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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23

순백의 플롯을 엮다, 북아티스트 김유림

탈기호적 표현으로 다가선 마음의 본질
여기 독특한 책들이 있다. 귀퉁이가 뚝 잘려 나간 책, 세양사가 훤히 드러난 책, 표지 없는 책··· 누군가의 마음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들은 책의 형상을 하고 말없이 앉아 있다.
, 120×120cm, Hanji, Mosi, 2020 ©Yoorim Kim

내가 만든 책에는 글이 적혀 있지 않다. (···)

한 번 액자에 들어간 책은 누구에게도 속을 보여주지 않는다.

작업에 들였던 시간과 그렸던 다양한 선들이 한순간으로 압축된다.

오늘 오갔던 수많은 마음 중에 어차피 언어로 남겨진 마음은 한순간일 뿐이니,

흐르는 마음을 책 한 조각에 담은 것으로 충분하다.

작가노트 中, 2017

©Yeejung Yoon

김유림 작가는 학부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회화와 판화로 석박사 과정을 마친 후, ‘북아티스트’라는 명찰을 가슴에 달았다. 언뜻 느닷없어 보이지만 이내 자연스러운 흐름이 읽힌다. 글과 그림은 ‘이야기’라는 하나의 실로 꿰어져 책이라는 세계를 이뤘다. 그리곤 자취를 감췄다. 순백의 골조만이 남은 북오브제, 이 속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 70×70 cm, Hanji, 2021 ©Yoorim Kim

작가는 삶이 던져준 불가해한 자극들 앞에서 반대로 움직이길 선택해왔다. 냉기가 버거울 땐 온기를 찾아 나섰고, 슬픔 가운데 위로하는 법을 배웠다. 백색의 종이와 흑색의 먹, 최소한의 재료로 만든 작품은 연기처럼 조용하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오랜 길을 걸어왔지만 그는 10년째 글자가 없는 책을 엮고 있다. 까다로운 제본 기술을 익히곤 굳이 펼쳐보지 않아도 되는 책을 만드는 까닭은 또 무엇일까?

거센 장마가 지나간 늦여름 오후, 작가의 공방 ‘사사로운 서가’를 찾았다. 그와의 대화에는 알 수 없는 여백이 있었다.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을 초월한 데서 오는 넉넉함 같은 것이었다.

Interview with 김유림 작가

김유림 작가 ©Yeejung Yoon
©Yeejung Yoon
필라델피아에서 온 작두. 주로 두툼한 판지를 자를 때 사용한다. ©Yeejung Yoon

공방이 참 아늑하고 정갈해요.

이 공간에 머문 지 벌써 10년 가까이 되었네요. 예전에는 이곳에서 수업도 하고 동료들과 모임을 갖기도 했는데, 요즘은 개인 작업을 하거나 강의 준비를 하는 용도로 사용 중이에요.

 

 

낯선 기구들이 많네요. 제본 공구는 국내에서 구하기 어렵다고 알고 있어요.

맞아요. 대부분 해외에서 들여왔어요. 이 작두는 동료 작가님과 함께 직접 필라델피아에 가서 구해왔는데, 여러모로 고생 깨나 했어요. 칼날이 있어서 세관 통과하기도 쉽지 않았고, 크기가 워낙 커서 공방에 들여 놓을 땐 창문도 떼어내야 했어요. 그야말로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웃음) 하지만 그만큼 유용하게 쓰고 있으니 다행이죠.

©Yeejung Yoon

여러 전공을 거쳐 지금은 북아티스트로 활동 중이세요. 각 분야간 어떤 접점이 있었던 건가요?

작업을 설명할 때 ‘이야기’라는 키워드를 자주 사용해요. 학부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할 때부터 저의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표현할지 고민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해서 글도 곧잘 썼거든요. 하지만 곧잘 하는 것과 그것을 평생 하는 것은 다르더라고요. 저는 글을 쓸 때 속도가 많이 느려요. 마음 속에 있는 말이 알맞은 단어와 만나 문장을 이루고 글이 되는 과정이 조심스럽고 어렵게 느껴져요. 글을 업으로 삼을 만큼 큰 소질은 없나 보다, 생각했습니다. (웃음) 언어적 표현에 한계를 느낀 후로 다른 표현 방식을 찾기 시작했어요.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설 때마다 시기적절하게 제게 맞는 매체를 만났던 것 같아요. 그렇게 심리의 변화에 따라 회화, 판화, 섬유미술, 북바인딩으로 옮겨왔습니다. 다행히 책 만드는 일은 지난 10년간 이어온 만큼 저에게 잘 맞아요. 여지껏 시도해왔던 다양한 표현법들을 녹여낼 수 있어 좋죠.

〈Moment/Moments〉, 115×115cm, Screenprint, 2011 ©Yoorim Kim

미국에서의 교환학생 시절부터 시각적 표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셨다고요.

영어는 어렸을 때부터 배우기도 했고, 외고를 나오기도 해서 낯선 언어라고 느껴본 적은 없었어요. 학부 3학년 때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가게 되었는데, 난생 처음 영어만 사용해야 하는 환경에 놓이니까 그 장벽이 피부로 와닿더라고요. 그때부터 문자를 벗어난 시각 언어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또 전공 이외에 요가나 발레처럼 다채로운 교양 수업이 많았는데, 그때 드로잉 강의를 수강했던 게 결정적인 계기였던 것 같아요. 연필로 글만 쓰다가 그림을 그리니까 너무 자유로운 거예요. 아, 이거 오래 하고 싶다, 생각했던 기억이 나요.

〈They keep on falling, without knowing where to go〉, 40 Books made with cotton, wool, felt, 2012 ©Yoorim Kim

섬유에서 한지로 주재료가 옮겨왔어요.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양모로 작업했을 때는 제 마음이 조금 추웠어요.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 같고···. 그래서 따뜻한 재료를 사용했어요. 마음이 흩어져 있다고 느낄 땐 물레로 양모를 꼬아 손수 실을 자았고, 무너져 내릴 땐 책이라는 구조를 만들면서 마음을 추슬렀죠.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유학 생활의 마지막 졸업 작품이에요.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아무래도 미국에 있을 때만큼 다양한 양모를 구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타재료를 찾던 중 우연히 다른 작가님 일을 돕다가 한지를 만났죠. 죽 찢었을 때 드러나는 풍부한 섬유질이 너무나 매력적이었고, 그때부터 이것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어요.

하단부터 차례로 도트펜, 본폴더, 스패출러, 수술용 칼 ©Yeejung Yoon
©Yeejung Yoon

요즘은 한지의 섬유질에서 올과 결을 일일이 고르고, 찢고, 엮어내는 방식으로 작업을 하세요. 작가님의 표현에 따르면, ‘깃털’을 만드는 과정이죠. 어떻게 진행되나요?

우선 도트펜으로 접지선을 그어준 다음, 작은 붓으로 물을 칠해줘요. 그리곤 적셔진 자국을 따라 스패출러나 수술용 칼로 살살 밀어줍니다. 그러면 ‘깃털’처럼 보송한 단면이 드러나요. 건조 과정에서 변형되지 않도록 마른 종이 사이에 끼워서 본폴더로 밀어주며 물기를 훔쳐 마무리합니다.

 

 

이 모든 수고로움은 ‘따뜻함’의 감각을 전달하기 위함이라 하셨죠.

제 스스로가 따뜻함을 구하는 만큼, 그런 재료를 옆에 두고 만지면서 작업하고 있어요. 그게 결과물에도 자연스럽게 묻어나길 바라는 소망은 있습니다. 다만 작가는 자신의 생각을 뚜렷하게 표현해내는 것을 목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무언가를 강하게 주장하고 싶진 않더라고요. 나의 주장이 보는 이에게 피로감을 주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에 늘 비우고 덜어 내려 합니다. 감(感)의 과정을 거친 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것을 따뜻한 재료로 나타내려 하고 있어요.

 

색상 사용을 제한하시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 인가요? 

마찬가지로 뭔가를 주장하고 싶지 않다는 바람에서 흰색을 주로 썼어요. 또 글을 쓸 때 기본으로 사용하는 흰 종이와 검은 먹만으로 작업하는 게 스스로 편안하기도 하고요. 가끔 화려한 작품들과 함께 놓인 제 작업물을 보면 너무 조용한가 싶기도 해요. 그래서 이런저런 시도를 하다가도 결국은 모노톤으로 돌아오더라고요. 흑과 백만으로도 훌륭한 작업을 하시는 선배 작가님들을 보며 저 또한 언젠가는 그런 깊이에 다다를 수 있길 바라곤 합니다.

, 120×120cm, Hanji, Mosi, 2020 ©Yoorim Kim
자주 활용하는 기법, ‘헤링본 스티치’ ©Yeejung Yoon

2020년작 ‘언어의 발굴’에 대해서도 이야기 나누고 싶어요. 어디서도 보지 못한 형태의 책들을 발굴 현장의 유물처럼 나열한 작품이었죠.

책을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서 그날그날의 심리상태를 표현하고 싶었어요. 일기나 수필처럼요. 저는 개인적인 글을 쓰는 행위가 발굴과도 같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 감정의 말을 캐낸다는 점에서요.

 

이처럼 전통 제본 기술을 응용한 작업도 상당수예요. 다양한 제본 방식 중 주제에 어울리는 기법을 채택하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제가 하는 북오브제 작업에는 여느 책들과 같이 페이지가 있고, 그것을 엮어주는 실이 있어요. 북오브제 한 권이 마음의 한 조각이고, 페이지는 더 작은 단위의 파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저는 주로 서양식 제본 방식을 활용하는데, 작품마다 어떤 마음의 상태를 그리고자 했는지에 따라 기법을 선택합니다. 결국 그 파편들을 안전하게 엮는 것이 목적이고요.

〈They keep on falling, without knowing where to go〉, 40 Books made with cotton, wool, felt, 2012 ©Yoorim Kim

제작이 끝난 후에야 작품에 제목을 붙이시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어요. 작품 활동이 스스로도 명확히 이름 붙이지 못한 마음들을 알아차리는 치유적 과정일 수 있겠군요.

맞습니다. 완성하고 보면 ‘마음의 무엇무엇’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아요.

 

이러한 관점에서 완성 후 가장 큰 카타르시스를 느꼈던 작업은 무엇이었나요?

아무래도 제일 간절한 마음으로 만들었던 펠트 작업, 〈They keep on falling, without knowing where to go〉라 할 수 있겠네요. 이 작품은 개인적인 트라우마에서 비롯되었어요. 말할 수 없는 내밀한 이야기들이 누구에게도 전달되지 못한 채 떨어져 내리는 형상이죠. 직접 짠 실로 만들어서 자세히 보면 엉성한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요, 그래서 더 제 마음 속 음성과 닮아 있어요.

, 88×13cm, Ink on Hanji, 2020 ©Yoorim Kim
©Yeejung Yoon

초기 작품과 근래 작품의 제목을 비교해 보면, 작가님의 마음 속 모호함이 걷히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어요. 10년간의 변화를 되돌아본다면.

펠트 작업 이후 딱 10년이 지났네요. 그때는 산산조각이 났었다면 지금은 그 조각들을 모아서 손에 쥐고 있는 것 같아요. 무얼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그냥 해야 해서’, ‘안 하면 안 되니까’ 했던 시기를 지나, 이제는 그때 왜 그런 작업을 했는지 이해가 돼요.

 

 

앞으로의 작업을 통해 어떤 마음에 도달하고자 하시는지.

제 작업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평안에 이르렀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해왔어요. 그러려면 제가 먼저 편안해져야 하겠죠. 온화한 마음이 묻어나는 사람, 작가가 될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윤이정 객원 필자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김유림 작가, 사사로운 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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