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작가 11팀이 참여하는 <예술 평화: 0시의 현재> 전에서는 제목 그대로 타인과의 공존을 예찬한다. 한국 미술가 홍순명, 이용백, 김승영, 박재훈, 일본 미술가 아이다 마코토, 오자와 츠요시, 스노우플레이크, 침↑폼 프롬 스마파! 그룹, 중국 미술가 장 샤오강, 쉬빙, 송동이 그 주인공이다. 모두가 동아시아 3개국을 대표하는 중견 작가들이라 이름만으로도 반갑다. 우연히도 모두 남자 작가다.
팬데믹을 뚫고 오랜만에 참여 작가들이 직접 미술관을 방문해 작품 설치를 하고 각국 미술가뿐 아니라 관람객과 교류를 나누었다. 중국 미술가는 제로 코로나 정책 때문에 방문이 어려웠지만, 한국 일본 미술가들은 8팀 모두 울산을 방문해 미술관이 모처럼 활기를 찾았다.
흥미롭게도 일본 유명 미술가 요시토모 나라가 참여한 스노우플레이크(The Snowflakes)도 울산을 찾아 직접 작품을 설치했다. 스노우플레이크는 요시토모 나라, 키네타 쿠니마츠, 히로야스 코스케가, 미사에 오코야마로 구성되어 있다. 요시토모 나라는 유명세를 의식한 듯 조용히 미술관을 방문해 바닷가에 직접 설치 작품 재료도 주우러 갔다. 이들은 이번 전시에서 주워온 재료로 스노우플레이크만의 이미지를 만들었고, 작품 제작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상도 만날 수 있다. 스노우플레이크는 홋카이도 토비우 아트 커뮤니티를 통해 결성되었는데, 토비우는 숲을 살리고 예술로서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스타 미술가의 부캐릭터를 알게 되어 흥미롭다.
(왼쪽) 송동, 나의 도시, 2014, 문, 창문, 거울, 샹들리에, 카펫, 700x500x450cm
(오른쪽) 송동 작가의 ‘나의 도시’(2014) 내부 모습
전시장 입구의 거대한 작품은 중국 미술가 송동의 설치 작품 ‘나의 도시’이다. 송동은 문으로 만든 이 거대한 7미터 작품을 울산시립미술관에 기증해 컬렉션의 가치를 높였다. 이 작품은 송동이 중국 개혁개방 정책으로 추진된 도시 개발로 인해 철거된 지역에서 수집한 문과 창문, 거울과 카펫을 조합해서 만들었다. 누구를 위한 개발이고, 누구를 위한 현대화인지 다시 한번 고민하게 만드는 멋진 작품이다. 미술관 방문 인증 사진을 촬영하기에도 최고다.
안쪽에 송동의 작품이 한 점 더 있는데, 멀리서 보면 샹들리에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플라스틱 통으로 이루어져 있다. 작품 제목은 ‘빅 브라더’이다. 샹들리에를 이루고 있는 형형색색의 플라스틱 통들은 마치 현대인을 감시하는 CCTV처럼 병 입구가 관람객을 향하고 있어 정보 기술 발전의 폐해를 상기시킨다. 값비싼 재료가 아니라 버려진 것들로 만든 작품이 심금을 울리는 것은 격동의 시대를 지나온 중국 미술가 특유의 저력이자 대륙의 스케일이다.
“본래 아무 것도 없는데, 어디에 먼지가 있으리오?”. 쉬빙의 작품 ‘어디에 먼지가 있으리오’는 911테러 당시 뉴욕에 있던 작가가 현장에서 수거한 먼지 위에 쓴 글자 작품이다. 고층 빌딩이 무너진 자리에서 채집한 먼지는 인간의 이기심을 보여주며, 관람객은 이를 통해 인생무상을 느끼게 된다. 자세히 살쳐 보지 않으면 어떤 작품인지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 수 없고, 이를 깨닫게 되는 것이 전시 관람의 묘미다.
일본 미술가 오자와 츠요시는 <채소 무기> 연작 사진을 통해 여성과 무기에 대해 이야기 한다. 작가는 2001년부터 세계를 돌며 여성이 채소로 만든 총을 들고 비장한 포즈를 취한 사진을 촬영해왔다. 그리고 촬영 후 그 채소로 요리를 해서 나누어 먹는다. 이는 전쟁 후의 평화를 상징하며, 유머러스하기까지 하다. 이번 울산을 방문해서 직접 신작을 촬영했는데, 남북 관계의 미묘함 때문에 작품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기밀에 붙여졌다.
전시 제목 중 ‘0시’는 계획된 행동이 시작되는 결정적 순간을 의미라는 전시 용어다. 따라서 ‘0시의 현재’라는 것은 위기에서 새로운 시작을 내다보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 붕괴와 산업 사회 위기를 동시에 겪고 있는 현대인에게 냉철한 각성을 제안하는 전시다. 역사와 운명을 공유한 가깝고도 먼 세 나라 작가들의 이야기는 모두 심각하지만, 때로는 표현 방식이 코믹해 웃음이 나기도 한다.
일본 미술가 아이다 마코토의 설치 작품 ‘동북아시아 장아찌 선수권 대회에서 최하위권을 차지한 일본 대표 누카즈케의 항의 성명서’를 보자. 한국의 김치, 중국의 짜사이, 일본의 누카즈케 절임 채소 경연 대회의 불만을 표한 성명서가 재미있다. 누카즈케가 3위를 차지하자, 한국어, 중국어, 영어로 번역한 누카즈케의 항의문은 세로 쓰기로 쓰여 있어 더 읽기 어렵게 만든다. 자국 문화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각국 민족주의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왼쪽) 홍순명 작가의 ‘레버쿠젠'(2021) | 사진 제공: 홍순명
(오른쪽) 김승영 작가의 ‘쓸다'(2021-2022)
홍순명 작가는 맥아더 장군 조각 ‘타국서 온 장군상’과 유화 작품 ‘폭발’, ‘레버쿠젠’을 선보였다. 맥아더 장군은 한국 전쟁에 개입한 한중일과 미국 사이에 서 있는 상징적 인물이다. 작가는 장군상을 랩으로 꽁꽁 싸서 새로운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거대한 유화 작품은 핑크색 공장 매연과 폭발을 대조시켜 현대 문명의 폐해를 연상시킨다. 김승영 작가의 작품 4점은 영상과 사운드, 오브제와 관객 참여가 어우러진다. 관람객은 의자에 앉아 머릿속의 고민과 번뇌를 종이에 써서 바닥에 던져 버린다. 이 종이들은 모아서 불태워 재가 되는데, 마음속 응어리가 정화되는 기분을 선사하고 싶은 작가의 의도이다.
울산시립미술관은 기술 도시 울산에 위치한 전시장답게 미디어 아트를 중심으로 전시를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 미술관 최초로 마련한 미디어 전용관 XR Lab에서 미술가 정연두의 신작을 만날 수 있고,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수상작 백남준의 ‘시스틴 채플’을 중심으로 백남준 전시가 열린다. 이 작품은 지난 30년간 세계에 공개된 적이 없으며, 울산시립미술관 컬렉션으로 소장되면서 한국에서 오랜만에 선보인 것. 4채널 영상 작품은 요셉 보이스가 노래하는 영상과 함께 백남준 특유의 예술적이고 에너지가 넘치는 영상들이 콜라주를 이루고 있다. 정연두의 작품은 까마귀의 시선에서 바라본 울산의 모습을 담고 있다. 까마귀는 마치 현대인과 같이 여기저기 떠돌려 도시를 배회한다. 일본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란 가수 안코드(Aancod)의 구성진 노래는 까마귀의 비행과 잘 어울린다.
<예술 평화: 0시의 현재>는 9월 18일까지, <백남준 탄생 90주년 특별기획전: 땅의 아바타, 거북>은 9월 23일까지, 정연두 작가의 <오감도>는 10월 10일까지 만날 수 있다. 박주예, 최락준 작가가 만든 어린이 전시 <1명의 어린이와 1000명의 어른들>은 9월 18일까지니, 가족 관람객은 전시가 끝나기 전에 방문하면 좋을 것 같다.
글 이소영 객원 필자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울산시립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