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21

아트선재센터를 뒤흔든 문제적 전시 ‘적군의 언어’ 관람 가이드 3

AI가 만든 아포칼립스에는 무엇이 남아있을까?

아트선재센터가 30년간 지켜온 질서가 사라졌다. 흙더미로 봉쇄된 출입구, 황폐하게 드러난 콘크리트 골조, 온도와 습도까지 제멋대로 흐르는 공기. 미술관을 하나의 조각이자 살아 있는 생태계로 전환하려는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의 실험은 전시 공간의 규칙을 다시 쓰는 데서 출발한다. 1995년, 미술관 터에 있는 집을 배경으로 장소 특정적 전시를 선보였던 아트선재센터다운, 그러나 그보다 열 척은 더 나아간 과감한 시도다. 

전시장에 처음 들어서면 마주하게 되는 지하 강당이다. 좌석이 비닐로 덮여져 있다. ©헤이팝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는 보존과 감상의 공간으로서 미술관이 지닌 역할을 잠시 멈추고, 인간과 비인간, 자연과 기계가 얽힌 혼종적 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요구한다. 미래의 유적처럼 보이는 조각들은 마치 다른 시간대에서 흘러온 파편처럼 곳곳에 자리하고, 관객은 그 틈을 지나며 익숙한 현실의 구조를 낯선 시선으로 다시 바라보게 된다. 이 거대한 시공간 실험은, 우리가 지금 어떤 세계의 끝자락에 서 있는지 조용히 되묻게 한다.

 

2025 프리즈·키아프 서울 기간에 맞춰 개막한 이번 전시는 전례 없는 규모와 아포칼립스를 연상케 하는 야생적인 비주얼로 입소문을 타고 있다. 주말이면 현장 예매 줄이 길게 늘어선다는 말도 심심찮게 들린다. 사전 정보 없이 관람하는 것도 좋지만, 전시를 더 흥미롭게 만들 포인트를 정리했다. 

전시명은 왜 ‘적군의 언어’일까

전시장에 있는 모든 텍스트는 읽을 수 없는 형태로 무너져 있다 ©헤이팝

작가가 말하는 ‘적군’은 전쟁의 상대가 아닌, 인간이 처음으로 마주하는 완전한 타자성을 뜻한다. 로하스는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언어와 상징 체계를 홀로 발명한 존재가 아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 등 다른 인류와 공존하면서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협력하며 진화했고, 그 낯설고 위협적인 접촉 속에서 상징적인 도구와 몸짓이 오갔다. 우리가 ‘언어’라고 부르는 체계는 바로 그러한 마찰의 역사에서 싹튼 셈이다.

미 항공우주국(NASA)의 인간형 로봇인 발키리를 변형한 조각. 손에 다비드 상을 쥐고 있다. 제공: 아트선재센터

인간의 사고 체계를 벗어난 존재, 인공지능이다. 우리는 이미 그들과 지식을 공유하며 공존을 넘어 의존의 단계로 들어섰지만, 동시에 그 관계가 인간성의 소멸을 준비하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 역시 떨칠 수 없다. 로하스는 그 모순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인공지능은 인간을 위협하는 타자이면서도, 우리가 스스로를 인식하게 만드는 새로운 거울일지 모른다는 점을. 따라서 ‘적군의 언어’는 단순히 위기감을 드러내는 제목이 아니다. 인간과 비인간, 지배와 협업, 생존의 역학을 다시 사유하도록 만드는, 피할 수 없는 존재와의 조우를 가리키는 말이다.

‘타임 엔진’에서 출발한 전시

전시 현장에서 촬영한 작가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제공: 아트선재센터

로하스의 조각은 인간이 창조한 조형이라기보다, 미지의 도구가 스스로 만들어낸 결과물에 가깝다. 그가 직접 개발한 ‘타임 엔진(Time Engine)’은 비디오 게임 엔진, 인공지능, 가상 세계 기술이 결합된 디지털 시뮬레이션 도구이다. 작가는 변화하는 생명체와 건축, 생태계, 사회·정치적 조건까지 뒤섞인 세계를 디지털 공간에 구축하고, 그곳에서 생성된 조각을 ‘다운로드’해 현실로 옮긴다.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상상의 종말 Ⅵ〉©헤이팝

타임 엔진이 받아들이는 입력값은 단순하지 않다. 기후 변화, 지각 운동, 수질의 pH, 광물의 퇴적 같은 물리적 데이터는 물론, 태양 복사량과 달의 주기 같은 천문학적 리듬도 함께 들어간다. 여기에 역사적 단절, 언어적 변이, 가상의 미래까지 통합된다. 중요한 건, 모든 데이터가 인간의 지각 방식으로는 해석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산이나 폭풍, 암석이나 지층 같은 요소들은 기계적 논리로 읽히고, ‘날씨’는 난류 벡터와 압력의 기울기로 ‘지질학’은 응력장과 심층 시간의 흐름으로 변환된다. 심지어 ‘신학’조차 신화나 교리가 아닌, 수 세기에 걸쳐 물질적 조건과 상호작용하는 ‘믿음의 패턴 시스템’으로 인식된다.

 

로하시는 타임엔진을 ‘인간 중심 시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만든 도구’라고 말한다. 전시 속 조각 하나하나가 인간의 손길과 기계의 논리, 비인간적 존재의 흔적이 뒤엉킨 복합체다. 아무렇게나 쌓여진 듯 보이는 흙과 그 위에 찍힌 발자국조차 정교한 연산의 결과물이다.

미술관 전체를 점유한 불분명한 세계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 전시장 전경 제공: 아트선재센터
디테일한 부분을 보는 재미가 있다 ©헤이팝

로하스는 전시를 준비하며 한 달 넘게 매일 아트선재센터를 찾았다. 관객, 큐레이터, 시설관리자, 청소팀, 배송 기사와 이웃들까지 공간을 이루는 모든 사람이 만들어내는 미세한 리듬이 건물 생태계를 구성한다고 보았다. 그는 그동안 켜켜이 쌓여 있던 흔적을 뒤집어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여는 데서 이번 작업을 시작했다. 

건물 전체가 전시장으로 기능한다 제공: 아트선재센터
화장실도 마찬가지다 ©헤이팝

이번 전시는 지하부터 출발해 전시장, 복도, 계단, 화장실까지 전관을 가로지른다. 공간이 ‘전시를 담는 그릇’이 아니라 전시 그 자체가 된 셈이다. 공간이 전시라고 선언되는 순간, 방치된 것은 의미를 갖기 시작하고, 잔여물은 에너지를 띠며, 건물 전체가 하나의 텍스트처럼 읽힌다. 로하스는 물리적 구조를 뜯어내는 데서 멈추지 않고, 온도와 습도 같은 환경 요소까지 바꾸었다. 인간 편의를 위한 조건을 멈추고, 그 안에 놓인 흙과 바위, 식물, 이끼, 곤충들이 살아갈 수 있는 장을 만들기 위해서다. 이 존재들은 단순한 장식 요소가 아니라, 공간을 끊임없이 변화시키는 ‘행위자’로 기능한다. 내가 본 풍경이 다음 사람이 보게 될 풍경과 같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 전시가 진행형 생태계와 가깝다는 점이 관람 경험을 입체적으로 만든다.

전시는 디지털 공허를 상징하는 체커보드 속 불로 마무리된다 제공: 아트선재센터

글·사진 김기수 기자

자료 제공 및 취재 협조 아트선재센터

프로젝트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
장소
아트선재센터
주소
서울 종로구 율곡로3길 87
일자
2025.09.03 - 2026.02.01
시간
화요일 - 일요일 12:00 - 18:00 (월요일 휴관)
주최
아트선재센터
기획자/디렉터
김선정(아트선재센터 예술감독), 조희현(아트선재센터 전시팀장)
참여작가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김기수
아름다운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믿는 음주가무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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