지역의 정화조 역할을 하려면 주민분들과 함께하는 활동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희가 감당할 수 있는 작은 움직임들을 실천하고 있어요. 이 모든 건 저를 위한 일이기도 해요. 환경을 위해 갖춰야 할 생산자의 소양을 배우기 위함이 가장 크죠.”
한편, 매장 곳곳에는 적지 않은 책들이 비치되어 있다. 츠타야, 파타고니아, 무인양품, 헨리 드레이퍼스··· 들여다볼수록 고른 맥이 짚인다. “비슷한 책들이 많죠? 제가 추구하는 산업디자인과 라이프스타일에 관련된 것들이 대부분이에요. 삶의 형태와 맞닿아 있고 단단한 가치를 가진 것들이라고 할까요. 우직하게 자신만의 문화를 만들고, 그로써 선한 반향을 일으키는 브랜드들을 동경해요. 셉틱탱크도 그렇게 만들고 싶어요.”
지속 가능한 패션 브랜드, 셉틱탱크
1. 기획: 시즌리스
시즌마다 새 컬렉션을 선보이며 패스트 패션을 부추기는 여타 브랜드와 달리 이곳에선 S/S, F/W 같은 구분이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시즌에 맞춰 제품을 만드는 건 효과적인 방식이지만 그만큼 소모적이에요. 날마다 새로운 제품들이 쏟아져 나오는 세상에서 내가 만든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생각합니다.”
셉틱탱크는 상품 기획에 있어 ‘퀘스트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사회 문제에 대해 자체적으로 퀘스트를 설정한 뒤 가설을 바탕으로 상품을 개발하는 식. 손기쁨 디자이너는 물건이 만들어지고, 사용되고, 버려지기까지의 모든 순간들을 유심히 바라본다. 그리고 이제껏 간과되어온 세미한 지점에 초록 깃발을 꽂곤 대안을 모색한다. “매력적인 제품을 만들어 소비자로 하여금 사회 문제에 대해 인지하게 하는 것, 그리고 해결 과정에 즐겁게 동참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게 제 작업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2. 생산: 제품 수명과 소재
‘What’보다 ‘How’에 대한 고민이 더 깊다는 그가 제품을 만들 때 중점적으로 고려하는 세 가지. 필요한가, 오래 사용할 수 있는가, 재활용이 용이한가. 그중에서도 제품 수명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이유는 이것이 지속 가능성을 위한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임을 알기 때문이다.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의 조건에는 여러가지가 있어요. 트렌드와 상관없어 질리지 않을 것, 특별한 날 평범한 날 언제든 입을 수 있을 것. 소재의 내구성이 좋은지, 관리하기 용이한지 따져보는 것 또한 중요하지요.”
일차적인 고민이 해결되고 나면 재활용성에 대한 고민이 재개된다. 일반적인 의류는 여러 소재가 혼합되어 소각장에서 수명을 다하는 경우가 대다수. 셉틱탱크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70% 이상 생분해가 가능한 단일 소재 사용을 고집한다. 옷을 만들고 남은 자투리 원단으로 라벨을 제작하는 수고로움을 감수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3. 폐기: 회수
셉틱탱크가 특별한 또 하나의 이유, 회수 시스템. 고객이 자사 제품의 폐기를 희망할 시 업사이클링 제품으로 재탄생시켜 환급하는 서비스다. “저의 생산활동이 세상에 쓰레기를 보태는 건 아닐까 하는 염려에서 시작된 아이디어예요. 제가 내보낸 쓰레기를 끝까지 책임지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저희 제품이 고객에게 충분한 가치를 전달한다면 자연히 오래 사용하고 싶을 테고, 그런 가치는 한두 해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걸 어느 순간 깨달았어요. 결국 지속 가능한 상품을 만듦에 있어선 ‘그만한 가치를 지닌 브랜드가 되었나’가 핵심이더라고요.”
셉틱탱크 출범 후 1년이 지난 지금, 손기쁨 디자이너는 보다 완성도 높은 의류를 선보이기 위한 또 하나의 브랜드 ‘마이크로브’를 론칭해 회수 시스템을 보강해가는 중이다. 잘 만든 셔츠 한 벌이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누군가의 옷장을 들락이길 소망하며. 그러다 가방으로 지갑으로 새 쓰임을 얻는 일이 당연해질 미래를 또렷이 상상하며.
단지, 지구 구출 작전의 서막
지구를 구하고 싶다. 어느 인터뷰에서 궁극적인 목표를 묻자 그가 내놓았던 답변이다. 스스럽게 미소 짓다가도 브랜드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단단해지는 눈빛을 보면서 그 답변의 순도를 가늠하기란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 분명한 근거는 그간의 행보에 있다. 세 번의 퀘스트와 그 이상의 협업, 꾸준한 로컬 네트워킹과 브랜드 발굴. 한 사람이 한 해 동안 전개했다고는 믿기지 않는 셉틱탱크의 내력을 보면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부족하더라도 표현해야겠다 마음먹게 된 전환점이 있어요. 어릴 때는 제대로 해낼 수 없다면 시도조차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고, 환경 문제도 그중 하나였죠. 그러다 대학 졸업 후 새아버지께서 공부를 다시 할 수 있게 지원해 주셨어요. 어려운 가정형편에 포기했던 패션에 대한 꿈을 10년은 앞당겨 주신 거나 다름없었죠. 아버지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지금의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셉틱탱크를 준비할 당시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었는데, 그때 하나님을 만나면서 제 삶이 통째로 바뀌었어요. 세상을 돕고 싶은 마음이 어디에서 온 건지, 어딜 향해야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지 이제는 알아요.”
홍제동의 정화조가 탄생한 지 꼭 일 년이 된 지금, 그의 깊은 꿈은 날로 내실을 다져가는 중이다. “지속 가능한 생산 방식은 모두가 채택해야 하는 일이므로 그 자체가 브랜드의 얼굴이 되지는 못할 거예요. 대신 저만의 감성과 솔루션으로 ‘업사이클’, ‘리워크’ 하면 바로 떠오르는 브랜드가 되는 게 목표입니다.” 시작은 환경 문제였으나 앞으로 더욱 폭넓은 사회 문제들에 귀를 기울이겠다 말하는 그의 야무진 손끝에서 또 어떤 세상이 새 숨을 얻게 될까. 색색의 실이 악보처럼 흐르는 손기쁨의 작업실에선 오늘도 드르르, 재봉음이 울려 퍼진다.
— 셉틱탱크의 지향점을 가장 잘 담아낸 아이코닉 아이템을 꼽자면.
마이크로브 셋업. 제가 일주일 내내 입고 싶어서 만든 옷이라 더 의미가 있어요. 다양하게 매치하기 좋고 매일 입어도 질리지 않는, 편하면서도 멋스러운 디자인이죠. 남녀 모두에게 잘 어울리는 핏으로 제작했고, 세탁이 용이한 마와 리오셀을 단일로 사용했습니다. 그야말로 그간 생각해왔던 지속 가능한 생산방식을 모두 담은 제품이에요. 이때 고려했던 요소들이 앞으로의 디자인에도 주축이 될 것입니다.
—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환경친화적 패션 습관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한 번 살 때 오래 입을 옷을 고르는 게 첫 번째인 것 같아요. 또 건조기는 웬만하면 사용하지 않는 게 좋아요. 저는 일부러 에이징시키기 위한 것 외에는 건조기를 쓰지 않아요. 섬유를 마모시켜 옷을 금방 상하게 하는 보풀 제거기 대신 코트 브러쉬를 사용하는 것도 추천드려요.
— 중고 거래 또한 환경을 위한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하셨죠.
아무래도 새 옷보다 이미 많이 나와 있는 빈티지 의류를 사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중고 시장이 지금보다 더 활발해지기를 바라요. 저 같은 경우는 환경을 위한 것도 있지만 참신하고 퀄리티가 좋은 경우가 많아서 빈티지를 좋아하기도 해요. 옷을 만드는 사람이다 보니 공정에 따라 단가가 어느 정도 추가되는지 알잖아요. 정말 제대로 만들었구나, 하는 옷들을 보면서 영감을 받곤 합니다.
— 그중 가장 만족스러웠던 소비는?
일본 디자이너가 만든 다이마루* 절개 스커트. 니트 스커트는 많이 봤는데, 다이마루 소재로 된 건 흔치 않거든요. 정말 자주 입어요. 나중에 티셔츠를 업사이클링할 때 참고하면 좋을 것 같아요.
* 다이마루: 둥근 원통형의 기계에서 짠 직물로, 환편 원단이라고도 한다.
손기쁨 디자이너가 추천하는 지속 가능한 룩북 3
1. 셉틱탱크 리빌드 자켓 + 베이지 맥시 스커트(빈티지)
2. 마이크로브 셋업: 블랙 셔츠 + 마카다미아 팬츠
3. 마이크로브 리오셀 팬츠 + 슬리브리스 + 오버사이즈 셔츠(빈티지)
글 윤이정 객원 필자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셉틱탱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