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숫가루가 뉴욕 에이스호텔에 등장했다. 우리가 익히 알던 미숫가루와는 조금 다르다. 청태와 아주까리밤콩 등 한 가지 품종의 풍미를 살린 음료부터 커피와 카카오를 조합한 블렌드까지, 종류만 무려 일곱 가지다. 충남 공주에서 토종 곡물의 가능성을 탐구해 온 ‘곡물집’이 음료 브랜드 ‘MISU(미수)’를 앞세워 미국 시장에 첫발을 내딛었다. 10월 23일부터 25일까지 에이스호텔 뉴욕에서 열린 전시 〈MISU IS SPINNIN’ AROUND OVER YOU〉를 통해서다. 익숙한 미숫가루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도는 제품의 맛뿐 아니라 패키지 디자인과 전시 방식에도 이어졌다.
지금 미숫가루를 꺼내든 이유
MISU를 이해하려면 먼저 ‘곡물집’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주식회사 어콜렉티브가 운영하는 곡물집은 2020년 충남 공주에 문을 연 곡물 경험 브랜드이자 그로서리 카페다. 지역 농부와 연구자, 다양한 분야의 창작자들과 협업하며 토종 곡물의 맛과 특성을 탐구하고, 이를 음료와 디저트 등 일상에서 즐길 수 있는 음식으로 발전시켜 왔다. 그중 미숫가루는 곡물집을 시작할 때부터 꾸준히 만들어 온 대표 음료다.
곡물집이 미숫가루를 새로운 브랜드로 발전시킨 데에는 한 가지 궁금증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누구나 익숙하게 마시는 미숫가루가 다른 나라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곡물을 볶고 갈아 물에 타 마시는 오랜 방식이 오늘날에도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외 시장에서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기존의 미숫가루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발전시킨 것이 ‘MISU’다.
MISU가 주목한 것은 곡물마다 다른 맛과 향이다. 우리가 커피를 고를 때 원두의 품종과 산지, 로스팅 정도에 따라 풍미를 구분하듯, 곡물 역시 품종과 가공 방식에 따라 저마다 다른 개성을 지닌다. 곡물집은 여러 곡물을 한데 섞는 방식에서 벗어나 품종의 특성을 살리고, 새로운 재료를 조합하며 음료의 가능성을 넓혔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일곱 가지 MISU다.
일곱 가지 맛, 일곱 가지 표정
MISU는 크게 두 가지 제품군으로 나뉜다. ‘MISU VARIETAL’은 한 생산지에서 한 명의 농부가 재배한 토종 곡물을 품종별로 선보이는 제품이다. 백년검정콩, 청태, 아주까리밤콩, 재팥, 찰수수 등 다섯 품종의 고유한 맛과 향에 집중했다. 아주까리밤콩은 버터처럼 부드럽고 풍부한 풍미를 지닌 반면, 청태에서는 민트를 연상시키는 산뜻한 허브 향이 난다. 특히 백년검정콩은 곡물집이 자리한 공주에서 한 가족이 여러 세대에 걸쳐 재배하고 먹어온 토종콩이다. 대대로 이어져 온 품종에 오늘날의 음료라는 새로운 쓰임을 더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익숙한 음료에 토종 곡물을 접목한 블렌드 제품도 있다. 어콜렉티브는 공정무역 전문 기업 아름다운커피, 식품 소싱 기업 키자미테이블과 협업해 커피와 카카오를 활용한 새로운 미수를 개발했다. 한국의 커피믹스에서 영감을 얻은 ‘MISU COFFEE’는 공정무역 아라비카 커피에 아주까리밤콩을 더해 깊은 로스팅 향과 고소함을 살렸다. ‘MISU CACAO’는 우간다산 카카오와 재팥을 조합해 부드러운 질감과 산뜻한 풍미를 구현했다. 일곱 가지 제품 모두 비건 크리머를 사용했으며, 휴대하기 편한 스틱 형태로 개별 포장했다. 물이나 두유에 타 음료로 즐기는 것은 물론, 샐러드드레싱이나 다양한 요리의 재료로도 활용할 수 있다.
제품마다 다른 맛의 개성은 패키지 디자인에도 반영됐다. 디자인을 맡은 김규린·공동환 디자이너는 ‘맛은 어떤 모습일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 원재료의 생김새를 직접 묘사하는 대신 맛과 향, 질감 등 감각적인 특성을 색과 형태, 움직임과 리듬으로 표현했다. 언어와 문화적 배경이 다른 사람도 직관적으로 맛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렇게 일곱 가지 제품은 저마다 다른 그래픽을 입으면서도 하나의 시각적 체계로 연결됐다.
공주에서 뉴욕 한복판으로
미국에서 MISU를 처음 소개할 장소로 선택한 곳은 일반적인 식품 박람회장이 아닌 에이스호텔 뉴욕이다. 에이스호텔은 디자인과 음악, 예술을 매개로 로컬 창작자와 방문객이 교류하는 문화 공간으로도 알려져 있다. 곡물집은 미숫가루 안에 담긴 한국 식문화와 토종 곡물의 이야기를 함께 전하고 싶었다. 이를 위해 약 3개월간 호텔 측과 전시 방향을 논의했고, 호텔 내 보드룸을 전시장으로 꾸몄다.
전시에서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일곱 개의 회전하는 LP 형태 설치물이었다. 씨앗이 밭에서 자라고, 수확된 곡물이 농부와 만드는 사람의 손을 거쳐 마침내 한 잔의 음료가 되기까지의 여정을 레코드의 회전에 빗대어 표현했다. 전시 제목인 〈MISU IS SPINNIN’ AROUND OVER YOU〉 역시 이러한 순환에서 비롯됐다. 공간에는 일곱 가지 MISU 제품과 원재료, 개발 배경을 소개하는 콘텐츠를 마련했다. 방문객들은 직접 곡물의 향을 맡고 MISU를 맛보며 그 차이를 경험할 수 있었다.
공주에서 뉴욕으로 무대는 바뀌었지만, 곡물집이 추구하는 가치는 여전하다. 토종 곡물의 새로운 맛과 가능성을 탐구하고, 그 곡물을 길러온 농부와 땅에 축적된 시간을 전하는 일이다. 낯선 도시에서 새로운 음료로 소개된 미숫가루이지만, 그 맛의 출발점은 여전히 농부의 밭에 있다. MISU가 더 많은 사람의 일상에 닿을수록, 그곳에서 이어져 온 씨앗과 농부의 이야기도 함께 퍼져 나가지 않을까.
글 김기수 기자
자료 및 사진 출처 곡물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