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17

홍대 앞 12년, 시간 따라 흘러가는 바 ‘디스틸’

세월을 버틴 공간의 힘
해가 저물면 홍대 앞 거리는 부푼다. 젊음, 소리, 빛 모든 것이 한껏 존재감을 드러내는 길은 소란하고 팽팽하다. 이 길에서 살짝 벗어난 골목에 디스틸이 있다.
디스틸 정문. 간판의 로고는 엄경섭 대표가 직접 디자인한 것. 풀어진 채 편안할 수 있는 곳이라는 느낌을 주려고 글자를 기울였다. ⓒ designpress

디스틸(dstill), 이라는 이름이 바(bar)에 붙은 건 놀랍지 않다. 발음이 같은 단어 distill은 ‘증류하다’라는 뜻이므로. 그렇지만 바 디스틸의 이름엔 또 다른 의미도 담겨 있다. ‘We’d still like to be best friends’이라는 문장에서 dstill을 뽑아냈기 때문이다. 증류주를 주로 다루는 한편, 늘 좋은 친구처럼 손님을 맞는 공간인 셈이다. 좋은 친구 같은 바로 남겠다고 다짐한 지 1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2010년 10월 오픈한 디스틸은 바람 잘 날 없는 거리에서도 날마다 심상하게 문을 열고 닫는다. 숨은 듯 고요하게 자리 잡은 디스틸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출입구 쪽 커다란 테이블에서 내부를 바라본 모습. 손석주 바텐더가 선 쪽이 메인 바, 사진에 보이지 않는 맞은편에 작은 바가 또 있다. ⓒ designpress

2개의 바 테이블

내부는 독특한 구조다. 출입문 가까이 커다란 테이블이 하나 놓였고 벽을 바라보는 바가 양쪽으로 하나씩, 총 두 개 있다. 메인이 되는 기다란 바를 등지고 작은 바 좌석이 하나 더 있는 형태다. 바 테이블을 두 개나 둔 이유가 있는지 엄경섭 디스틸 오너 바텐더·대표에게 물었다. “단골 중에 칵테일은 즐기지 않고 위스키만 마시는 분들이 계세요. 그들에게 직접 서브하며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작은 바를 하나 더 만들었습니다.”

메인 바 ⓒ designpress
위스키만 즐기는 손님을 위해 만든 작은 바 ⓒ designpress

가구

독립적인 테이블 여러 개가 아니라 커다란 테이블 하나를 배치한 이유도 명확하다. “공간이 넓지 않아서 2~4인용 테이블을 많이 놓을 수 없기도 하고요. 출근 전이나 점심 먹고 카페에 갈 때와 저녁에 바에 올 때 마음이 비슷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녁에 집 가는 길에 ‘오늘 피곤하니까 한 잔 마시고 가자’ 하며 들를 수 있는 바를 만들고 싶었어요. 편안하게 기대선 채 마시거나 툭 걸터앉을 수 있는 가구를 배치한 거죠.” 실제로 디스틸의 바와 테이블 높이는 낮지 않다. 테이블에 기대고 서서 마시는 사람을 위해서다. 엄 대표는 지친 날 예사롭게 들러 마시고 피울 수 있는 ‘소굴’ 분위기의 바를 만들고 싶었고(디스틸 오픈 당시에는 주점에서의 실내 흡연이 가능했다), 그 생각을 구현하기 위해 인테리어를 손수 매만졌다. 어울리는 소품이나 가구를 찾으려 발품을 파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일례로 커다란 테이블의 다리는 부산의 보세 창고를 뒤져 구해온 것이다.

한쪽 벽을 채운 칠판, 메뉴나 함께 읽고픈 글귀를 써두는 용도다.(좌) 의자 뒤쪽에는 가방 고리가 붙어 있다.(우) ⓒ designpress

나무와 빛

바 상판, 테이블, 바닥에 모두 목재를 쓴 이유도 ‘편안한 바’를 만들고 싶어서다. 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동시에, 액체를 다루는 공간에서 부담 없이 사용할 재료로 나무보다 좋은 소재를 찾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나무 테이블 위로는 할로겐 조명이 다소 어두운 조도로 은은하게 떨어진다. 엄 대표 자신이 형광등 아래에선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었기에 술을 마실 때 빛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았다. “디스틸의 모든 요소는 저 자신이 어떤 걸 좋아하고 편안하게 느끼는지를 기준으로 준비했어요. 사장도 머무르기 힘든 곳에 누가 오겠어요. 조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내가 제일 편안하게 마시는 조도를 떠올렸죠. 작은 램프를 놓아봤다가 치우기도 하고, 조광기를 미세하게 조절하면서 계속 확인하고 더 편히 마실 수 있게 무수히 바꾼 결과가 지금의 조도예요. 시간이 지나면 또 달라지겠죠. 저도 직원들도 손님들도 나이를 먹어가는 만큼 그 변화에 맞춰 아주 조금씩 조금씩 바꿔가고 있으니까요.”

쨍한 빛이 새어 나오는 모니터는 공간 분위기와 어울리는 천으로 덮어 둔다. ⓒ designpress
ⓒ designpress

소리

음악은 주로 재즈를 틀되 날씨나 기분, 사회 분위기에 따라 변주를 준다. 보컬 재즈부터 빅밴드나 스윙 재즈, 인디 음악까지 다양하게 아우르는 것. 개업한 후 줄곧 음악은 LP와 CD로 재생하기를 고집했지만,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LP까지 바꾸느라 애쓰는 바텐더들이 애처로워 2년 전부터는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한다.

바 상판에 놓인 잔(좌), 디스틸 로고 배지(우) ⓒ designpress

잔에 대해 묻자 엄 대표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에요. 글라스웨어(glassware)는 손님이 처음 만나는 사물이니까요.” 바텐더는 음료를 만드는 사람이므로 입과 코로 맛과 향부터 접하지만 손님은 그렇지 않다는 것. “바에 온 손님은 가장 먼저 글라스웨어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요. 마시는 건 그다음이죠. 생김새와 촉감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모든 바의 오너들은 좋은 글라스웨어를 쓰고 싶어 해요. 다만 좋은 것은 비싸고, 비싸면 파손됐을 때 부담도 커지거든요. 손님이 마시다 깨뜨렸는데 큰돈을 청구할 수는 없잖아요.” 바를 운영하는 대표로서의 욕심과 비용 사이 타협점을 찾아야 했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 브랜드 리델(Riedel)의 글라스웨어를 주로 사용하면서, 특정한 느낌을 선사해야 하는 메뉴에는 바카라(Baccarat), 키무라(木村硝子店) 등 브랜드 제품을 적절히 활용한다. “잔을 평가하는 수많은 기준이 있겠지만, 이런 상업 공간에서는 잘 깨지지 않는다는 조건을 꼭 갖춰야 한다고 생각해요. 손님은 물론 바텐더를 위해서도요. 바텐더들이 깨진 잔을 치우다가 자주 다칩니다.”

ⓒ designpress

칵테일을 개발하면 어디에 담을지 한참 고민해요. 보통 새 메뉴에 맞는 새 잔을 구하곤 합니다.

해당 칵테일 시즌이 끝나면 더는 쓰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어느 잔에 담느냐에 따라 음료 뉘앙스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에 아깝지 않습니다.

엄경섭 디스틸 대표

Ι 각별한 잔

ⓒ designpress

1

 

바카라 원피스 에디션

만화 <원피스>를 좋아하는 단골을 위해 일본에서 사 온 잔. 이 잔을 너무 갖고 싶어 하던 그의 모습을 보고 준비했다. 이런 잔은 워낙 잘 깨지고 관리도 어려우니, 디스틸에 와서 이 잔에 편히 마시라 했다고. 이가 살짝 나가는 바람에 더 이상 사용하긴 힘들지만, 손님을 위해 계속 보관하고 있다.

2

 

어머니의 잔

디스틸의 지난 시즌 메뉴 중 ‘흙과 바람과 향신료’라는 칵테일이 있었다. 엄경섭 대표는 전통주를 이용한 이 칵테일을 어디에 따를까 계속 고민하던 중, 어머니 댁에서 식사하다가 이 잔을 발견했다. 40년 넘게 집 찬장 속에 놓였던 잔이 새롭게 태어났다.

ⓒ designpress
디스틸은 2016, 2017 아시아 베스트바 TOP 50에 이름을 올렸다. ⓒ designpress

유형의 사물이 갖춰졌다고 해도, 바를 바이게 하는 것은 바텐더와 그들이 만드는 술이다. 디스틸은 기주(base liquor)의 맛이 살아 있는 칵테일을 추구한다. 마티니, 맨하탄, 올드패션드 등 클래식 칵테일은 물론 창작 칵테일을 만들 때도 술의 뉘앙스가 명확히 드러나는 편을 선호하는 것. “A, B, C라는 재료를 이용해서 칵테일을 만든다고 합시다. 어느 가게는 이 재료로 D라는 맛을 만들어내요. 재료를 섞어 또 다른 맛을 구현하는 거죠. 저는 A, B, C라는 재료로 D + a, b, c라는 맛을 내는 걸 지향해요. A, B, C의 맛이 다 남아 있으되 새롭게 조화되는 칵테일을 좋아합니다.”

엄 대표의 말에서 알 수 있듯 디스틸의 칵테일에는 술의 골격이 확실히 남아 있다. 진이나 보드카 베이스의 칵테일보다 위스키, 코냑을 베이스로 하는 칵테일이 많은 것도 술의 맛을 보다 명확히 전하기 위해서다. 디스틸은 더 부스 브루잉 컴퍼니, 엠비션 브루어리와 협업해 전용 맥주를 개발하기도 했다. 맥주와 위스키를 섞은 ‘보일러 메이커’라는 칵테일이 있는데, 이 칵테일을 만들 때 필요한 맥주를 아예 만들어버린 것. “위스키를 더 벌컥벌컥 마실 수 있게 어울리는 맥주를 만든 거죠.” 디스틸 크루가 얼마나 위스키에 진심인지 가늠할 수 있는 일화다. 실제로 디스틸은 버번위스키를 국내에서 손꼽히게 여럿 갖춘 바 중 한 곳이다.

Ι 디스틸의 칵테일

ⓒ designpress

1. Old Cuban’s Den 올드 큐반스 덴

재료 바카디 8, 페르넷 브랑카, PX 셰리, 차와 카카오닙스를 재운 코디얼, 페이쇼드 비터, 타임

 

술을 따르기 전에 파이프 잎을 태운 연기를 잔에 가둔다. 서브하기 전 잔의 테두리에 레몬 타임(Lemon Thyme)을 문질러 향을 더한다. 럼과 시가의 향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묵직한 칵테일이다.

ⓒ designpress

2. Summer Vacation 썸머 베이케이션

재료 탱커레이 no.10, 수박, 자두 주스, 딜, 오렌지 비터

 

할머니 집 평상에서 수박을 먹던 기억에서 모티프를 얻은 시즌 칵테일. 여름 기억을 담은 칵테일의 맛은 상큼하고 달콤한 수박화채를 닮았다. 이 칵테일은 매미 우는 소리 등 여름 소리가 흘러나오는 라디오와 함께 서브된다.

디스틸 크루. 왼쪽부터 엄경섭 대표, 송연희 바텐더, 이상혁 바텐더, 손석주 바텐더. 김효종 바텐더는 촬영 당일 휴무였다. ⓒ designpress

바텐더

디스틸에는 바가 추구하는 맛을 공유하는 바텐더가 여러 명 있다. 이들은 각자 해석한 방식으로 칵테일을 만들고 서브한다. 엄 대표에게 이들의 칵테일이 각각 어떤 개성을 품는지 물었다. 우선 현재 매니저로 근무 중인 손석주 바텐더. “독특한 재료에 도전하는 정신을 높게 삽니다. 그리고 그가 만드는 칵테일에는 뭐랄까, 미학적인 느낌이 있어요. 간결한 선이 은근히 숨어 있다고 해야 할까요? 미묘한 맛이나 뉘앙스를 굉장히 잘 표현합니다.” 김효종 바텐더. “칵테일을 만들 때 ‘뚫고 나가는’ 포인트 하나를 날카롭고 확실하게 잡습니다. 그 포인트가 마시는 사람에게 딱 꽂히게끔 살릴 줄 알아요.” 송연희 바텐더. “칵테일의 질감을 잘 표현해요. 그가 만든 맛의 모양은 다분히 오래 혀에 남습니다.” 이상혁 바텐더. “일한 지 얼마 안 된 친구예요. 좀 더 지켜봐야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웃음)”

ⓒ designpress

디스틸은 10년이 넘도록 한자리를 지켰다. 강과 산도 사람과 마음도 달라지는 세월을 버텼다는 사실이 방증한다. 이곳이 언제고 다시 찾고픈 공간임을, 혹은 많은 게 뒤바뀌어도 여전히 이끌리는 장소라는 것을.

“사람은 늙고요. 우스운 건 동네도 늙어요. 언제는 청담이 가장 뜨겁다가 또 어느 날엔 이태원이 핫하고, 또 언제는 익선동, 또 홍대 사람도 변하고 동네도 변하는데, 그 와중에도 별로 안 변하는 것 같은 가게들이 있죠? 근데 사실 안 변하지 않아요. 조금씩 조금씩 변하고 있거든요. 다만 크게 확 틀어지지 않을 뿐이죠. 디스틸 위치를 옮길까, 공사를 할까… 매년 고민해요. 그런데도 못하는 이유가 있어요. 바 안에서 일하다 보면 알아요. 3년, 5년 만에 오는 손님, 결혼해서 오는 손님, 아이 낳고 첫 칵테일을 마시러 오는 손님, 단골이 돌아가시기도 하고… 찾아 주셨던 분들이 전에 느꼈던 그 느낌을 간직한 가게이기를 바라거든요.”

엄경섭 대표는 나이가 들며 식물이 좋아졌다고. 그 변화가 공간에도 영향을 미쳤다. ⓒ designpress

조금씩 조금씩 변하는데, 같은 분위기를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되게 단순해요. 제가 매일 가게에 나오면 돼요. 짧은 시간 머물더라도 저는 거의 매일 나와요. 손님들이 저를 보면서 자신의 기억이나 추억을 연결하게 되니까요. 또 신기한 게, 디스틸 직원들은 대부분 오래 근무해요. 별로 잘해주지도 않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근데 오래 있다 보면 이 친구들도 알게 돼요. 손님의 상황이 달라지고, 그들을 다시 만나고 하다 보면 ‘죽을 때까지 바텐더 할 수 있겠구나’ 마음을 품게 되죠.”

 

이곳을 오래 사랑하는 사람들, 미더운 동료들. 엄 대표는 무얼 더 바랄까. “한창 클럽 다니고 소주 마시면서 흥겹게 놀던 손님들이 이제 30대 후반, 40대가 넘어가요. 디스틸이 아니면 홍대에 올 이유가 없는 친구들이 계속 찾아 줘요. 그들이 아는 그 분위기를 가진 채 오래오래 가게 문을 여는 것, 그거 말고 제가 뭘 더 할 수 있겠어요. 그것만이 제 목표죠.”

김유영 기자

사진 디자인프레스 우정민

장소
디스틸
주소
서울 마포구 와우산로15길 10
김유영
에디터. 이야기를 듣고 기사를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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