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여러 도시를 다니며 펜 한 자루로 풍경을 기록하는 설동주 작가에게 사진은 중요한 자료다. 작은 포인트까지 놓치지 않고 그리기 위해서는 먼저 사진을 찍어 그 순간을 기록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설동주 작가는 사진에 기이한 형태의 피사체가 찍힌 걸 발견했다. 파노라마 촬영 시 피사체가 움직여 잔상이 남은 것이다. 이 이상한 형태는 종종 발견되었다. 흔히 사진을 망친 주범이자 삭제해야 할 피사체였지만, 자주 보다 보니 애정이 쌓였다. 그래서 설 작가는 이 기이하지만 재밌기도 한 형태를 모아서 ‘파노라마 크리처스(Panorama Creatures)’라는 이름을 붙여 독립출판으로 책을 펴냈다.
책을 출간한 지 5년이 지난 2022년. 작가는 개인전을 위해 파노라마 크리처스를 다시 꺼냈다. 그리고 새로운 시도를 통해 자신의 한계를 벗어났다. 서울 성수동의 CDA 갤러리에서 8월 6일까지 개인전 <파노라마 크리처스>를 진행하고 있는 설동주 작가를 만났다.
Interview with 설동주 작가
오랫동안 작업했던 <파노라마 크리처스> 시리즈를 전시에서 선보이게 되었어요.
파노라마 크리처스는 사이드 프로젝트였지만 좋아하는 작업이기에 그동안 꾸준히 그렸습니다. 사람들에게 선보이고 싶은 갈망도 있었고요. 종종 파노라마 크리처스를 기억하는 분들에게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냐는 질문도 받았어요.
파노라마 크리처스는 언제, 어떻게 시작했나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일본에서 1~2달 정도 지내면서 발견했어요. 그림을 그리려면 정보가 많이 담겨야 하므로 파노라마 사진을 찍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형태가 일그러진 피사체를 발견했죠. 잘못 찍힌 피사체였지만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어요. 그래서 한 번 풍경은 제외하고 그 피사체만 그려봤는데 재미있었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사이드 프로젝트로 계속 그렸습니다.
파노라마 크리처스를 작업할 때는 무엇에 중점을 두나요?
파노라마 사진에는 이상한 피사체가 다양하게 찍히는데, 그중 형태적으로 재미있는 것을 그립니다. 파노라마 크리처스는 시각적 위트를 보여주는 작업이기 때문에 형태가 재미있는지, 이전에는 못 봤던 새로운 형태인지를 중점으로 봅니다.
개인전을 파노라마 크리처스 시리즈로만 구성한 이유가 궁금해요. 보통 대표작을 선보이니까요.
그동안 전시를 많이 했지만, 갤러리에서 정식 개인전을 하는 건 처음이었어요. 메인 작업을 보여줄 것인지, 아니면 새롭고 재미있는 걸 보여줄 것인지 고민되었죠. 큐레이터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니까 전부터 파노라마 크리처스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를 전시로 보여주자고 역으로 제안하더라고요. 사실, 갤러리로서는 관객들이 바로 아는 작가의 대표작을 전시하는 게 더 좋은데 새로운 작업을 제안해주니까 결심이 서더라고요.
이번 개인전은 작가님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예요. 주제, 크기, 작업방식 등이 기존과 아주 달라요.
그동안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작업을 이번에 다 시도해봤습니다. 종이에서 벗어나 나무 조형물을 제작하고,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죠. 아크릴, 스프레이, 펜, 바니쉬 등 재료도 다양해졌어요.
작업 시 힘들지 않았나요? 완전 새로운 작업에 도전한 거니까요.
처음 시도하는 방법이 많아 힘들었지만, 너무 만족스러워요. 이번 전시가 아니었다면 시도도 못 했을 것이고, 이처럼 시간과 노력을 쏟기도 힘들었을 거예요. 그래서 작업을 시작할 때, 미친듯이 해보자고 결심하고 다양하게 시도해봤어요. 덕분에 힘들었지만 재미도 있었죠.
펜 드로잉은 주로 노트에 그렸는데 이번 전시 작품은 캔버스에 조형물까지 크기가 확 커졌어요.
작품 크기가 커지면 작업 방식도 달라질 거로 생각했지만, 결국 모든 건 라인 드로잉 영역 안에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단지 크기가 커지면서 선 굵기도 두꺼워진 것뿐이죠. 종이 위에 그린 펜 드로잉은 1~2mm의 얇은 선으로 표현하는 세계였다면, 개인전의 작품들은 5~10mm의 굵은 선으로 표현한 세계인 거죠.
파노라마 크리처스에는 동세와 시간이 포함되어 있어요. 작품이 품은 속성이 달라지면 풍경이나 피사체를 관찰하는 방법도 달라지나요?
시티 트래킹은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을 펜을 사용해서 종이를 옮기는 거라면, 파노라마 크리처스는 사진에 찍힌 기괴한 생명체(파노라마 크리처)를 아크릴, 스프레이와 같은 새로운 재료를 사용하여 그리는 작업입니다. 즉, 두 시리즈 모두 제 시선으로 보고 발견한 무언가를 새로운 매체로 옮기는 작업이며, 동시에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선이 있다는 걸 알려주는 ‘시선의 큐레이션’이라고 생각해요. 시티 트래킹이 세상에는 이런 풍경도 있다는 걸 보여줬다면, 파노라마 크리처스는 실제로 볼 수 없는 상상적인 요소가 섞인 시선을 제시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전시 서문에 보면 ‘대상을 관찰하는 시선과 태도의 확장을 제안한다.’고 쓰여 있어요. 이것이 파노라마 크리처스를 통해 전하려는 메시지인가요?
파노라마 크리처스는 시선의 확장에 대해 말하지만 강요는 아니에요. 오히려 저의 시선을 보여주고 앞으로 이렇게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걸 부담스럽지 않게 제시하는 거죠. 관객들도 ‘이런 시선이 있구나’하고 가볍게 느끼면 좋을 것 같아요.
파노라마 크리처스가 기존 작업에 영향을 끼친 부분도 있나요?
시티 트래킹은 실제로 존재하는 풍경이기 때문에 ‘보이는 그대로의 정직한 화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상력이나 창의력에 한계가 있어요. 물론 저만의 시선으로 편집해서 그린 그림이지만 이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풍경은 아니죠. 하지만 파노라마 크리처스는 우연과 기술이 만들어낸 형태이기 때문에 눈으로는 절대 볼 수 없죠. 덕분에 그동안의 한계들이 해소되는 느낌이었어요.
이번 개인전 작업을 하면서 느낀 점이 많았겠어요.
그동안 답답했던 부분이 풀리고 작품 크기와 재료 등이 확장되니까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하고 싶은지를 알 수 있었어요. 같은 작업을 꾸준히 하는 것도 대단하지만, 한편으론 매몰되는 느낌도 받으니까요. 개인전처럼 어떤 일이 계기가 되어 인풋도 얻고, 자극도 얻으면 또 다른 새로운 갈래가 생기는 것 같아요.
확실히 개인전이 그 계기를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맞아요.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저 자신과 작업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있었어요. 지금까지 내가 어떤 식으로 작업했고, 앞으로 뭘 보여줘야 하고…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작품 활동에 도움이 돼요.
모두 다 소중하겠지만 개인전 작품 중에서 유독 기억에 남는 것이 있나요?
나무로 만든 조형 작품이 조금 더 기억에 남아요. 전부터 해보고 싶었는데 처음 시도하는 거라 어려웠거든요. 처음에는 CNC 가공이 끝난 목판에 채색만 하면 된다고 쉽게 생각했어요. 그러나 막상 해보니까 물성이 달라서 시행착오가 많았어요. 예상대로 진행된 적이 한 번도 없어 마감할 때까지 확신이 서지 않았어요. 그런데 갤러리 벽에 거는 순간, 모든 우려와 고민이 해소되고 역시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조형 작품은 어떻게 작업한 건가요?
테두리 라인을 손으로 직접 그렸습니다. 마스터한 다음에 스프레이로 채색하면 더 깔끔하고 빠르게 완성할 수 있는데, 제 손으로 그리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 거로 생각했어요. 그래서 가까이서 보면 선에 터치감이 보여요.
최근 그림 주제가 다양해진 듯해요. 시티트래킹과 파노라마 크리처스는 물론, 의자와 같은 사물을 라인 드로잉으로 그린 작업도 있고요.
주제의 변화에 초점을 맞췄다기보다는 라인 드로잉을 더 다양하게 푸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나온 작업입니다. 시티 트래킹과는 다르게 피사체나 풍경을 미니멀하게 표현하고 싶은 적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선 굵기를 두껍게 하니까 가능하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부터 작품을 선 굵기에 따라 분류하고 있습니다. 의자 드로잉 시리즈처럼 선이 굵은 작업은 ‘볼드 라인(Bold Line)’이라고 부르고 있어요.
같은 라인 드로잉이라도 선 굵기에 따라 분위기가 다르더라고요.
맞아요. 그래서 굵은 선과 얇은 선을 결합해서 또 다른 분위기를 연출한 작업을 보여줄 수 있는 전시를 구상하고 있어요. 아마 이번 개인전처럼 제가 보여주고 싶었던 시선을 설명하는 전시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작업을 작은 크기로 보여주는 전시도 생각 중입니다.
설동주 작가의 PICK!
시티트래킹을 떠날 때 항상 지니는 오브제 3
스니커즈 – ALTRA OLYMPUS
시티 트래킹 작업은 많이 걸어야 해서 신발이 중요합니다. 제가 애용하는 신발은 미국의 트레일 러닝화 전문 브랜드 알트라(Altra)의 올림퍼스 라인으로, 발 형태와 최대한 비슷한 구조로 디자인되어 엄청 편합니다. 무게도 가벼워서 종일 신어도 편하고 쾌적해요.
가방 – Cayl SOYO
들고 다니는 소지품이 많으므로 경량 배낭을 멥니다. 우연히 찾은 케일(Cayl)은 아웃도어용 의류와 가방을 출시하는 한국 브랜드로, 알음알음 알려져 인기가 높습니다. 일상 시에 맬 수 있는 무난한 디자인도 많아서 데일리로도 추천합니다.
카메라 – 라이카 M10
렌즈, 셔터 감, 색감 등이 다 우수해서 왜 라이카가 카메라계의 명품이라고 불리는지 알 수 있어요. 특히 라이카로 찍은 사진에는 그만의 감성이 있는데, 저와 잘 맞아서 작업을 하러 나갈 때, 꼭 챙기는 카메라가 되었습니다.
글 허영은 에디터
자료 제공 CDA 갤러리
CURATED BY 허영은
다양성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고 믿는다. 그래서 숨겨진 이야기들을 찾아내서 보고, 듣고, 읽고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