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룸코어(Backrooms-core)’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최근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공간 미학으로, 사람이 사라진 쇼핑몰과 학교 복도, 낡은 사무실처럼 익숙하지만 어딘가 비현실적인 장소에서 느껴지는 공포와 향수를 뜻한다. 본래 북적여야 할 공간이 텅 비었을 때의 불안감과 유년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그리움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 미학을 바탕으로 한 영화 〈백룸〉은 2026년 5월 말 개봉해 세계적인 화제를 모았다. 개봉 3일 만에 미국과 캐나다에서 3,150만 달러(약 461억 원)를 벌어들이며, 〈미드소마〉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배급한 A24의 역대 최고 흥행작이 됐다. 특히 2005년생 유튜버 출신 감독 케인 파슨스(Kane Parsons)의 장편 데뷔작이라는 점에서, 백룸코어가 지금 가장 젊고 새로운 공간 미학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백룸코어는 어디에서 시작됐을까. 그 탄생 배경부터 한국의 현실 백룸으로 불리는 강변 테크노마트 탐방기까지, 정리했다.
백룸은 어디서 왔을까
백룸은 2019년 미국 익명 온라인 커뮤니티 4chan에 올라온 사진과 글에서 시작됐다. 현실에서 잘못 ‘노클립(no-clip)’하면 원래 막혀 있는 벽이나 바닥을 오류처럼 뚫는 현상, 노란 벽지와 윙윙거리는 형광등만 이어지는 거대한 공간에 도착한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유튜브 영상과 인디 게임 등으로 세계관이 확장됐고, 팬데믹 시기 현실에서도 텅 빈 쇼핑몰과 공공장소가 늘어나며 백룸코어는 더욱 널리 퍼졌다. 영화 〈백룸〉은 그 미학이 대중문화로 확장된 결과다.
백룸코어의 바탕에는 ‘리미널 스페이스(Liminal Space)’라는 개념이 있다. 리미널은 라틴어로 ‘문턱’을 뜻한다. 1909년 네덜란드 인류학자 아르놀트 판 헤네프(Arnold Van Gennep)가 제시한 개념으로 기존 신분을 벗어났지만 새로운 상태에는 아직 도달하지 않은 중간 단계라는 뜻의 사회학 용어다. 1960년대 영국의 문화인류학자 빅터 터너(Victor Turner)가 이를 ‘이쪽도 저쪽도 아닌 불확실한 상태’로 발전시켰다. 이 개념을 공간에 적용해 문과 복도, 계단, 공항처럼 두 영역을 연결하지만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공간을 리미널 스페이스라 부르게 됐다.
학술적 개념과 온라인에서 사용하는 ‘리미널 스페이스’의 의미는 약간 다르다. 물리적인 경계보다 그 공간이 주는 감각에 집중한다. 사람이 가득해야 할 사무실이나 쇼핑몰이 텅 비어 있을 때, 익숙한 장소는 갑자기 낯설고 불안해진다. 여기에 현실 뒤편에 숨겨진 끝없는 공간이라는 괴담이 더해진 것이 백룸이다.
서울 한복판의 백룸, 강변 테크노마트
백룸코어의 유행과 함께 최근 떠오르고 있는 서울의 공간이 있다. 바로 ‘강변 테크노마트’다. SNS에서 “한국에서 백룸코어를 느끼고 싶다면 강변 테크노마트가 제격이다”라는 이야기가 돌며 오래된 상권이라 여겨지던 강변 테크노마트에 10대~20대 방문객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강변 테크노마트는 1998년 문을 열었다. 당시에는 한 건물에서 컴퓨터와 카메라, 오디오, 가전제품을 모두 비교해 살 수 있고, 국내 최초 멀티플렉스 CGV 1호점과 식당가까지 갖춘 ‘최신 기술의 집합지’로 여겨졌다. 실제로 2000년대 초반까지 서울 동부권을 대표하는 랜드마크였다.
한때 미래의 상징이었던 이곳은 30년 가까운 시간을 지나며 과거의 풍경이 됐다. 온라인 쇼핑의 발달과 건물의 노후화로 방문객이 점점 줄어들었고, 공실률도 계속 증가하는 추세다. 그런데 이 점이 오히려 젊은 고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1990년대~2000년대 태어난 젊은 세대가 경험해 보지 못한 레트로한 공간, 백룸코어를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여겨지고 있다.
강변 테크노마트를 직접 방문했다. 지하철 2호선 강변역에서 내려 횡단보도를 건너면 바로다. 가장 먼저 방문객을 맞이하는 건 건물 앞의 조형물이다. 세월 탓에 작품명과 작가가 기입된 비석이 마모되어 있었지만, 30년이 지나도 그 자리에서 방문객을 맞아주는 활기찬 몸짓이 인상적이다.
내부로 들어가 보자. 1층에는 패션몰 ‘엔터식스’, ‘올리브영’, ‘다이소’가 입점해 있어 흔히 볼 수 있는 쇼핑센터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 층 내려와 지하 1층을 둘러봤다. 의류 판매점, 시계점 등의 매장들에서 2000년대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 레트로한 제품들은 그 시절의 미감을 간직하고 있어, 하마터면 지갑이 여러 번 열릴 뻔했다. 만약 Y2K나 레트로 감성을 좋아하는 소비자라면 오로지 쇼핑을 위해 강변 테크노마트를 방문해 봐도 좋겠다.
지하 1층엔 지금도 활발히 영업 중인 푸드코트가 있었다. 일렬로 정돈된 테이블과 의자, 시간이 멈춘 듯한 화려한 장식의 기둥이 묘한 향수를 자극했다. 식사 시간이 아닌 오후 4시경이었기에 테이블은 대부분 비어 있었다.
본격적인 탐방 시작
본격적인 백룸은 푸드코드를 나와 엘리베이터가 위치한 한켠에서 시작됐다. 강렬한 붉은색 타일과 벽에 둘러싸인 엘리베이터 룸 뒤로 광활한 ‘백룸’이 나타났다. 공실로 인해 생긴 공터였다. 하지만 빈 공간임에도 언젠가 입실할 주인을 기다리듯 깔끔하게 청소되어 있었고, 경비 직원이 공간을 지키고 있었다. 영화 〈백룸〉처럼 공포감이 느껴지진 않았지만, 가득 차 있어야 할 공간이 비어 있다는 괴리감은 확실히 느껴졌다.
위로 올라가 보자. 2층부터 8층까지 디지털가전, 음향 장비, 카메라, 컴퓨터 장비 전문점 등이 입주해 있었다. 전자 제품을 구경하는 고객은 많지 않았고, ‘휴대폰 성지’로 알려진 6층 휴대폰 판매 코너에 드문드문 상담받는 고객이 보였다.
둘러보는 내내 ‘백룸 공간’을 자주 마주했다. 그중에는 공실로 생긴 빈자리가 많았다. 다만 넓고 광활한 공간에서, 쓸쓸하기보단 낯선 감각을 느꼈다. 현대의 상업시설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쨍한 컬러, 깔끔하게 청소하다 못해 반짝거리는 타일과 ‘상자에 들어간 느낌’을 주는 네모반듯한 구획들. 2000년대 상업시설을 경험해 보지 못한 10대~20대들이라면 분명 색다른 공간으로 느낄 것이다.
90년대 향수를 자극하는 공간
강변 테크노마트가 특히나 ‘체험 공간’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또 있다. 바로 겪어 보지 못한 향수를 느낄 수 있다는 것. 디지털 세대인 10대~20대 소비자들은 1990년대 문화에 일종의 판타지를 갖고 있다고 한다. 이런 ‘경험한 적 없는 시대를 그리워하는 감정’이란 뜻의 ‘아네모이아(anemoia)’가 2020년대 들어 마케팅 용어로 부상하기도 했다.
강변 테크노마트에서는 그 아네모이아를 온몸으로 충족할 수 있었다. 8층의 한 가게에선 각종 비디오와 DVD를 취급하고 있었고, 시중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1998년 방영한 애니메이션 〈카우보이 비밥〉과 2002~2003년 방영한 〈공각기동대 STAND ALONE COMPLEX〉의 DVD 세트를 구할 수 있었다.
테크노마트를 구석구석 돌아다니는 내내 종종 사진을 찍고 있는 젊은 방문객들이 보였다. 문득 궁금해졌다. 젊은 고객이 많아졌으니, 이곳에 입점해 있는 상인들의 사정도 조금은 나아지지 않았을까?
중고 카메라 전문점을 운영하는 한 상인에게 물었다. 20년 넘게 같은 자리에서 카메라를 판매하고 있다는 익명의 상인은 “최근 들어 사진 찍기 좋다며 젊은 친구들이 많이 온다. 모든 게 타이트하고 치밀한 현대 시대에, 여유와 옛날 감성이 있는 테크노마트가 새로운 체험이 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다만, “판매가 전보다 늘었느냐”라는 질문에는 “달라진 게 없다”라고 답했다. DVD를 구매한 비디오 전문점에서도 “손님층에 큰 변화는 없다”라는 비슷한 답을 들은 뒤였다.
다시 지하 1층의 푸드코트로 내려와 SNS에서 ‘추억 맛집’으로 떠오르고 있는 빙수집을 방문했다. 저녁 시간이 가까워지자, 몇 시간 전보다는 푸드코트의 테이블이 차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하러 온 인근 가게의 상인들, 직장인들, 백룸코어 체험을 온 젊은 고객들, 영화를 보러 나온 듯한 노부부까지 고객층은 다양했다. 추억의 맛을 가진 과일빙수를 먹고 있자니 뒤쪽의 수제 돈까스 가게에서 돼지고기를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추억 속 얼음 빙수처럼, 어린 시절 엄마가 사 준 수제 돈까스의 맛을 낼 게 분명했다.
다음엔 반드시 돈까스를 먹으러 오겠다는 다짐과 함께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강변 테크노마트는 분명 백룸코어에 어울리는 공간이지만, 백룸코어에서 가장 중요한 ‘불쾌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백룸이 불쾌한 이유는 차 있어야 할 공간이 ‘비어 있다’라는 감각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은 우리들의 머릿속에 잊혀진 뒤에도 줄곧 누군가의 일터이자 단골손님이 드나드는 ‘살아 있는 공간’이었다.
물론 과거보다 생기를 잃었다는 안타까움을 지울 수는 없다. 강변 테크노마트의 공실률은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이 세월을 간직한 공간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 않도록, 백룸코어를 체험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하는 고객들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만큼 쇼핑도 하고, 밥도 먹고, 차가운 얼음 빙수도 먹고 가기를 바란다.
글 · 사진 김은빈 객원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