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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03

내 작은 방으로의 초대

흑백 필름으로 전하는 인간의 세계
새해를 여는 박노해 시인의 사진전이 1월 4일부터 열린다. 개관 10주년을 맞은 라 카페 갤러리의 20번째 전시 <내 작은 방>展은 세계 민초들의 일상과 영혼을 방이라는 삶의 터전에 맞춰 펼쳐낸다.

 

사막과 광야의 동굴집에서부터 유랑 집시들의 천막집과 몽골 초원의 게르, 인디아인들이 손수 지은 흙집과 귀향을 꿈꾸는 쿠르드 난민 가족의 단칸방까지. 그리고 우리 모두의 첫 번째 방인 엄마의 품에서, 지상에서의 마지막 방인 한 평의 무덤까지. 박노해 시인이 흑백 필름카메라로 기록해온 37점의 작품은 ‘방의 개념’을 드넓은 세계와 깊은 내면으로 확장시켜 사유하게 한다.

 

빛의 통로를 따라서, Gondar, Ethiopia, 2008
해맑은 아침 미소, Palaung village, Kalaw, Burma, 2011

 

빛의 통로를 따라서

에티오피아의 고대 문명을 이어받은 성채 도시 곤다르. 세월만큼이나 깊은 어둠은 빛을 더욱 선명하게 한다. 우리가 먼 곳으로, 더 먼 곳으로 떠나려 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함이다. 오늘 현란한 세계 속에서 길이 보이지 않을 때는 더 깊은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갈 일이다. 내가 삼켜낸 어둠이 빛의 통로를 열어 줄지니.

 

해맑은 아침 미소

깊은 산마을에 여명이 밝아오면 나뭇단과 샘물을 지고 오는 건 소녀의 일과다. 부엌에서 아침밥을 짓던 엄마는 우리 딸 장하다며 웃음으로 맞아준다. 미소 띤 대화 속에 생명의 바람이 이는, ‘담소풍생(談笑風生)’의 아침이다. 

 

내 영혼의 동굴, Wagnat village, Jammu Kashmir, India, 2013
쿠르드 비밀 공연, Al Qamishli, Syria, 2005

 

내 영혼의 동굴

계엄령과 휴교령이 내려진 카슈미르의 아침. 한 줄기 햇살이 비추는 창가에 걸터앉은 누나는 글자를 모르는 동생을 위해 책을 읽어준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바깥세상과 아득한 별나라와 고대 신화 속으로 먼 여행을 떠난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작은 동굴이 필요하다. 지치고 상처 난 내 영혼이 깃들 수 있는 어둑한 방. 사나운 세계 속에 깊은 숨을 쉴 수 있는 고요한 방.

 

쿠르드 비밀 공연

나라를 잃고 떠도는 세계 최대의 소수민족 쿠르드. 시리아 정부의 감시를 피해 모인 심야의 비밀 공연에서 감춰둔 전통복장을 꺼내 입고 금지된 모국어로 노래한다. 지금 이 방은 쿠르드인들의 해방공간이자 독립운동 현장. 오늘도 세계 곳곳에서는 억압받고 추방당한 자들이 작은 방 한 칸에서라도 몸부림치며 자유를 부르짖고 있다. 

 

엄마의 등, Patacancha, Cusco, Peru, 2010
내 마음의 방, Cappadocia, Turkey, 2005

 

엄마의 등

안데스 만년설산 자락의 감자 수확 날. 엄마는 뉘어놨던 아이가 칭얼대자 등에 업고 자장가를 불러준다. 우리 모두의 첫 번째 방은 엄마의 등. 찬바람 치는 세계에서 가장 따뜻하고 믿음직한 그 사랑의 기운이 내 안에 서려 있어, 나는 용감하게 첫 걸음마를 떼고 마침내 스스로의 힘으로 선 청년이 되어 나만의 길을 찾아 걸어가고 있으니.

 

내 마음의 방

지상에 집 한 채 갖지 못한 나는, 아직도 유랑자로 떠다니는 나는. 내 마음의 깊은 곳에 나만의 작은 방이 하나 있어, 눈물로 들어가 빛으로 나오는 심연의 방이 있어, 나의 시작 나의 귀결은 ‘내 마음의 방’이니.

 

자수를 놓는 소녀, Drosh, Khyber Pakhtunkhwa, Pakistan, 2011
운전기사의 '트럭 아트', Lowari Pass, Pakistan, 2011

 

코로나19 이후 ‘방의 시간’이 길어진 지금, 한 인간에게 가장 내밀한 공간인 방의 의미를 새겨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급진하는 세계 속에서 나 자신을 지켜낼 독립된 장소, 내 영혼이 깊은 숨을 쉬는 오롯한 성소를 찾는 사람이라면 놓치지 말 것. 박노해 사진전 <내 작은 방>에서 한 해를 새롭게 시작할 마음의 빛을 채워보자.

 

 

발행 heyPOP 편집부

자료 제공 라 카페 갤러리

장소
라 카페 갤러리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10길 28)
일자
2022.01.04 - 2022.09.18
헤이팝
공간 큐레이션 플랫폼, 헤이팝은 공간을 만드는 사람들과 그 공간을 채우는 콘텐츠와 브랜드에 주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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