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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27

예정 없던 외출 떠난 할머니의 흔적을 모아

할머니의 공간에서 그를 그리는 <링거> 展
예정 없이 집을 비운 할머니의 흔적을 모은 이자원의 전시, <링거(Linger)>에 다녀온 것은 한 편의 문학 작품을 온몸으로 읽는 일 같았다. 전시는 종로구 삼청동 35-202에 위치한 집 대문의 초인종을 누르는 것부터 시작했다.
Linger_#1(ooze), 2021. 할머니 집에서 수집한 각종 그릇과 용기. 종로구 삼청동의 빈 집에서 단기간의 장소 특정적 설치

 

기자를 반기는 작가 따라 걸음을 옮기니 서까래와 대청마루 같은 한옥의 근사한 면면이 드러났다. 실내화로 갈아 신고 안쪽에 들어가 작가의 할머니가 윤이 나도록 쓸고 닦았을 집을 채운 그릇, 물컵, 요리 도구, 코끼리 조각상을 바라봤다. “인공조명을 쓰지 않아 시간마다 물건에 맺히는 빛이 달라요” 작가가 해 저물기 전 오는 것이 좋겠다 한 이유였다.

 

Detail View, Linger_#1(ooze), 2021. 할머니 집에서 수집한 각종 그릇과 용기. 종로구 삼청동의 빈 집에서 단기간의 장소 특정적 설치
Linger_#2(needy)

 

열 맞춰 바닥에 세운 수집품은 집 비운 할머니를 그리워하듯 그녀가 잠들었던 침대를 향해 몸 돌리고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자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메마른 식물이 초연하게 제 자리를 지키는 중이었다. 다른 방에는 뒤집어진 식탁을 받친 목제 의자가 마른 낙엽 위 서 있었다. 작가는 1층으로 내려온 기자 옆에 난로와 라디에이터를 놔주고 불 위 주전자를 올렸다. 고요한 집에 물 끓는 소리가 번졌다. “밤에는 낙엽 굴러가는 소리가 어찌나 큰지 으스스할 정도더라고요” 세 달 동안 할머니 집에 머물며 작업과 생활을 병행한 작가의 말이었다.

 

Linger_#5(anchor) detail
Linger(drained), 2021. 할머니 집에서 수집한 마른 화분. 종로구 삼청동의 빈 집에서 단기간의 장소 특정적 설치

 

조소와 예술학을 복수 전공한 이자원은 자신의 작업을 ‘까마귀처럼 공허를 모으는 것’이라 설명했다. 반짝이고 아름다운 것을 찾아다니는 까마귀처럼 자신 역시 무언가를 끊임없이 수집하고 이를 작업으로 연결한다 했다. 이를 부연하는 과거 작업 중에는 수만 개의 노란색 종이별로 바닥을 한가득 채웠던 <☆(2020)>과, 미국에서 출시한 저칼로리 인공감미료 ‘이퀄(equal)’을 먹은 뒤 남은 포장지를 모아 39x50cm의 크기로 벽면 부착한 <이퀄(2021)> 등이 있다.

, 2020.
, 2021.

 

2년 전 뇌출혈이 찾아온 이자원의 할머니는 오랫동안 애정으로 가꿔온 삼청동의 집 떠나 자식 내외와 함께 지낸다. 이자원은 남다, 머물다를 뜻하는 영어 동사 ‘링거(Linger)’를 ‘대상과의 작별을 전제한 채, 대상의 곁에 남아 있으려 머무적거리며 작별의 시간을 지연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작가는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학자인 플리니우스(Gaius Plinius Secundus)가 자신의 저서 <박물지(Histoia Naturalis)>에서 언급한 그리스의 도공 부타데스(Butates)의 이야기를 빌려 이번 전시를 설명한다.

 

부타데스의 딸은 연인의 모습을 영원히 기억하고자 끝을 검게 태운 지팡이로 연인의 그림자를 그린다. 이자원은 ‘긴 여행을 앞둔 청년은 여인을 한 번이라도 더 안아보려고 하지만, 그녀는 그림을 그리는 데 여념이 없다. 그녀에게는 연인이 곁에 있는 지금보다 앞으로 다가올 외로운 날들이 더 절실하기 때문이다’고 말하는 논문*이 자신의 작업과 맞닿는다고 느낀 듯했다. 갑자기 낡은 괘종시계가 고요한 집에 새소리를 퍼뜨렸다.

* 한의정, 「현전-부재의 흔적: 그림자의 현대적 변용에 관하여」, 『현대미술사연구』, 37(0), 현대미술사학회, 2015, pp.231-232. 우정 아, 『남겨진 자들을 위한 미술』, 서울: 휴머니스트, p.4. 알랭드 보통 외, 김한영 역, 『알랭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 : 예술은 우리를 어떻게 치유하는가』, 파주: 문학동네, 2013, p.8.

 

Detail View, Linger_#2(needy), 2021. 할머니가 평생에 걸쳐 수집한 코끼리 조각. 종로구 삼청동의 빈 집에서 단기간의 장소 특정적 설치

 

이자원은 2년 전, 먼지가 내려앉은 할머니 집의 뒷문을 열고 들어가 그곳에서 전시해야겠다 생각했다. 시작은 전시 장소가 될 한옥의 정보를 찾는 것이었다. 작가는 어머니에게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의 학생이 한일 절충식 건물을 연구하며 할머니의 집을 실측한 적 있다는 말을 들은 후 2층 방의 책장에서 평면도를 찾았다. 작가는 건넌방부터 대청마루를 거쳐 넓고 길게 이어지는 1층 중앙을 전시의 중심 공간 삼아야겠다 생각했다. 독특한 구조가 새로운 형태의 설치 작업을 선보이는 데 적합하리라는 판단이었다.

 

Detail View, Linger_#4(static), 2021. 할머니 집에서 수집한 침구, 마른 화분, 전자시계 겸 라디오. 종로구 삼청동의 빈 집에서 단기간의 장소 특정적 설치
Detail View, Linger_#4(static), 2021. 할머니 집에서 수집한 침구, 마른 화분, 전자시계 겸 라디오. 종로구 삼청동의 빈 집에서 단기간의 장소 특정적 설치

 

전시 공간을 확정한 이후의 과제는 전시 형태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집안의 그릇에서부터 의자와 이불에 이르기까지 많은 물건을 켜켜이 쌓았다. “하지만 전시 제목이 <링거>임을 생각했을 때 비어 있는 대상을 말해야 했어요” 작가는 대가족이 식사할 때 항시 사용했던 그릇이 무언가를 담을 일 없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컵과 여러 가지 식기와 나란히 전시했다. 여러 점의 코끼리 조각상도 마찬가지였다. 할머니가 떠난 집에 홀연히 남은 그들은 돌아올 일 없는 할머니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기자는 여러 물건 사이 정작 할머니의 사진이 없다는 사실을 의아하게 느꼈다. 덧붙여 “정보가 전혀 없는 할머니가 미지의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해요”라고 말했다. 이자원은 전시를 준비하며 오랫동안 쓴 400장에 달하는 작업 일지를 꺼내 “모든 사실은 이곳에 담겨 있어요. 하지만 개인사를 드러내면 관람자가 전시에 개입할 틈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오히려 할머니에 대한 보편적인 향수나 정서를 자극하는 것이 맞겠다고 생각했죠”라고 말했다.

 

 

신은별 기자

장소
서울시 종로구 삼청동 35-202
주소
서울시 종로구 삼청동 35-202
일자
2021.12.28 - 2022.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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