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21

70년대 잡지사에 모인 100여 개의 이야기

플레이리스트 뮤직 바 ‘페이지스’
하루가 저물고 저녁이 깊어지면, 음악은 우리를 슬쩍 다른 세상으로 데려간다. 낮 동안 내가 귀를 기울였던 음악들이 이 공간에서는 반대로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다양한 빛깔과 맛으로 무장한 와인과 따뜻한 음식, 그리고 누군가의 플레이리스트가 자유롭게 흘러나오는 이 공간의 이름은 ‘페이지스(page(s))’,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만의 이야기를 음악으로 적고 들을 수 있는 ‘플레이리스트 뮤직 바’이다.
* 이 기사는 page(s) 플레이리스트의 0번, 욱사장만의 히든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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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s on your playlist?”

공간에 들어가기 전, 우리는 흥미로운 질문에 마주한다. 마침 귀에 꼽고 있던 아이팟을 뽑고, 재생 중이던 음악 목록을 뒤적여 본다. 다양한 장르가 얽힌 음악의 늪 속에서 나의 하루를 이야기해 줄 수 있는 곡들을 고르라면, 어떤 특별한 곡들을 다정하게 건져 올릴 것인가. 오늘 밤, 나만의 소울 앤 그루브를 마주하는 시간이 어김없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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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일, 서울 성수동 대림창고 맞은편에 새롭게 들어선 페이지스는 ‘음악을 너무 좋아하는 30대 직장인’이자 ‘플레이리스트 컬렉터’인 욱사장이 만든 아늑한 아지트이다. 낮에는 회사에 나가고 밤에는 이곳에서 갖가지 사연이 담긴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한다. 부모님과 함께해 더욱 정겨운 이 공간의 부엌에서는 가볍게 즐기기 좋은 이탈리안 음식의 향이 스몰스몰 피어오르고, 욱사장의 취향이 담긴 내추럴 와인들이 벽면을 빙 두르고 있다.

“와인에도 여러 가지 맛이 있어요. 산도가 강조되는 맛, 짠맛이 감도는 맛, 미네랄리티가 있는 맛… 자유분방한 맛과 매력을 가진 와인이어야 이 공간에 모인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플레이리스트와 어울리지 않겠어요?” 그는 그 와인들을 전부 마셔본 뒤, 지금껏 컬렉팅해 온 방대한 양의 플레이리스트를 뒤적이며 특별하고도 사적인 페어링을 완성했다.

페이지스를 오픈하기 위해 총 100개의 플레이리스트를 모았다. 1번부터 50번까지는 직접 쓰고 만든 플레이리스트로 구성되어 있으며, 51번부터 100번까지는 주변 지인과 친구들의 이야기를 수집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사연 받듯이 모집한 100개의 플레이리스트는 단편 소설의 도입부를 보는 듯한 서정적이고 풍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페이지스에서 누릴 수 있는 더 특별한 경험은 나만의 플레이리스트를 직접 만들어 볼 수 있다는 것! 자신만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채워나갈 플레이리스트 에디터로 거듭날 준비가 되었다면, 슬쩍 페이지를 넘겨보자.

Interview with 이근욱

페이지스 대표이자 플레이리스트 컬렉터

1

첫 번째 Page(s)

페이지스의 시작

“음악은 언제나 빠지지 않았던 것 같아요”

페이지를 넘기면 총 100가지의 플레이리스트와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page(s)

페이지스(page(s))에 되게 여러 가지 뜻이 담겨 있을 것 같아요.

플레이리스트는 각자의 음악 ‘이야기’예요. ‘이 이야기들이 모이면 어디에 담으면 좋을까’하고 생각하다 매거진을 떠올렸어요. 음악과 비주얼을 비롯한 콘텐츠가 담긴 매거진이 있고, 그 페이지 하나하나가 각자의 플레이리스트인 거죠. 또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와 플레이리스트가 모이는 모습을 상징하기 위해 괄호로 ‘s’를 강조했어요. 나중에 ‘s’ 대신 괄호 안에 다양한 단어들을 넣어 ‘페이지스의 OO’이라는 의미를 전달할 수도 있고요.

줄곧 자신만의 공간을 열고 싶다는 열망을 갖고 계셨던 건가요?

아뇨, 공간을 열고 싶다고 생각한 건 2년 정도 되었어요. 그전에도 제 브랜드를 운영해 보고 싶어 꾸준히 사이드 프로젝트를 했었는데요. 오프라인 공간에 도전하게 된 것은 음악 콘텐츠를 다루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음악이 아니었다면 비교적 작은 브랜드가 도전하기 용이한 온라인 비즈니스를 시도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하지만 음악을 함께 듣고 공감하는 경험은 꼭 오프라인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음악은 무엇보다 현장감을 배제할 수 없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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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감상하는 다양한 공간 중에서도 ‘바’를 오픈했어요. 이전부터 ‘#술과작업’이라는 태그로 일상을 포스팅한 적도 있던데, 술에도 관심이 굉장하신 듯한데요?

사실 ‘#술과작업’은 이전에 준비하던 다른 프로젝트의 콘셉트인데요. 간단히 말씀드리면, 직장인들이 퇴근 후에 술을 마시며 사이드 프로젝트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제가 늘 그런 생활을 하고 있었거든요. 나만의 프로젝트를 해 보고 싶어 퇴근하고서 항상 노트북을 들고 카페에 갔는데, 카페는 너무 일찍 닫더라고요. 그렇다고 매일 24시간 카페를 가기에는 똑같은 공간에서는 영감이 떠오를 것 같지 않고요. 그래서 바에 갔더니, 저 혼자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는 거예요(웃음)! 자리도 불편해서 오래 있을 수 없고요. 그렇게 기획했던 아이디어로 유튜브를 비롯해 여러 시도를 해 봤는데, 제가 본질적으로 좋아하는 건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이루고 싶은 결과물로 가는 과정 중의 하나 정도였던 것 같고, 결국 하고 싶은 건 음악이구나 싶었죠. 그러고 보면 ‘#술과작업’에서도 언제나 음악은 절대 빠지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렇게 좋아하는 음악을 활용해 공간을 만드는 과정에서 로망과 현실 사이의 씨름도 종종 벌였겠어요.

새로운 콘셉트로 소통하고 싶어 기존에 없던 양상들을 만들려다 보니 기획의 단계를 다지는 게 무척 힘들었어요. 사람들은 자신이 진짜로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먼저 보여주지 않잖아요. 니즈는 그 속에 분명히 있지만요. 그래서 다양한 뮤직 바에 다녀 보면서 ‘플레이리스트 뮤직 바’라는 아이디어를 다지고, 주변 사람들에게 피드백을 받아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구축된 부분이 없다 보니, 일단 설명이 길어지고 콘셉트를 이해시키는 게 어렵더라고요. 지금이야 ‘플레이리스트 뮤직 바’라고 말하지만, 그땐 아는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이게 정말 될까’ 고민하면서, 자신감이나 동기를 계속 유지하는 게 어려웠어요. 결론은 ‘새로운 걸 하려고 하니까 실제로 실행하는 데 있어서 굉장히 어려움이 많았다’는 얘기예요.

2

두 번째 Page(s)

70년대 잡지사에 흐르는 음악

누구나 에디터가 되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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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스는 각자 자신만의 이야기를 녹여낸 플레이리스트를 수집하고 편집해 하나의 매거진을 만드는 바(bar)… 아니, 사무실이다. 키치하고 빈티지한 색감으로 무장한 공간은 마치 상상 속 70년대 잡지사를 연상시킨다. “잡지를 만드는 공간이면 결국 잡지사잖아요? 페이지스에 방문하는 분들은 공간을 즐기러 온 사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만의 콘텐츠를 뽑아내는 사람이기도 해요. 말하자면 잡지사의 직원인 셈이죠. 그분들을 에디터로 만들어 주고 싶었어요.”

두 개의 화면에 플레이리스트가 재생되며 띄워진다. ©page(s)

그 열망을 상징적으로 풀어 놓은 공간이 바로 샛노란 빛깔의 에디터 데스크이다. 오렌지색 JBL 스피커로 무장한 데스크 위에는 장난감 같은 타자기와 조명, 펜, 자, 컵 등이 두서없이 놓여 있고 한쪽엔 근사한 음향기기가 자리하고 있다. 책장에는 취향이 엿보이는 음악 CD와 수집품, 문진 등이 늘어서 있다. 데스크 뒤의 벽면에는 두 개의 모니터가 있는데, 에디터가 꾸린 플레이리스트의 제목과 목록이 입력되는 순간 감각적인 이미지와 함께 띄워진다. 누군가의 플레이리스트가 흘러나오는 순간, 이 데스크는 바로 그 사람만의 특별하고 사적인 ‘에디터 데스크’로 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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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에서 존재감이 중요한 가구라고 한다면, 단연코 술과 음식을 즐길 수 있는 테이블이 아닐까. 실제로 손님들이 직접 플레이리스트를 작성하고 술과 음식을 즐길 수 있는 하얀색 데스크에도 특별한 디자인 포인트가 숨어 있다. 얼핏 보면 네 모서리가 직각으로 반듯한 평범한 정사각형처럼 보이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비스듬해 보이는 것 같기도…?

디자이너 홍석영의 가구. 비스듬한 책상 모서리와 펜트레이의 디테일이 주목할 만하다. | 이미지 출처: 스튜디오 쿼터백 인스타그램 ©Son Mihyun

“잡지사인 만큼, 정말로 사무실에 있을 법한 테이블을 짜고 싶었어요. 서랍을 어떻게 만들까 고민했는데, 처음에는 앞으로 열까 옆으로 뺄까 하다가 사용 시 불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열고 닫는 서랍 없이 트여있는 책상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주로 밤에 운영되는 공간이다 보니, 책상 상판에 가려 아래 놓여있는 메뉴판이나 펜, 콘텐츠들이 잘 안 보일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홍석영 디자이너님과 고민하다가 ‘상판을 뒤틀면 어떨까?’하는 이야기를 해서, 모서리 부분에 넛지를 주어 자연스럽게 상판 아래가 드러나 보이게 만들었어요. 또 플레이리스트를 작성할 펜을 놓을 수 있는 펜꽂이까지 디자인했죠.”

 

세련되면서도 빈티지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공간의 매력 포인트는 빨갛고 노란 색감이다. 이 독특한 인테리어에는 스튜디오 쿼터백(studio quarterback​)의 노련한 손길이 담겼다. 또한 애정을 듬뿍 담은 공간인 만큼 곳곳에 욱사장의 취향이 돋보이는 사물과 집기들이 눈길을 끈다. 다양한 주제를 다룬 매거진들과 카메라, 공예가의 잔, 모래시계, 성냥, 가죽 가방… 그중에서도 ‘플레이리스트 컬렉터’로서의 취향과 페이지스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가장 특별한 물건은 다름 아닌 빈티지한 감성의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다.

야심 차게 준비했던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 지금은 에디터 데스크의 서재에 가지런히 놓여있다. ©page(s)

“원래는 플레이리스트를 이런 믹스테잎으로 담아 보려 했어요. 음악을 귀로만 경험하는 것이 아쉬워서 다양한 감각으로 음악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곤 했거든요. 그런 경험을 형상화할 수 있는 좋은 물건이 믹스테잎이라고 생각해서, 처음에는 ‘믹스테잎 현상소’라는 콘셉트를 기획했어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많은 분들이 이러한 플레이어를 가지고 있지 않잖아요. 음악은 무엇보다 쉽게 들을 수 있어야 하는데요. 그래서 플레이리스트라는 본질에 집중해, 잡지사로 방향을 바꿨어요. 하지만 언젠가 저에게 영감을 주는 플레이리스트가 나타나면, 선물로 믹스테잎을 만들어 드리려고요!”

3

세 번째 Page(s)

100가지 플레이리스트, 100가지 이야기

나만의 그루브 앤 소울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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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스가 지향하는 무드를 한 단어로 말하면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그루브 앤 소울(Groove & Soul)’…일까요? 진심으로 자신의 영혼을 담아 이야기를 해 주고, 또 그렇게 만든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각자 그루브를 탈 수 있는 공간이면 좋겠어요.”

페이지스에 모인 이들은 술과 분위기에 몸을 맡기며 자신의 속마음을 들여다본다. 뒤죽박죽 엉킨 감정과 기억, 상념들… 어떤 이야기부터 꺼내야 할지 고민스럽다. 하지만 너무 많은 말은 필요 없다. 우리의 말을 대신해 줄 감미로운 음악과 리듬이 있으니까! 페이지스에 모인 플레이리스트에는 어떤 사사로운 이야기들이 존재하고 있을까.

예전부터 플레이리스트를 직접 만들고 즐기는 걸 좋아하셨던 건가요?

맞아요. 이렇게 타이틀과 인트로까지 써 본 적은 많이 없었지만, 가끔 일기를 쓰면서 음악을 곁들이곤 했어요. 워낙 음악을 좋아해서 뭔가 재미있는 비즈니스를 시작하고 싶어졌고요. 그래서 뮤직 바, LP 바 등 음악 콘텐츠를 다루는 공간들을 많이 다녀봤어요. 대부분 무척 좋은 경험이었지만,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그 영역에 일가견이 있는 한 명의 플레이어가 양질의 콘텐츠를 소비자와 소통한다는 굵직한 방식이었는데요. 음악의 경우는 좀 방향이 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음악은 누구나 좋아할 수 있고 각자의 취향이 있잖아요. 또 같은 곡을 듣더라도 그 곡을 듣는 순간의 감정과 생각들은 저마다 다르고요. 사람마다 각자 가지고 있는 다른 감성과 기억들을 이야기화시키면 각자만의 ‘플레이리스트’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잠시만요, (손님분들이 적어 준 플레이리스트 모음을 가져와 보여주며) 이게 지금까지 모인 플레이리스트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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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이렇게나 많이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플레이리스트를 작성할 수 있나요?

(종이 우측 하단에 QR 코드 가이드를 가리키며) 여기에 가이드를 적어두었긴 하지만, ‘유튜브 등에 이미 있는 흔한 플레이리스트와는 다르게 만들어주세요’라는 말씀을 드리고 있어요. 유튜브의 플레이리스트 가운데는 ‘듣는 사람’ 중심인 경우가 많아요. 예를 들면 ‘운동할 때 듣기 좋은 플레이리스트’, ‘작업할 때 듣기 좋은 플레이리스트’ 같은 것이요. 그런데 이 공간에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는 게 훨씬 중요해요. 사사롭고 개인적인 이야기로 느껴질 수 있지만, 오롯이 자신만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드는 경험을 하다 가실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써 주신 것들을 보면, 자신의 사적인 경험이나 이 음악들을 들을 때 했던 생각들을 풍부하게 작성해 주시고 계세요. 또 좋아하는 곡들을 나름대로의 기준에 따라 리스트업해 주시다 보니, 무드도 자연스레 일정한 결로 묶이고요.

일하면서 맞이하는 그대들의 고통스러운 마지막은 잊혀지지 않는 장면 중 하나다. 그대들의 주변 사람에게 물어보면 돌아오는 대답은 “요즘 좀 힘들어했어요…” 하지만 이 짧은 문장으로 그대들이 죽음을 선택하기까지 수 천 번, 수만 번 고민하고 힘들어했던 시간을 어찌 담아낼 수 있을까. 지금 힘들어하는 누군가 이 노래를 듣고 있다면, 진심으로 다시 힘을 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미 떠난 그대들의 명복을 빌어본다.

58번 플레이리스트 <If You Gone>

다른 분들의 플레이리스트 가운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연이 있나요?

58번 플레이리스트요. 지금 경찰로 일하고 있는 학교 후배로부터 받은 건데요. 평소에도 직업과 관련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곤 하는데, 사람이 죽어서 현장에 가야 하는 일도 많다고 해요. 교통사고든 자살이든 어떤 사람의 죽음의 순간에 가장 먼저 달려가서, 가족 구성원과 지인들을 마주하고 위로하는 상황에 맞닥뜨리는 거죠. 이 플레이리스트를 통해 그 순간에 그분들께 전하고 싶었던 위로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고 해요. 전반적으로 잔잔한 분위기지만 마냥 우울하지는 않은 음악들로 이루어져 있어요. 이러한 메시지가 저에게 큰 울림을 주었고, 이외의 다른 분들의 이야기에는 많은 공감이 갔어요. 나랑 비슷한 순간들을 보내는 사람이 굉장히 많구나, 이 사람은 이런 생각도 하는구나…, 이건 내 이야기네? 하고요.

새 하얀색의 마음에 얼마나 많은 검은색의 생채기가 났던 걸까. 그토록 되고 싶지 않았던 무채색과 같은 그들의 모습이 어느샌가 내가 되었다. 그리고 놀라워 다시금 다잡는 마음.

“더 늦지 않게 내가 좋아하는 색을 입혀야지.”

33번 플레이리스트 <채색의 모습으로(Overlap)>

그럼 가장 애정하는 본인의 플레이리스트를 고르자면요?

(50개 목록의 플레이리스트를 한참 뒤적거리며) 33번…? 이 플레이리스트의 경우엔 곡을 먼저 고르고 제목을 나중에 지었어요. 한창 오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많이 겪어서 감정이 많이 무뎌지던 시기였어요. 어느 순간부터 항상 무표정인 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더라고요. 공간을 준비하기 전의 마음을 ‘하얀색’이라고 하면, 점차 마음에 생채기가 나면서 ‘검은색’이 된 거죠. 그래서 무채색인 지금의 내 모습에 조금 더 다양한 색을 입혀 봐야겠다, 다짐하며 이 플레이리스트를 썼던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음악은 전반적으로 약간 어두운 분위기예요. 그 당시엔 그런 마음이었으니까요.

어떤 시기를 음악으로 기록하면 나중에 봤을 때, ‘내가 이때는 이런 마음이었구나’ 기억할 수 있겠네요.

맞아요. 꼭 일기 같아요.

4

마지막 Page(s)

앞으로의 이야기

서로 다른 이야기일지라도 한데 모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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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리스트를 1만 개까지 모아보고 싶어요”, “헉, 1만 개나요?” 듣자마자 탄성을 질렀지만,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한 손에 두툼하게 잡히는 플레이리스트를 보니 금방 또 고개가 끄덕여진다. “사실 1만 개는 상징적인 숫자이고, 궁극적으로는 이 공간이 ‘뮤직 라이브러리’가 되길 바라요. 각자의 플레이리스트가 한데 모인 공간이요”.

페이지스는 미국 브루클린의 한 전시 공간 ‘스케치북 프로젝트’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유명한 작가의 작품을 선보이는 여타 전시와는 달리, 이곳에서는 우선 사람들에게 스케치북을 판매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든 자신만의 그림을 그린 후, 이 공간에 전시해 달라고 말한다. 한 사람의 그림만 덩그러니 걸리면 다소 휑한 공간이 될 테지만, 이 사람 저 사람이 그린 다양한 그림들이 한데 모이면 그 자체만으로 감동과 의미가 탄생한다. “이 공간에 있어서는 그게 플레이리스트인 거죠”. 그러고 보니 마침 페이지스가 위치한 성수동도 서울의 브루클린이라고 불리는 동네 아닌가. 페이지스가 성수동의 스케치북 프로젝트 같은 공간이 되면 좋겠다는 말에, 욱사장이 화색이 되어 반긴다. “맞다, 그렇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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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시작이니까요. 앞으로 이 공간에서 시도해 보고 싶은 것들이 있나요?

너무 많아요. 일단 유튜브에서 플레이리스트를 만들고 계시는 많은 분들과 콜라보를 해 보고 싶어요. 제 공간에서 그분들의 유튜브 채널의 플레이리스트를 틀어드릴 수도 있고요. 또 비즈니스를 하다 보면 음악이 필요한 경우가 자주 생기는데, 다양한 브랜드들에서 ‘우리 공간에 맞는 플레이리스트가 필요해요’라고 찾아주시면, 즐거운 협업을 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음악을 너무 좋아해서, 급기야 음악을 위한 공간을 연 페이지스에게 묻고 싶어요. “좋은 공간이란 어떤 공간인가요?”

공간을 운영하는 이의 취향이 굉장히 잘 묻어 있는 공간, 또 그 취향이 방문하는 이들에게 잘 전달되어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공간이 좋은 공간이 아닐까요? 페이지스는 ‘누구나 각자의 플레이리스트가 있다’고 말합니다. 사실 영화 <비긴 어게인>의 대사인데, 혹시 보셨나요? 얘기가 잘 통하지 않던 두 주인공이 거리를 걷다가 서로 좋아하는 음악들을 들어보면서 이런 말을 해요. “네가 어떤 사람인지는 네 플레이리스트를 들어 보면 알 수 있어”. 이 공간은 결국 그런 이야기가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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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멜로디와 가사를 가진 음악들이 한데 모이면 하나의 근사한 플레이리스트가 완성되듯, 서로 다른 영혼과 그루브를 가진 사람들이 한데 모이면 근사한 이야기로 이루어진 특별한 매거진 한 권이 완성된다. 페이지스는 올여름부터 그 이야기의 서막을 써 내려간다. 술과 음식, 그리고 모두의 음악과 함께.

소원 객원 필자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페이지스

장소
페이지스
주소
서울 성동구 성수이로 75
소원
디자인을 하고 글을 씁니다. 따뜻한 햇살과 아이스 카페라떼를 원동력 삼아 책을 읽고 영감을 얻고 콘텐츠를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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