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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1

성능경의 망친 예술 행각

"저는 '이런 것도 예술이다' 주장하고 싶은 겁니다."
성능경, 검지, 1976, 젤라틴 실버 프린트, 24 x 19 cm (x 17) Courtesy of the artist & Gallery Hyundai 갤러리현대 제공

아직 습하고 무덥던 날. 성능경 작가는 중절모와 셔츠를 벗고 러닝 차림으로 사람들 앞에 섰다. “예전 고등학생 때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스트레칭 운동입니다. 이 운동을 매일 하면 웬만하면 아프지 않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어요. 오늘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동작을 조금 변형해서 시연해 보겠습니다.” 팔을 높이 들어 올리고, 목을 천천히 돌리고, 공중에서 뛰면서 숨이 찰 때까지 체조 동작은 이어졌다. 장내가 숙연해질 때쯤 성능경 작가는 동작을 끝내며 이렇게 말했다. “이게 무엇인지 묻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저는 이런 것도 예술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겁니다. 미술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는 건 삶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예술은 알 수 없어요. 하지만 우리는 항상 질문을 해나가야 합니다.”

성능경 망친 예술 행각, 전시 전경 이미지, 2023 갤러리현대 제공

즉흥 퍼포먼스가 펼쳐진 현장은 갤러리현대 본관의 전시장. ‘한국적 개념미술’을 개척한 선구자로 평가받는 성능경 작가의 갤러리현대 개인전, <성능경의 망친 예술 행각>의 개막을 앞둔 날이다. 성능경 작가는 평생 비주류적 태도를 고수하며 삶과 예술의 경계에서 자신만의 예술관을 키워온 작가다. 80세가 되도록 개인전을 연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 작품을 판매한 것은 2009년 아르코가 처음이었다. 전시 제목인 ‘망친 예술’ 그리고 ‘행각’은 오랜 시간 자신만의 예술관을 구축해온 그의 응축된 키워드로, 시대와 미술 주류에 휩쓸리지 않고 끊임없이 예술과 삶에 질문을 던지는 행각을 실천해온 한 예술가의 위대한 흔적이다. 그 흔적을 담은 이번 전시 <성능경의 망친 예술 행각>은 작가의 시대별 대표작 140여 점을 꼽아 미니 회고전 형식으로 작품 세계를 조망한다.

성능경, 검지, 1976, 젤라틴 실버 프린트, 24 x 19 cm (x 17) | 설치 전경 이미지 | Courtesy of the artist & Gallery Hyundai 갤러리현대 제공

시대를 읽는 개념미술

성능경 작가는 1970년대 초반부터 미술가의 몸과 행위가 중심이 되는 독자적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그는 일찍이 사진에도 관심을 가졌다. 1974년 중고 니콘 F2 카메라를 구입하면서 독학으로 사진술을 익혔다.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개념미술의 중요한 흐름을 알 수 있는 <수축과 팽창>(1976), <검지>(1976)가 대표작이다. 카메라 초점을 검지에 맞추고 점차 검지를 입으로 가져가며 사진 촬영한 아홉 개의 장면을 17장으로 인화한 작품 <검지>. 미술사학자 조수진은 이를 1970년대에 세계 각지에서 출현한 여러 개념 사진과 유사한 특징이 있다고 보며, “기성 미술이 신봉해 온 고상하고 영웅적인 미술가 관념에 도전하는, 한국 전위의 새로운 유형의 초상 사진”이라 분석한다. * 이번 전시에서는 1976년 <제5회 ST전>에서 발표했던 작품 <검지>의 빈티지 원본을 공개한다.

*조수진, 〈성능경의 ‘망친’ 예술: 반세기의 전위 되기〉, 2023, 갤러리현대 전시 도록 중
(왼) 성능경의 망친 예술 행각, 전시 전경 이미지, 2023 사진: 갤러리현대 제공 (오) 퍼포먼스용 머리캡과 선글라스를 쓰고, 즉석에서 작품의 이름을 짓고 연필로 적어가는 성능경 작가. 사진: 이소진
성능경 현장: 구정, 1985 젤라틴 실버 프린트 23 x 34.5 cm (x 2) F : 50 x 91.4 cm Courtesy of the artist & Gallery Hyundai 갤러리현대 제공

성능경 작가의 작품 세계에서 ‘신문’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다. 본관 갤러리 1층에 액자 형식으로 전시한 <현장>은 1980년대 신문 보도사진을 재편집해 설치한 작품이다. 겨울철 꽁꽁 언 한강, 구정을 쇠러가는 가족들, 카폰(car phone), 컴퓨터 등 신문물이 도입되던 모습 등 당시의 시대상을 살펴볼 수 있는데 각 사진을 작가가 임의대로 배치하고 그 위에 점선 등 드로잉을 혼합해 완성하는 것이 특징이다. 성능경 작가는 보도사진 속 화살표 마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사진 속에서 어떤 장소를 가리키기 위해 편집자가 그려 넣은 화살표입니다. 저는 이런 편집을 일종의 ‘권력’으로 보았어요. 현상을 자르고 붙이고 주목시키는 힘이요.” 늘 가지고 다닌다는 연필을 손에 쥔 성능경 작가는 즉석에서 작업 작명을 했다. “여기는 어디인 것 같나요? 네, 맞아요. 그러면 ‘잠수교’라고 짓겠습니다. 이 사진에는 아이들과 장년들이 거리에 많이 모여 있네요…. 그러면 ‘어린이와 어른이’로 지어보겠습니다.”

성능경 현장: 잠실 야구장, 1985 젤라틴 실버 프린트 23 x 34.5 cm Courtesy of the artist & Gallery Hyundai 갤러리현대 제공
성능경 현장: 카우 (카폰+우사), 1985 젤라틴 실버 프린트 23 x 34.5 cm (x 2) F : 71 x 63.5 cm Courtesy of the artist & Gallery Hyundai 갤러리현대 제공
성능경 현장: 북에서 온 쌀, 1985 젤라틴 실버 프린트 34.5 x 23 cm (x 2) F : 91.5 x 51.5 cm Courtesy of the artist & Gallery Hyundai 갤러리현대 제공

<현장>은 성능경 작가의 대표 연작으로 1979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열린 <제5회 서울 현대 미술제>에서 첫선을 보였다. 작업은 보도자료 속 점선이나 원, 세모, X표 등 편집 기호에서 출발한다. 성능경 작가는 작품의도에 대해 ‘신문 편집자가 제시하는 사진 해석을 무효화하고 재해석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몇 년에 걸쳐 여러 신문의 보도 사진을 수집하고, 그중 1,500여 장을 마이크로 렌즈로 접사 촬영한 뒤 필름 위에 자신의 편집 기호를 넣고, 23x35cm 크기의 젤라틴 실버 프린트로 확대 인화해 완성한다. 이렇게 1979년부터 1985년까지 약 2천 여 점의 작업을 만들었다고 한다.

성능경, S씨의 자손들 - 망친 사진이 더 아름답다, 1991 사진: 갤러리현대 제공
성능경의 망친 예술 행각, 전시 전경 이미지, 2023 (왼) 우왕좌왕, 1998 (오) 안방, 2001사진: 갤러리현대 제공

개인적 서사 담은 이미지 실험

신문 그리고 보도사진을 가지고 작업했던 성능경 작가는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2000년대 까지 자전적 성격을 담은 사진과 설치 작품을 선보였다. 갤러리 2층 전시장에 빼곡히 붙여진 사진들은 성능경 작가가 찍은 가족 사진이다. 그는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 대신 네 남매를 육아하며 아이들이 성장하는 과정을 사진으로 담아낸 작업 〈S씨의 자손들-망친 사진이 더 아름답다〉(1991)다. 사진들은 찍다가 핀이 안 맞거나 실수로 셔터가 눌린, 이를테면 ‘망친 사진’인데 작가는 이를 10년 이상 모아두었다. 망친 사진이라는 개념은 이후 ‘망친 예술’로 확장된다. <안방>(2001)은 안방에서 카메라 조리개를 열고 이동하는 동시에 플래시를 터트려 찍은 의도적인 ‘망친’ 사진이다.

성능경의 망친 예술 행각, 전시 전경 이미지, 2023
성능경 그날그날 영어 3-84-59, 2003-2018 신문지에 연필, 수채 16.9 x 26 cm Courtesy of the artist & Gallery Hyundai 갤러리현대 제공

신문 읽기

작가에게 신문은 중요한 매체다. 어느날부터 신문 고정 코너인 ‘그날그날 영어’를 보며 매일 정성스럽게 공부를 하는데, 영어 공부와 콜라주가 혼합된 작업을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다. 사진을 오려내고 남은 신문은 그의 작업에서 꽤 상징적이다. 그는 70년대 일화를 떠올렸다. “개인전 때 어떤 기자가 인터뷰를 하자고 요청해 왔어요. 신문을 오리는 작업을 하고 있으니 덜컥 겁이났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인터뷰를 해서 유명해져도 됐었지 싶지만요.” 신문 매체를 통한 언론의 권력이 절대적이던 시절부터 신문 구독이 어색해진 오늘날까지 그는 매일 신문을 읽고 신문으로 작업한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조금 더 유연하고,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다는 것. 지난 9월 6일 작가는 이번 개인전과 프리즈&키아프 아트페어 위크를 기념해 특별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성능경, 〈신문 읽기〉, 1976 갤러리현대 제공

고덕동 라이트룸 서울에서 펼쳐진 <신문 읽기> 퍼포먼스는 100명의 외국인과 함께 동시에 신문을 읽는 퍼포먼스였다. 스페인, 독일, 중국, 브라질, 인도, 필리핀, 미국, 네덜란드, 폴란 등 유럽과 아시아, 북남미를 국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자국의 신문을 가져와 동시에 서로 다른 언어로 읽었다. 한편,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는 9월 1일부터 내년 1월까지 <온리 더 영: 1960-1970년대 한국 실험 미술 (Only the Young: Experimental Art in Korea, 1960s-1970s)> 전시가 열린다. 성능경 작가는 이건용, 김구림 작가와 함께 실험미술 대표 작가로 전시에 선다. 11월에는 <신문 읽기>(1976)를 재현하는 퍼포먼스를 펼칠 예정. 스포트라이트는 없었지만 묵묵히 평생을 다해 이어온 성능경 작가의 작업은 이제 주목받기 시작하는 것 같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 ‘망친 예술’ 그리고 ‘행각’의 ‘현재진행형’을 목격할 수 있다.

이소진 수석 기자·콘텐츠 리드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갤러리현대

 
프로젝트
<성능경의 망친 예술 행각>
장소
갤러리현대 본관
주소
서울 종로구 삼청로 8
일자
2023.08.23 - 2023.10.08
이소진
헤이팝 콘텐츠&브랜딩팀 리드. 현대미술을 전공하고 라이프스타일, 미술, 디자인 분야의 콘텐츠를 기획하고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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