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06

성수동 구독형 타운 플라츠

먹고 마시고 머무르며 창작하다.
연무장길 한복판. 성수동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4층 규모 벽돌 건물에 알록달록한 깃발이 도열했다. 1층에선 펍과 델리숍이 거리를 맞이하는 한편 그 사이 통로 너머로는 푸른 뒤뜰이 보인다. 익숙한 모습 속에서도 눈에 띄는 규모와 구성으로 발걸음을 붙잡는 이곳은 F&B와 오피스 모듈로 이루어진 구독형 타운, ‘플라츠’다.
© TPZ

 

플라츠를 만든 건 예술과 음악을 모티프로 성수동의 창작자들을 연결해 온 팀포지티브제로(이하 TPZ)다. ‘포지티브 제로’란 쓸모없거나 잉여로워 보이는 것(zero)을 긍정적으로(positive) 바라보는 태도를 일컫는다. 효율이란 기준으로 재단되지 않는 창작과 예술, 이로부터 만들어지는 삶의 여백과 즐거움에 주목하는 것. 팀은 성악을 전공하고 게이머를 거쳐 게임 회사에 몸담았던 김시온 대표, 패션 디자인을 전공하고 그룹의 디자인 전반을 총괄하는 윤지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비롯해 바리스타, DJ, 공간・패션디자이너 등 다양한 분야의 창작자로 이루어져 있다.

 

포스트 포에틱스가 '광장'이란 공간의 주제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한 사이니지. © TPZ

 

2013년 아티스트들의 커뮤니티이자 아지트인 ‘플레이스 사이’를 시작으로 재즈바 ‘포지티브 제로 라운지’, 카페 겸 전시 공간으로 사랑받는 ‘카페 포제’, 렁팡스의 셰프 김태민과 함께 한 식공간 ‘보이어’, 숍과 음악을 함께 담은 ‘로스트 성수’까지 TPZ가 만들어온 공간은 커피와 와인, 음악과 디자인의 서로 다른 조합이다. 팀의 구성원 한명 한명이 유닛이 되어 프로젝트마다 자유로이 이합집산한 결과다.

그리고 올해 6월 선보인 플라츠는 마치 게임 속 건물과 도시가 진화하듯, 그 규모와 심도를 높인 도시 실험의 시작이다. 먹고 마시고 놀고 창작하고 주거하는 일이 모듈이 되어 효과적으로 결합된 공간들이 차례로 공개될 계획.

플라츠 전체를 구성하는 첫 번째 모듈, ‘플라츠 part.1’이 자리한 건물은 오랜 시간 나염 공장과 방직 공장으로 쓰였다. 공간 곳곳에서 의도적으로 남겨 둔 나염 공장의 흔적이 보이기도 한다. “성수동의 오래된 건물들은 긴 시간 관리되지 않은 채 방치된 경우가 많아요. 벽과 바닥을 정비하는 과정이 무척 길고 험난합니다.” 뒤뜰 테이블에 마주앉은 윤지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특유의 빠르고 활기찬 호흡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야간 뒤뜰 정경. © TPZ

 

“한정된 비용 내에서 공간의 틀을 정비하는 일과 콘텐츠를 채우는 데 자원을 집중했어요. 뒤뜰 곳곳에 둔 식물 역시 고가의 토분을 쓰는 대신 화원에서 제공하는 화분을 그대로 썼습니다. 밤이 되면 또다른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천장 조명 역시 비싼 것이 아니에요. 전체적인 분위기와 조화를 기준으로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공간을 다듬었어요. 대신 이렇게 절감한 비용을 아트북과 가구를 사는 데 쓴 셈이고요. (웃음)” 공간 내부 데코레이션에 힘을 뺀 것은 유동적인 모듈 구조라는 기획 의도와도 연결된다. 추후 다른 기능이나 창작자를 담을 가능성을 열어두고 가구나 가벽같은 가변 요소로 공간을 조성한 것.

 

1층의 델리숍 먼치스 앤 구디스. 간단한 베이커리와 샐러드, 배치 브루batch brew 방식의 커피,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대의 소품들을 큐레이션해 플라츠 뿐만 아니라 인근 생활자에게 흥미로운 선택지를 제공한다. © TPZ

 

현재의 플라츠는 저층부의 F&B 공간, 상층부의 공유 오피스로 구성되어 있다. 1층에는 간단한 먹거리와 소품을 모은 델리숍 ‘먼치스 앤 구디스’, 논현동과 을지로에서 맥주와 이국적 요리의 페어링으로 사랑받은 ‘스탠 서울’, 누구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뒤뜰과 이 안에 자리한 전시・팝업 공간 글라스하우스로 채워졌다. 지하의 ‘카우보이 라멘’과 한국형 스낵바 ‘반반’은 널찍한 취식 공간과 함께 선택지를 넓힌다. 운영 주체를 내부로 영입한 ‘스탠 서울’을 포함해 모든 브랜드는 TPZ가 자체 운영하며 외부 협업을 점차 늘려나갈 계획이다.

 

스탠 서울 © TPZ
1층 스탠 서울.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맥주와 이국적인 요리의 페어링을 선보인다. © TPZ
지하 1층의 반반. © TPZ

 

TPZ의 사무실이 위치하는 4층 아래로 2층과 3층은 공유 오피스로 구성됐다. 2층은 지정석이 없는 공유 업무 공간으로 진입부의 아트북 서가와 안쪽의 핸드드립 커피 바가 포인트.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 그리고 입주자 사이의 관계에 성긴 여유를 주는 요소다. 삶 속 여백에 주목하는 TPZ의 방향성이 엿보이는 부분이기도. 오피스에 들어서자마자 면하게 되는 서가는 아트북 서점 포스트 포에틱스의 큐레이션을 기반으로 TPZ 멤버들의 추천을 더해 구성했다.

 

2층 오피스. 아트북 서가 안쪽으로 커피 바가 보인다. 책장과 평대 테이블, 소파 디자인은 논픽션홈이 맡았다. © TPZ
3층 오피스 공간. 위아래가 뚫려 있거나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지 않는, 사용자마다 분리된 구조를 취한다. © TPZ

 

3층은 지정된 공간을 점유하는 형태의 오피스다. 현재 스니커 리셀 플랫폼 크림(Kream) 팀을 포함해 세 곳의 회사가 입주해 있다. 분리된 공간에 통창을 채택하거나 위아래를 개방해 둔 일반적인 공유오피스의 문법을 따르지 않고 완전히 분리된 방의 구조를 취했다. 사무실 문은 열쇠 방식을 채택해 아날로그적인 경험을 더했다.

 

철재의 투박한 질감을 살린 책장과 평대. 책을 살펴 보다 자연스럽게 앉을 만한 위치에 소파가 놓여 있다. © TPZ ​
여러 모듈을 붙이거나 떼어 구조를 바꿀 수 있는 소파. 쿠션을 들어내 벤치처럼 활용할 수 있다. © TPZ

 

“매일 오피스에 출근할 때마다 시선이 닿는 장면들을 생각했습니다.” 윤지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인터뷰 중 ‘시선’이란 말을 거듭했다. 그의 말을 듣고 기자가 해석한 플라츠의 시퀀스는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1층에서 간단한 요깃거리를 사들고 식물과 낮은 좌석들이 놓인 뒤뜰로 향한다. 야외의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오늘 할 일을 정리한다. 그리고 계단을 오르면 마주치는 것은 영감을 더해줄 아트북 서가. 곁에 놓인 의자에 잠시 앉아 페이지를 넘긴다. 책장 뒤로 이어지는 커피 바에서 향긋한 커피를 내리고 마주치는 이들과 안부를 나눈다. 바 옆으로 이어진 소파 혹은 약간의 긴장을 줄 의자에 앉아 업무를 시작한다. (3층 이용자의 경우 열쇠로 문을 여는 일이 추가되겠다.)

 

독특한 조형의 메이플 테이블. 두터운 양감이 돋보이는 논픽션홈의 스툴(우측)과 빈티지 의자가 자연스럽게 함께 놓여 있다. © TPZ

 

그래서 TPZ가 이런 공간을 만드는 이유는 뭘까. “창작자들이 자기 공간을 가지고 작업을 시작하고자 할 때 지대, 권리금같은 현실적인 여건에 부딪혀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아요. 앞서 제가 말한, 오래된 건물의 틀을 다듬는 비용도 만만치 않잖아요. 요즘은 SNS로 누구에게든 말을 걸 수 있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재미있는 일을 함께 할 파트너를 만나는 일도 생각처럼 쉽지 않고요. 플라츠는 그런 일을 조금 쉽게 할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윤지원 디렉터가 밝힌 목표는 어쩌면 명확했다. 삶의 다채롭게 하는 예술과 창작의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 그런 공간이 곳곳에 놓인 도시를 만드는 것.

1층 F&B 이용자를 포함해 누구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뒤뜰. © TPZ

 

시선을 넓혀 김시온 대표에게 ‘플라츠’ 프로젝트의 전경에 대해 물었다. “‘플레이스 사이’를 할 당시의 인터뷰를 최근 읽어 보았는데, 플라츠의 개념을 그때부터 이미 이야기하고 있더라고요. (웃음) ‘크리에이터에게 힘을 부여한다(Empower Creators)’는 미션은 여전합니다. 다만 지금까지 선보인 공간이 TPZ가 직접 전개하는 브랜드의 것이었다면 플라츠는 더욱 다양한 창작자를 위한 장이 될 겁니다.” TPZ의 ‘길드마스터’ 김시온 대표의 말이다. 기획에 한창인 ‘플라츠 part.2’는 원오디너리맨션과 함께 빈티지 미드센추리 가구가 중심이 되는 공간으로 TPZ가 직영하는 브랜드를 포함해 다양한 주체의 브랜드를 품는 플랫폼의 형태를 취할 예정이다.

 
기획/운영 팀포지티브제로
공간디자인 윤지원, 박유경
협업 논픽션홈(2층 가구 디자인), 포스트 포에틱스 (2층 아트북 서가 구성, 사이니지 디자인)
사진 조용범

 

 

글 유미진

장소
플라츠 (서울시 성동구 연무장길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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