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드륵, 탁. 2026년, 대한민국 오프라인 상권의 배경음이 바뀌었다. 과거 명품 브랜드나 SPA 브랜드가 차지하던 쇼핑몰의 ‘골든존’은 이제 형형색색의 캡슐토이, 가챠(Gacha) 머신이 점령했다.용산 아이파크몰, 잠실 롯데월드몰 등 대형 쇼핑센터까지 가챠 붐에 합류했다. 가챠 붐은 유행을 넘어, 거대한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2~3년 전에는 애니메이션과 일본 문화를 좋아하는 소위 ‘오타쿠’들의 취미에 그쳤던 가챠가, 백화점에 입점하게 된 이유는 뭘까. 가챠가 이토록 인기를 얻은 배경에는 소비 트렌드인 ‘필코노미(Feel-conomy)’가 있다. 가격이나 기능보다 감정적 만족을 우선하는 소비 흐름에서, 가챠는 ‘작지만 확실한 즐거움’을 제공한다.
왜 우리는 작고 귀여운 캡슐 뽑기에 몰입하게 됐을까. 수차미 서브컬처 비평가, 이석 인천대학교 일본지역문화학과 조교수와 함께 그 이유를 파헤쳐 봤다.
대형 쇼핑센터로 나온 ‘덕질 문화’
수차미 비평가는 이를 ‘덕질의 사회적 공인’이라 평가했다. “이젠 덕질을 해도 대형 쇼핑센터의 밝고 개방된 공간에서 할 수 있다. 온라인에서만 즐기던 경험으로 오프라인에서 안전하게 확인받고 싶은 욕구는 모든 서브컬처 소비자에게 있다. 이제 백화점에서 서브컬처 IP 팝업이 열리고, 피규어 숍이 들어서는 건 내 취향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증거다.” 가챠 붐은 폐쇄적이었던 서브컬처가 대중의 영역으로 확장된 변화를 보여준다.
죽어가던 상권의 부활도 극적이다. 온라인 쇼핑에 밀려 쇠퇴하던 국제전자센터나 신도림 테크노마트에 하나 둘 서브컬처 숍이 입점하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홍대를 잇는 ‘덕질 성지’로 탄생했다. 특히 팬데믹 이후 공실률 30%를 웃돌던 국제전자센터는 최근 공실률 약 0% 수준으로 떨어졌다.
과거 덕질 하는 사람들의 공간이었던 곳들이 대중화되고 있는 요즘, 걱정스럽게 보는 시선도 있다. 이석 조교수는 “과거에도 용산 등의 전자상가는 서브컬처의 성지였다. 비주류의 ‘아싸’들이 숨을 수 있는 도피처이자, 주류 질서에 저항하는 카운터 컬처(Counter-culture)의 역할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들만의 공간이 아니다. 남녀노소 가볍게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됐다. 시대의 흐름이지만, 관광지가 된 아키하바라처럼 개성이 사라질까 걱정되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5,000원의 확실한 행복, 합리적 소비인 이유
청년 세대가 작고 귀여운 물건에 몰입하는 배경에는 주거 공간의 제약이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 수차미 서브컬처 비평가는 “청년 세대에게 크고 아름다운 건 사치”라고 분석했다. 1인 가구의 좁은 자취방은 크고 화려한 오브제를 전시하기에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고, 잦은 이사 시에도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반면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가챠는 공간을 차지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취향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효율적인 선택이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2025년 1인 가구는 804만 가구를 기록했으며, 이 중 29세 이하는 17.8%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한 70세 이상(19.8%)과 큰 차이가 없다. 1인 가구 중 절반 이상이 연소득 3000만 원 미만이다. 좁은 방, 잦은 이사를 감당해야 하는 청년들에게 작고 저렴한 가챠는 가장 합리적인 ‘필코노미’ 소비템인 것이다.
이석 조교수는 지금의 2030세대를 두고 ‘무기력이 만성화된 세대’라고 말한다. 노력해도 자가를 마련하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 청년들은 크고 먼 보상 대신 지금의 확실한 보상을 선호하게 된 것이다. 이석 조교수는 “지금 청년들은 열심히 일해서 집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잃었다. 5000원 어치 더 노력해봤자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한다. 하지만 가챠는 5000원을 넣고 돌리면 적어도 5000원 어치 행복을 확실히 얻을 수 있다”라고 해석했다.
가챠의 시작은? 1970년대 일본의 ‘소확행’ 문화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왜 하필 ‘가챠’이며, 왜 일본 문화일까. 가챠는 1965년 일본의 길거리 벤딩 머신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초기에는 땅콩이나 껌 사이에 장난감을 섞어 파는 방식이었으나, 1977년 반다이(Bandai)가 ‘가챠폰(Gashapon)’ 상표를 내놓으며 지금의 형태가 갖춰졌다. 이후 1980년대 들어 만화나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도입되면서 가챠는 단순한 뽑기를 넘어 서브컬처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가챠는 일본 IP 비즈니스의 핵심 사업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의 인기가 높아지며 자연스레 가챠를 찾는 고객도 많아졌다. 2025년 6월 용산 아이파크몰에 오픈한 ‘도파민스테이션’만 봐도 일본 IP를 활용한 뽑기 숍, 피규어 숍이 즐비하다.
이 문화가 한국에서 인기를 얻게 된 배경에는 정서적 공감대가 있다. 이석 조교수는 “한국은 지금 1970~80년대 일본이 겪은 고도성장기 직후의 무기력을 답습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거창한 성취보다 일상의 사소한 기쁨에 집중했던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속 ‘소확행’의 개념을 시차를 두고 한국에 고스란히 옮겨온 셈이다.
이 조교수는 K-컬처와의 성격 차이에 주목한다. K-POP이나 K-게임은 여전히 1위를 향한 경쟁과 성취를 지향하지만, 일본 서브컬처는 ‘홀로 즐기는 덕질’이나 ‘경쟁 없이 함께하는 일상적 취미’를 기반으로 한다. 결과나 승패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즐거움을 주는 이러한 문화가, 치열한 경쟁에 피로감을 느끼는 한국 청년들에게 일상의 작은 쉼표로 자리 잡은 것이다.
2026년, 가챠 붐은 단순한 소비 트렌드가 아니다. 청년들에게 가챠는 잠시나마 확실한 보상을 느낄 수 있는 치유제다. 저렴한 돈으로 소소한 행복을 살 수 있다면 무엇이 나쁘랴. 다만, 이젠 자본이 이를 전략적으로 상품화하기 시작했다. 가챠 붐이 근 시일 내에 사그라들지 알 수 없지만, 그 이면에 깔린 청년 세대의 비애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글 김은빈 객원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