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28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회화, 정신적 풍경에 대하여

사빈 모리츠 개인전〈Raging Moon〉
갤러리 현대는 오는 4월 24일까지 사빈 모리츠 개인전 <휘황한 달(Raging Moon)>을 개최한다.
Sabine Moritz, Andromeda, 2021, Oil on canvas 자료 제공: 갤러리 현대

 

별똥별이 내리고, 강물은 흘러간다. 연인들이 달콤함을 속삭이고, 집을 떠났던 철새들은 고향에 돌아온다. 사빈 모리츠(Sabine Moritz)의 작품에는 모든 게 다 있다.

 
사빈 모리츠의 추상 회화 디테일 컷 (사진: 하도경)

 

사실주의적으로 구현한 회화는 대상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어 우리를 프레임 내부 세계에 빠져들도록 유도한다. 반면, 추상 회화는 우리로 하여금 프레임의 내부 세계보다 내면과 정신적 풍경에 집중하도록 한다. 사빈 모리츠의 작업이 모든 게 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해 가족과 연인을 마주할 수도 있고, 지나간 우리의 시간과 추억들을 회상할 수도 있다.

 
Sabine Moritz, Baltic Sea III, 2021, Oil on paper, 자료제공: 갤러리 현대

 

전시 제목 ‘휘황한 달(Raging Moon)은’ 20세기 영국 문학을 대표하는 딜런 토머스(Dylan Thomas)의 시 <나의 기예 또는 우울한 예술로(In My Craft of Sullen Art)>에서 차용됐다.

 

나의 기예 또는 우울한 예술로

고요한 밤에 행사하는

달만이 휘황하고

연인들이 모든 슬픔을

서로의 팔에 껴안고 잠자리에 들 때,

난 빛을 노래하면서 일하네

야망이나 빵을 원해서가 아니며

상아로 된 무대 위에서

날 과시하거나 영예를 원해서도 아니네,

그들의 가장 비밀스러운 가슴의

평범한 대가를 바랄 뿐이네.

내가 이 바람에 흔들리는 종이 위에

글을 쓰는 것은 저 휘황한 달에서

동떨어진 오만한 자를 위해서가 아니며,

나이팅게일과 찬미가로 추앙받는

명성 높은 죽은 자를 위해서도 아니네,

다만 연인들을 위해서이네,

서로의 팔로 오랜 세월의 슬픔을 껴안은,

어떤 찬사나, 대가도 지불하지 않으며,

나의 기예나 예술에 관심이 없는.

나의 기예 또는 우울한 예술로_딜런 토머스, 박해윤 옮김

 

이 시는 예술가가 창작하는 동기와 목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고요한 밤에 뜨는 휘황한 달은 빵이나 야망, 과시욕, 영예 등과는 반대의 대상으로 기능한다. 사빈 모리츠는 이 시에 내재된 모순과 역설에 공감했고,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변화하는 달의 모습, 그리고 변화하는 자신의 시각언어와 미학적 비전을 상징하기 위해 ‘휘황한 달’이라는 단어를 차용했다.

 
Sabine Moritz, Sea King 98, 2017, ©Courtesy Marian Goodman Gallery

 

그는 정치적이며, 역사적인 풍경을 연구해왔다. 전쟁과 일상, 군인과 농부, 노동과 여가 등 일상적 순간을 화폭에 담았고, 그 결과물은 상대적으로 구체적인 형상을 지니고 있다. 작품 속의 대상은 2001년에 발생한 9·11 테러의 영향으로 더욱 구체화됐다. 헬리콥터나 비행기, 군함 등 편의를 위한 이동 수단이 공포와 경계의 대상으로 바뀌어버린 실상. 쉽게 잊혀지는 폭력의 역사를 가시화하려는 듯 흐릿하게 구현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정신적 풍경을 구현하기 시작한 시기는 2015년부터다.

 
Sabine Moritz, Winter, 2021, Oil on canvas, 자료 제공: 갤러리 현대

 

기억은 가변적이다

사빈 모리츠가 주목한 것. 그것은 매 순간 우리의 기억이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억은 감각의 변화라는 일련의 주제와 연결되며, 구상에서 시작돼 추상으로 완성된다는 점에서 모리츠의 작업 세계의 흐름과도 맥을 함께한다. 무아지경에 다다른 자가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몸짓을 상상해 본다. 그럼에도 자세히 보면 색의 섬세한 그라데이션과 다층적 레이어가 만들어내는 감각의 충돌이 드러난다.

우리의 기억은 가변적이다. 상황과 맥락에 따라 미화되기도 하고, 한없이 어두워지기도 한다. 우리가 처한 환경과 우리가 느끼는 감정, 그것이 작품과 만났을 때 작품은 더욱 풍부해진다. 이 작품을 실제로 봐야 하는 이유, 그것은 카메라로도 미처 담기 어려운 색의 향연과 물감의 마티에르가 있기 때문이다. 경험하지 않으면 깨닫기 어렵듯이 보지 않으면 느낄 수 없다.

 

Sabine Moritz, Chrysanthemums and Skulls, 2015, Oil on canvas, 자료 제공: 갤러리 현대
Sabine Moritz, Boat, 2018, Oil on canvas, 자료 제공: 갤러리 현대

 

이번 전시는 꽃이나 배, 해골 등 사빈 모리츠가 활동 초기부터 소재로 삼은 미술사의 도상, 정물화와 풍경화를 포함하고 있다.

 
Sabine Moritz, Rose 29_9_21, Oil on etching, 자료 제공: 갤러리 현대
Sabine Moritz, Rose 9_9_21, Oil on etching, 자료 제공: 갤러리 현대

 

특히 전시장 곳곳 배치돼 있는 에칭 작업은 구상과 추상의 중간지대 역할을 담당한다. 12점이 나란히 걸린 <장미(Rose)>(2020, 2021) 연작은 장미라는 대상을 형상화하고, 유화와 크레용을 사용해 색을 덧입힌 작업이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장미의 모습과 환경이 연상된다. 이는 동일한 모티프의 반복을 통해 주제의 다층적인 속성을 부각시킨다는 점에서 문학의 ‘토포스(topos)’ 기법을 연상시킨다.

 
연작 설치 전경 (사진: 하도경)

 

모리츠는 구상과 추상, 질서와 혼돈, 이성과 충동, 인간과 자연 등 작품에 내재된 대립적인 개념들을 아우르며 전시의 구성 개념으로 숫자 4를 제시한다. 서양에서 4는 만물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다. 물과 불, 흙과 공기, 아울러 공기의 사원소와 나침반의 동서남북, 사계절 봄, 여름, 가을, 겨울 등이 이에 해당된다. 따라서 숫자 4는 서양 사회에서는 질서와 안정을 의미한다.

 
전시 전경, 자료 제공: 갤러리 현대

 

작가는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인간 기억이 존재하게 되는 과정에 대해 숙고한다. 그리고 관람객들은 그 결과물에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투영한다. 전시장에서는 작가의 감정과 저마다의 기억이 만나 하모니를 이룬다. 마치 자연의 질서와 균형을 연상시킨다.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전시를 추천한다. 작가의 에너지와 형형색색의 색 빛깔, 두터운 마티에르에 나를 맡겨보자. 

 
사빈 모리츠, 자료 제공: 갤러리 현대
 
사빈 모리츠(Sabine Moritz)
1969년 동독 하노버와 라이프치히 사이의 크베들 린부르크에서 태어났다. 1985년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동독의 로베다를 떠나 서독으로 이주했고, 1989년에 오펜바흐미술대학교, 1991년에 쿤스트아카데미 뒤셀도르프에서 수학했다. 런던 필라코리아스갤러리(2021, 2018, 2015, 2014), 파리 마리안굿맨갤러리(2019, 2016, 2013), 베를린 쾨니히갤러리(2018), 뒤셀도르프 펠릭스링겔갤러리(2020, 2015, 2012) 및 쿤스트할레로스토크(2019) 등 유럽의 주요 갤러리 및 기관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그밖에 쿤스트할레엠덴(2018), 런던 임페리얼전쟁박물관 (2017), 뉘른베르크주립미술관(2012) 등에서 열린 기획전에도 참여했다. 모리츠의 작품은 테이트모던, 도이체방크컬렉션, 독일연방의회미술관, 루이비통모에헤네시재 단(LVMH) 등 유수한 기관에 소장돼 있다.
또한, 그는 작품 세계를 확장하기 위해 출판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예술전문서적 출판사인 발터 쾨니히 출판사(Buchhandlung Walther König)와 헤니 출판사(HENI Publishing)에서 로베다 시절의 드로잉을 모은 작품집 『Lobeda』 (2010, 2021), 그 연장선상으로 유년시절의 기억과 사진을 바탕으로 완성한 『JENA Düsseldorf』(2011, 2021)가 출간됐다. 최근 5년간의 작업을 담은 모노그래프 『Sabine Moritz: Paintings 2017-2021』가 곧 출간될 예정이다.

하도경 기자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갤러리 현대

장소
갤러리 현대
주소
서울 종로구 삼청로 14)
일자
2022.03.11 - 2022.04.24
헤이팝
공간 큐레이션 플랫폼, 헤이팝은 공간을 만드는 사람들과 그 공간을 채우는 콘텐츠와 브랜드에 주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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