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2-15

독서만을 위한 팝업스토어, 어떤 점이 달랐을까?

MBC 사내독립기업 ‘온더페이지’가 설계한 독서의 장면들

책을 좋아하냐는 지인의 말에 이렇게 답한 적이 있다. 읽는 것보다 사는 걸 좋아한다고. 농담 섞인 진심이었다. 냉장고만 한 책장은 가득 찬지 오래고, 침대 옆에 쌓아둔 책탑에도 검은 먼지가 앉았다. 그중 내가 완독한 건 몇 권이나 될까. 책은 이미 멀어진 친구 같다. 시간이 없어서, 일이 바빠서, 굳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이유를 덧붙이며 만남을 미루기만 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독서에 대한 갈증이 쌓인다. 언제든 읽을 수 있으면서,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공간에서 책에 파묻히고 싶다는 바람이 풀쑥풀쑥 튀어나온다.

‘오직 독서를 위한 팝업스토어’라는 온더페이지의 홍보 문구에 반가운 마음이 들었던 것도 그래서다. 크고 작은 북페어와 도서 관련 팝업이 숱하게 열리고 있지만, 그래서 책장에 빈틈은 없어졌지만, 정작 책을 펼치지 못한 나에게 건네는 동아줄처럼 느껴졌다. 온더페이지는 판매 대신 독서에 필요한 최소한의 환경을 구현했다. 귀에 걸리지 않는 음악과 글자에 시선을 모으는 조명, 그리고 몇 가지 느슨한 강제성. 무엇을 읽을지는 각자의 몫으로 남기되, 읽는 데 방해되는 요소만을 의도적으로 덜어냈다. 

 

티켓 한 장 가격이면 영화 수만 편을 볼 수 있는 스트리밍 시대에 굳이 극장을 찾는 건 돈으로 몰입을 사는 일이라 생각한다. 화면과 자막의 흐름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그 자체로 귀하다. 독서 역시 그런 공간이 필요했던 건 아닐까. 책을 위해 시간을 떼어내고, 온전히 읽는 행위에만 집중하는 경험. 온더페이지의 독서 팝업은 그것을 실험하기 위한 자리 같았다.

책의 곁을 지키는 것들

이번 팝업을 방문하고 싶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공간’이다. 온더페이지는 팝업 장소로 한남동 LDK를 택했다. 약 40년간 대사관저로 사용한 주택으로 현재는 다양한 팝업과 전시를 이어가는 문화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얼마 전, 이곳에서 열린 두부동아리 행사 제1회 두부잔치를 방문했었다. 친구 집에 놀러 온 듯한(그러나 아주 부유한···) 편안한 분위기와 채광이 인상 깊었다. 이런 집에서 종일 책이나 읽고 싶다는 말을 흘렸던 기억도 난다. 불과 한 달 만에, 그 푸념을 실현할 기회가 생겼다.

온더페이지의 북홀더링은 현장에서 실제로 체험할 수 있다

1층 굿즈 숍에는 독서할 때 곁에 두기 좋은 물건들이 있다. 컴포지션 스튜디오, 요리, 적파우, 센티멘탈 노트 등 전국 각지 문구 브랜드의 제품을 한자리에서 둘러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건 온더페이지가 처음 제작한 독서 소품이다. ‘starry’는 기존 북홀더링이 가진 불편에서 출발한 제품으로, 손가락이 놓이는 각도를 고려해 사선으로 구멍을 냈다. 일반적인 공장 제작 방식으로는 구현이 어려워, 호두나무 원목을 직접 깎아 만들었다. 머그잔에도 독특한 장치가 있다. 잔에 인쇄된 QR 코드를 스캔하면 매일 하나의 질문이 뜬다. 책을 읽는 시간과 그 이후를 질문으로 이어주는 방식이다. 머그잔과 독서링은 모두 200개 한정 수량으로 제작됐다.

두꺼운 책도 너끈히 담기는 에코백

같은 층 안쪽 공간에는 도서 큐레이션이 마련돼 있다. 강릉 윤슬서림, 제주 만춘서점, 광주 치읓의자리 등 로컬 경험을 풍부하게 만들어 온 독립 서점 열두 곳이 ‘2월의 책’을 다섯 권씩 추천한다. 책 옆에는 서점의 이름과 책방지기 추천사가 함께 놓여 있어, 자연스럽게 타인의 독서 경험을 들여다보게 된다. 독립 서점 중에는 강원도 춘천의 ‘첫서재’도 포함돼 있다. 첫서재는 온더페이지 남형석 대표가 2021년에 문을 연 공유 서재다. 책을 판매하는 서점이 아니라 독서를 권하는 곳이었다는 점에서 온더페이지의 뿌리와도 같은 공간이다. 각 서점이 큐레이션한 도서는 판매용이 아닌 열람용으로 팝업 현장에서만 읽을 수 있다.

독서하는 시간을 깊고 아름답게

2층에 올라가기 전에 파우치와 모래시계를 챙기자

독서 공간에 입장하기 전에 챙길 준비물이 있다. 파우치와 모래시계다. 먼저 파우치에 휴대폰을 넣어야 한다. 강제성은 없지만, 잠시라도 알림과 화면에서 벗어나 독서에 온전히 집중해 보길 바라는 마음이 담긴 장치다. 모래시계가 떨어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15분. 이번 팝업은 거창한 목표를 요구하지 않는다. 모래시계가 두 번 돌아가는 동안만이라도 책과 질문에 머물러보는 것. 그 정도면 충분하다. 분명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숏폼에 길들여진 나에겐 만만치 않다. 고갈된 집중력을 보완해 주기 위해 온더페이지는 독서 공간의 조명과 빛 등 부가적인 요소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자연광이 없는 방은 짙은 그림자가 지지 않도록 빛을 세심하게 조정했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글자에 머물도록 유도하기 위해서다. 

중년 여성이 빈백에 기대 독서에 한창이었다

독서 공간은 세 개로 나뉜다. 각 방에는 문장 부호와 함께 사유, 휴식, 감각이라는 키워드가 붙어있다. 방마다 분위기와 가구 배치가 조금씩 다르니, 취향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빈백이 놓인 휴식의 방에는 담요를 두른 중년 여성이 독서에 한창이다. 괜히 방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사람이 없는 감각의 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세 공간 가운데 가장 넓은 방으로 라운지 의자, 소파, 1인용 책상 등 다양한 옵션이 있다. 한쪽에는 붙박이장을 활용한 독서 공간도 마련돼 있다. 평소와는 다른 감각으로 책을 읽어보고 싶어 그 자리에 앉았다. 집에서 챙겨온 책 한 권을 꺼내 펼쳤다. 특별한 다짐은 없었지만 모래시계 두 번이 넘어갔고, 산 지 몇 달이 지나도록 한 장도 읽지 못했던 책을 그날은 38페이지까지 읽었다.

붙박이장을 활용한 독서 공간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향 제품들
자리마다 짐을 둘 수 있는 곳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텍스트힙 유행을 타고 책을 둘러싼 문화와 형식은 분명 다채로워졌다. 하지만 통계청이 발표한 사회조사 결과를 보면, 독서 인구 1인당 연간 독서 권수는 2021년 이후 매년 감소하고 있다. 책을 둘러싼 말과 장면은 늘었지만, 실제로 읽는 시간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는 셈이다. 온더페이지는 책 앞에 머무는 시간을 더 깊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 실험을 위해 독서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고, 도구를 개발했다. 팝업에서 보낸 시간은 짧지만, 그 경험이 반복될 수 있다면 독서는 다시 특별한 취향이 아니라 생활의 일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글·사진 김기수 기자

프로젝트
온더페이지 몰입독서 팝업스토어
장소
LDK
주소
서울 용산구 대사관로20길 8
일자
2026.02.06 - 2026.03.02
시간
화요일 - 일요일 11:00 - 21:00
(월요일 정기 휴무)
주최
온더페이지
김기수
아름다운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믿는 음주가무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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