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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7

공기와 벚꽃, 홍시의 빛깔을 담다

박서보 화백이 표현하는 자연의 색.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이라 불리는 박서보 화백이 9월 15일부터 10월 31일까지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개인전 를 연다. 그동안 국제갤러리와 함께 단색화를 세계 무대에 각인시킨 제56회 베니스비엔날레(2015)를 비롯해 여러 그룹전을 함께 해왔지만, 개인전 개최는 지난 2010년 이후 이번이 두 번째다.
국제갤러리에서 만난 박서보 화백 ⓒdesignpress

 

“얼마 전 넘어져 팔에 난 상처를 꿰맸어요. 입을 쩍 벌린 것처럼 피부가 찢어졌습니다. 서 있거나 걸어 다니는 게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요. 지구 상에 있을 날이 얼마 안 남았어요. 무덤에서 후회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박서보 화백은 나이가 들면서 다리에 힘이 없어 자꾸 넘어진다며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목소리에선 여전히 쾌활한 활기가 묻어났다. 위아래로 흰색 양복을 차려 입고, 평소 좋아한다는 보라색 수정 목걸이와 반지를 낀 박서보 화백은 1931년생, 올해로 90세다.

 

사진 제공 : 국제갤러리

 

지난 6월 미국 뉴욕타임즈는 한국 미술계의 우뚝 솟은 인물, 유산을 계획하다(A Towering Figure in South Korean Art Plans His Legacy)’는 기사를 통해 박서보 화백의 작품 세계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바야흐로 이우환과 함께 박서보의 이름은 한국을 넘어 세계에서 주목하는 이름이 됐다. 이들의 작품은 회화에 동아시아의 자연과 예술에 대한 관점을 담아내 서양 미술과 차별되는 한국만의 모더니즘을 선도했다고 평가받는다.

 

사진 제공 : 국제갤러리

 

“해외에서 왜 단색화, 단색화 하느냐. 서양은 인간 중심이라 작가 생각이 작품에 드러납니다. 반면 내 작업은 생각을 비워낸 것이지요. 이게 서양 미술사에는 없다 보니, 본인들에게 없는 것을 보충하기 위해 내 작업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 이게 트렌드입니다.” 박서보 화백은 단색화의 열풍을 이렇게 진단했다. “20세기 예술가에는 자신이 느낀 것을 일방적으로 토해 냈어요. 물감을 막 쏟아붓죠. 보는 사람에게는 그 감정이 전달돼서 스트레스가 돼요. 21세기에는 치유의 예술이 되어야 해요. 보는 사람의 불안함이 해소되고, 위로가 되도록. 남을 공격하지 않는 예술. 나는 비워내기 위해 그립니다”.

 

박서보 홍시색 '묘법 No. 080821'. 사진 제공 : 국제갤러리
박서보 공기색 '묘법 No.161120'. 사진 제공 : 국제갤러리

 

박서보 화백의 묘법 연작은 흔히 1970년대 초기(연필) 묘법, 1980년대 중기 묘법, 2000년대 이후의 후기(색채) 묘법으로 구분된다. 연필 묘법은 반복되는 행위를 통해 자신을 비우고 수신하는 과정에 중심을 두는 반면, 색채 묘법은 손의 흔적을 강조하는 대신 일정한 간격의 고랑으로 형태를 만들고 풍성한 색감을 강조하여 자연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작가의 대표 연작으로 자리매김했다.

작품 제작을 위해 작가는 두 달 이상 물에 충분히 불린 한지 세 겹을 캔버스 위에 붙이고, 표면이 마르기 전에 흑연 심으로 이뤄진 굵은 연필로 선을 그어 나간다. 연필로 긋는 행위로 인해 젖은 한지에는 농부가 논두렁을 갈 때와 마찬가지로 좌로 밀려 산과 골의 형태가 만들어진다. 물기를 말린 후 스스로 경험한 자연에서 포착한 색감을 담아내기 위해 표면에 아크릴 물감을 덧입힌다. 이렇게 연필로 그어내는 행위를 반복해 완성된 작품에는 축적된 시간이 덧입혀지고, 작가의 철학과 사유가 직조한 리듬이 생성된다.

 

사진 제공 : 국제갤러리

 

많은 이들이 착각하는 것 중 하나는 단색화의 개념이다. 박서보 화백은 자신이 정립한 단색화의 정의를 다시 한번 강조했다. “단색화는 색이 단색이라 단색화가 아닙니다. 행위의 무목적성, 행위의 무한반복성, 행위과정에서 생성된 흔적(물성)을 정신화하는 것. 세 가지 요소가 다 있어야 해요. 그게 없으면 무늬만 단색화입니다.”

그동안 단색화의 독창성이 무엇인지 궁금했다면 이번 전시가 좋은 답이 될 테다. 이번 전시는 ‘색채 묘법’으로 알려진 2000년대 이후 근작 16점을 소개한다. 자연에서 발견되는 선명한 색감과 주변 도시의 경관의 단조로운 색감이 혼재된 치유의 작품들이다. 작가는 관람객에게 의도된 경험을 강요하거나 메시지를 던지는 대신, 화면에 정적인 고요함과 리듬감 있는 활력만을 남겨 보는 이의 스트레스를 완화한다. 박서보 화백의 말에 따르면, 그의 작품은 스트레스를 흡인하는 장, ‘흡인지’다.

 

사진 제공 : 국제갤러리

 

박서보 화백이 일본 갤러리 관계자들과 후쿠시마현 반다이산에 올랐다가 새빨갛게 물든 단풍을 보고 “불길이 나를 태울 듯이 쳐들어오는 붉은 색”에서 충격적인 감동을 받아 자연의 색을 화면에 유인하기 시작한 일화는 이미 유명하다. “자연이 내 스승입니다. 쇼윈도에 비치는 자연의 색이 시시각각 바뀌어요. 그게 시대감각입니다.” 자신이 느낀 자연의 색을 연구하고, 그 색이 관객에게 전달되었을 때, 그게 바로 시대감성에 도달한 순간이라고 말한다.

시중에 파는 컬러칩으로는 절대 구현할 수 없는 오묘한 색. 이번 전시는 그런 색들이 가득하다. 작품에 담긴 색을 알고 가면 감상하는 재미와 감동이 고조된다. 여기서 힌트. 국제갤러리 내 삼청동의 풍경이 보이는 바깥쪽 K1 공간에서는 “공기색, 벚꽃색, 유채꽃색, 와인색’을, 안쪽 전시장에서는 “홍시색, 단풍색, 황금올리브색”을 만나볼 수 있다.

 

 

유제이

장소
국제갤러리(서울시 종로구 삼청로54)
일자
2021.09.15 - 2021.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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