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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01

부산현대미술관 디자인 리뉴얼 프로젝트

미술관은 제대로 된 안내 체계를 만드는 데 실패했습니다
부산현대미술관은 개관 5년이 지났음에도 제대로 된 미술관 정체성과 디자인을 만드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인정했다. 실패를 인정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국내 공공 행정 업무의 정서상 실패를 인정하는 건 보기 드문 일이다. 누군가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전보다 더 나아지기 위해서는 필수 불가결의 단계이다. 미술관은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기 보다 미술관스러운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부산현대미술관의 정체성과 디자인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기로 했고, 제한 없이 국내 거주 디자이너라면 누구나 디자인 시안을 제안할 수 있는 공모를 게재했다.

몇 개월의 심사를 거쳐 선별된 네 팀의 디자이너. 이들의 디자인 시안을 보여주는 ‘디자인 전시’가 바로 그 결과물이다. 지난 7월 9일 막을 내린 <부산현대미술관 정체성과 디자인>전은 이곳에서 열린 최초의 ‘디자인 전시’라고 한다. 새로운 미술관 M.I. 개발을 위해 고군분투해 온 부산현대미술관 최상호 학예연구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Interview with 최상호 학예연구사

전 전시장 입구 모습

지난 7월 9일, 전시 <부산현대미술관 정체성과 디자인>이 막을 내렸습니다. 공공 미술관에서 ‘디자인’을 조명하는 전시를 찾아보기가 좀처럼 쉽지가 않았던 터라 더 기억에 남았던 것 같아요. 미술관 정체성(Museum Identity)의 정립과 디자인 개발 과정을 하나의 전시로서 소개하고자 했던 계기가 있었을까요?

 

부산광역시 소속의 공공 미술관인 부산현대미술관에서 진행하는 ‘미술관의 정체성과 디자인 재정비’라는 꽤 큰 규모의 용역은 대체로 「지방자치단체를 당사자로 하는 계약에 관한 법률」에 따라 입찰을 통해 다소 은밀하게 진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입찰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일정 조건도 갖추어야 하고, 특히 행정 및 기타 서류 작성에 익숙해야 하죠. 1인 디자인 스튜디오나 규모가 작은 디자인 스튜디오는 현실적으로 참여하기가 힘든 편입니다. (물론 디자이너들도 행정이나 서류 작성 등에 익숙해질 필요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프로젝트에 선별된 디자이너 팀은 총 네 팀이었다.

따라서 이번 전시를 두고 혹자가 ‘디자인을 조명하는 전시인가요?’라고 묻는다면, 저는 디자인 전시인 척하는 사실은 ‘제도 비판 전시’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표면적인 목적은 전시를 통해 미술관의 방향과 가치가 담긴 용역 결과물을 납품받는 데 있지만, 결국 전시의 진짜 목적은 동시대 공공 미술관의 사회적 역할, 그리고 운영 박식에 대한 쟁점을 제시하는 것이죠. 더불어 미술관 제도와 관객 간의 전통적인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토대를 제공하는 것도 포함합니다. <부산현대미술관 정체성과 디자인>전은 미술관 주요 용역에 관한 의사 결정 과정이 과연 중립적으로 수행되어 왔는지에 관한 물음에서 시작했습니다. 실패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미술관의 정체성과 디자인 재정비라는 꽤 중대한 용역을 전시의 형태로 공개 전환함으로써 그 의사 결정 과정에 배제되었던 이들의 목소리에 조금 더 귀 기울이고 싶었습니다.

전 전경. 신상아와 이재진이 결성한 '폼레스 트윈즈'가 제안한 새로운 M.I.
전 전경

공공미술관의 디자인을 조명하는 전시를 기획하며 참고한 사례들도 궁금하네요.

 

전시 계획 단계에서 미술관에서 열린 디자인 전시 사례를 찾아봤었습니다. 특히 1950년대 MoMA에서 열린 등의 디자인 전시들에서 도출된 다양한 문서 자료가 큰 도움이 됐습니다. 올 초 프랑스 파리의 장식 미술관(Musée Des Arts Décoratifs)에서 찍어 온 여러 사진도 도움이 됐고요. <타이포잔치> 같은 비엔날레 자료와 국내 디자인 전시를 기획한 기획자들과 이야기하면서도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죠. 반면 전시 디스플레이 방식에서는 크게 사례를 찾지 않았습니다. 네 팀의 디자이너들에게 8 x 8m의 공평한 공간을 주고 자유롭게 활용했으면 좋겠다고 했기에 오히려 이들에게 많이 의지했습니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폼레스 트윈즈(신상아, 이재진), 강문식&이한범, 치호랑 팩토리(김치완, 신재호, 옥이랑), 박기록(박고은, 김기창, 정사록)이 제안한 부산현대미술관의 새로운 로고 디자인

올해 초 공모를 통해 강문식&이한범, 박기록(박고은, 김기창, 정사록), 치호랑 팩토리(김치완, 신재호, 옥이랑), 폼레스 트윈즈(신상아, 이재진) 등 총 네 팀의 디자이너를 선발했어요. 이들을 선별할 때 중요하게 생각한 기준점이 있었다면 무엇이었을지 궁금합니다. 아울러 각 팀별로 제안한 디자인 시안의 특징은 어떻게 달랐는지도요.

 

심사위원들에게 전문성·구현성·독창성·심미성 등을 기준으로 평가해 달라고 했어요. 물론 저는 심사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지만 전시 기획자로서 전시의 시각적인 결과물을 고려하지 않을 순 없겠더라고요. 결과적으로는 매우 만족스러웠습니다. 디자인 도출 과정이나 적용 과정을 다채롭게 보여준 ‘박기록’, 탄탄한 연구와 다양한 협업자와의 협업으로 개념적으로 접근한 ‘강문식&이한범’, 귀여운 캐릭터와 여러 즐길 거리를 제공한 ‘폼레스 트윈즈’, 그리고 디자인 진행 과정을 짜임새 있게 정석대로 보여준 ‘치호랑 팩토리’. 다양한 성향의 디자이너가 참여한 만큼 그 자체로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를 제공했다고 생각합니다.

전 전경. 김치완, 신재호, 옥이랑의 '치호랑 팩토리'가 제안한 디자인 시안 모습.

한편 네 팀의 전시 공간을 선택하는 걸 사다리 타기로 결정했다고요. 공정성에 유독 신경을 쓴 느낌이에요.

 

전문성, 구현성 등과 같은 심사 항목과 별개로 이번 전시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이 바로 ‘공정성’이었습니다. 공모 자체도 국내 거주 디자이너 이외에는 어떠한 제한을 두지 않았고, 포트폴리오와 간단한 계획서 1부만 작성하면 참여가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심사가 공평하게 진행되기 원했기에 심사위원에게 제공하는 모든 파일은 개인 정보를 삭제하고 전달했고요. 최소한의 절차로 규모에 상관없이 최대한 많은 디자이너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고 싶었습니다.

전시장 내 관객을 위한 투표함과 투표 용지 모습

전시장 내 관객들의 투표를 유도한 것도 흥미로웠습니다. 물론 이후 전문가들의 의견이 더해진 종합적인 결과를 도출했지만. 한편으로 미술관의 MI 개발 영역을 대중의 취향과 선택에 맡겨도 괜찮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구심도 들더라고요.

 

전시장 내부에서 진행한 투표는 결과물에 대한 관객의 반응을 즉각적으로 알 수 있는 중요한 정보였습니다. 특히 전시 관람 이후 투표한 결과이기 때문에 최종 로고 시안만 제공하고 진행한 시군구 공무원 대상 투표 결과와는 차이가 많더라고요. 예를 들어 ‘강문식&이한범’의 경우 전시장 내부 투표 결과 4위였지만 공무원 대상 투표에서는 1위를 차지했어요. 이해하기에 다소 난해할 수 있는 작품이라 전시장 내부에서 높은 순위를 기록하지 못했으나 실제 로고 시안만 두고 본다면 가장 완성도 있어 보인다는 의미인 거죠. 이러한 정보는 최종 심사에도 큰 도움이 됐어요. 공공 기관이기에 정체성과 디자인이 너무 난해해서는 안되지만, 그렇다고 많은 연구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그 M.I.는 오래 사용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미술관에서 디자인이 주인공인 전시를 본 관객의 반응도 궁금한데요. 기억에 남는 피드백이 있다면요?

 

부산현대미술관에서 처음 열린 디자인 전시였습니다. 다행히 많은 분들이 전시를 즐겨주셨고, 특히 직접 참여할 수 있는 투표를 좋아해 주시더라고요. 전시 브로슈어에도 언급했지만 결국 전시의 성공은 결과물의 품질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얼마나 진지하게 이 과정에 임하는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투표에 진지하게 임하는 관객의 모습을 보고 꽤 성공적인 전시였다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부산현대미술관이 그간의 실패를 인정하고 함께 그 해결점을 찾아가는 과정이 흥미로웠다는 반응이 가장 기억에 남네요.

전 전경. 박고은, 김기창, 정사록으로 구성된 '박기록'의 디자인 시안들.

부산현대미술관의 디자인 리뉴얼 프로젝트에는 오늘날 미술관에서 디자인의 역할과 필요성에 대한 많은 고민도 담겨 있을 것 같아요.

 

전시에서 더 나아가 디자인은 생활에서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디자인과 관련한 미술관의 전시가 더욱 많아져야 하고요. 먼저 관객에게 많이 노출해 디자인을 친근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해요. 이때 미술관은 관객과 디자인 사이의 어색함을 중재할 수 있는 중재자가 되어야 하고요. 관객과 미술관 모두 디자인 또한 많은 고민을 거쳐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결코 미술과 다르지 않은) 숭고한 과정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폼레스 트윈즈가 최종적으로 선별됐어요. 이들이 제안한 디자인을 선정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심사 총평에서 언급한 내용을 인용하자면 제안의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이고 유기적으로 정체성과 디자인을 변주할 수 있기에 이들을 선정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큰 이견 없이 동의하는 편이고요. 진지한 연구를 바탕으로 미술관 정체성에 관해 많은 고민을 했다는 점과 그 제안의 확장성을 특히 눈여겨보고 있었거든요. 실제로 디자인을 미술관 곳곳에 쉽게 적용할 수 있는지 등 실무자로서 가질 수 있는 질문과 의문에 대해서도 대화를 통해 많이 해결해 준 팀입니다.

참여 디자이너 박기록(박고은, 김기창, 정사록), 치호랑 팩토리(김치완, 신재호, 옥이랑), 강문식&이한범, 폼레스 트윈즈(신상아, 이재진)

선정 디자이너 폼레스 트윈즈(신상아, 이재진)

 이정훈 기자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부산현대미술관

프로젝트
<부산현대미술관 정체성과 디자인>
장소
부산현대미술관
주소
부산 사하구 낙동남로 1191
일자
2023.04.29 - 2023.07.09
링크
홈페이지
이정훈
독일 베를린에서 20대를 보냈다. 낯선 것에 강한 호기심을 느끼며 쉽게 감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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