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레파스의 꾸덕꾸덕한 질감, 연필 깎는 서투른 손, 값비싼 젤펜의 예민한 촉. 문구에 대한 경험은 대부분 유년으로부터 이어진다. 다만, ‘문구’를 감각하는 방식이 변한다. 유년 시절 문구가 놀이나 학습을 돕는 도구로서 기능한다면, 성인이 된 지금은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발견하는 수단이나 미적 경험을 쌓는 취향 수집의 역할까지 겸하는 식이다.

국내 문구 시장 상황은 어떨까? 학령인구가 감소하고, 필기 방식마저 디지털로 변화하면서 전체적인 문구 사용량은 줄어든 듯하지만 모나미, 지구화학 등 헤리티지가 있는 브랜드가 건재하고, 명확한 콘셉트와 디자인 감각으로 문구 애호가들의 눈길을 끄는 신진 브랜드도 다수 생겼다. 2018년에 문을 연 편집숍 ‘포인트오브뷰(POINT OF VIEW)’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창작의 장면에 존재하는 모든 도구를 제안하는 포인트오브뷰의 플래그십 스토어는 주말이면 입장 대기줄이 생길 정도다.

문구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갈 이번 〈인벤타리오: 2025 문구 페어〉는 포인트오브뷰와 29CM가 공동 주최했다. 포인트오브뷰 김재원 대표는 개별 브랜드의 성장을 넘어, 문구 업계 전반을 활성화하기 위해 페어를 준비했다고 밝혔다. 업계 전체가 활기를 띠어야 새로운 시도와 재미있는 일들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문구 업계에서 활동하며 기존 문구 페어나 다른 산업의 페어를 방문할 기회가 많았다. 하지만 문구 브랜드들이 참여한 모습을 보면 마치 ‘남의 집에 초대받은 듯한’ 어색함이 느껴지곤 했다. 문구 브랜드들이 중심이 되는, 문구인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교류할 수 있는 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고민 끝에, 우리가 직접 문구인들을 위한 페어를 만들어보자는 기대감으로 인벤타리오를 기획하게 되었다. 이 장이 단순한 전시 공간을 넘어 문구 산업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더 많은 사람들이 문구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출처: [김호이의 사람들②] ‘포인트오브뷰’ 김재원 대표 “좋은 도구가 창작의 원동력이 된다”, 아주경제, 250311
‘인벤타리오 관전 포인트 3’
✔ 직접 큐레이션한 국내외 70여 개 브랜드가 한자리에
〈인벤타리오: 2025 문구 페어〉에서는 ‘종이라는 세계’, ‘몰입과 감각을 채우는 순간’, ‘작은 문구의 커다란 세계’, ‘쓰는 즐거움’, ‘키오스크 숍’이라는 주제로 큐레이션한 60여 개의 브랜드를 만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별도로 참가 신청을 받지 않고 주최 측에서 직접 선정한 브랜드만으로 페어를 채웠다는 점이다. 글월, 트롤스페이퍼, 소소문구 등 두터운 팬층을 보유한 국내 브랜드부터 까렌다쉬, 카키모리 등 전통 있는 글로벌 브랜드도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다. 그외에도 오롤리데이, 웜그레이 테일 등 문구를 넘어 라이프스타일 전반으로 영역을 확장한 브랜드와 렉슨, 리튼 등 리빙 브랜드를 더해 문구의 범위를 손에서 공간 전반으로 넓혔다.

문구인들의 축제를 위해 참여 브랜드도 만반의 준비를 가하고 있다. 서점 직원이 직접 큐레이션한 책장을 구경할 수 있는 예스24 부스에서는 나만의 문장을 적어 보고, 향기가 나는 책갈피를 만들 수 있는 체험을 준비한다. 잉크 브랜드 도미넌트 인더스트리는 잉크 전 색상을 사용해 볼 수 있는 무료 시필 데스크를 운영하고, 나만의 탄생화 잉크를 만드는 잉크 블로썸 행사를 진행한다. 그 외에도 그린디자인웍스 공장, 풀풀, 아이코닉 등 다수 브랜드가 현장에서 신제품 출시를 예고해 기대를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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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과 창작’, 각자의 관점으로 풀어간 주제관 둘
〈인벤타리오: 2025 문구 페어〉를 공동 주최한 포인트오브뷰와 29CM가 각자의 브랜드 관점을 중심으로 주제관을 준비했다. 취향 셀렉트 숍 29CM는 취향에 맞는 문구(文具)를 공감가는 문구(文句)와 함께 제안한다. 수집, 몰두, 기록, 영감, 창작 다섯 가지 형태의 문구인을 설정하고, 각 테마에 맞춰 29가지의 라이프스타일 문구 아이템을 소개하는 첫 번째 파트와 ‘당신의 취향 첫 페이지를 장식할 문구는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을 통해 나만의 문구 취향을 알아볼 수 있는 두 번째 파트로 구성했다.

포인트오브뷰는 창작의 도구로서 문구를 조명했다. 소박한 도구 하나가 만들어내는 무한한 잠재력과 창작하는 과정의 즐거움을 말한다. 크리에이터 문예진, 작가 한정원, 스케치 작가 카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창작자 10인의 도구를 선보이고, 도구를 정의하는 다채로운 관점을 소개한다. 또, 일러스트 작가 다섯 명의 감각적인 아트워크 스탬프를 하나하나 쌓아가며 나만의 특별한 굿즈를 완성하는 체험도 할 수 있다. 현장에서는 일러스트레이터 최진영 작가와 함께한 포인트오브뷰 첫 협업 스탬프 등 다양하고 감각적인 큐레이션 문구를 소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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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차점에서 탄생한 새로운 문구들


시대와 규모를 아우르는 협업을 통해 소장의 즐거움과 문구 페어만이 전할 수 있는 의미까지 더했다. 인벤타리오 특별관 ‘우리가 사랑한 문구’는 이번 페어를 더욱 가치롭게 만드는 공간이다. 어린 시절 기억 속에 남아 있던 문구사와 감각적인 디자인 브랜드를 매칭해 익숙한 문구를 동시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했다. 1956년에 창립한 지구화학은 세계 최초로 샤프식 색연필을 개발한 곳이다. 이번 페어를 위해 패브릭 브랜드 키티버니포니와 함께 여름과 겨울의 색을 담은 두 가지 미니 색연필 세트를 제작했다. 화랑고무는 한국 최초로 지우개를 만든 문구 회사다. 지난 2020년, 오이뮤가 진행한 화랑고무 점보 지우개 리브랜딩 프로젝트에 이어 이번에도 협업 제품을 선보인다. 오이뮤 특유의 한국적인 정서가 담긴 일러스트를 통해 어릴 적 지우개를 모으며 느꼈던 즐거움을 떠올려보자.

자타공인 문구인 세 명과 브랜드를 1:1로 매칭해 기획한 제품들의 면면도 흥미롭다. 영감노트 계정을 운영하는 이승희 마케터와 브랜드 오이뮤는 영감 채집 노트를 제작했다. 번개처럼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아이디어를 장소에 상관없이 기록할 수 있도록 키링 형태로 만든 것이 특징이다. 서은아 작가는 저서 〈응원하는 마음〉 속 메시지 50개를 선별해 응원 카드 세트를 만들었다. 디자인 스튜디오 모스그래픽의 감각이 더해져 보는 이에게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달한다. 문구인을 자처하는 김규림 작가는 포인트오브뷰와 함께 책에 밑줄을 그을 때 사용하기 좋은 ‘책연필 세트’를 만들었다. 문장을 가리지 않는 투명한 색으로 제작해 책 자체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모든 컬래버레이션 제품은 한정 수량으로 제작했으며, 29 리미티드 오더 부스에서 구매할 수 있다.
글 김기수 기자
자료 출처 인벤타리오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