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일본 도쿄 신주쿠로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신주쿠에는 처음 가보았는데, 당시 방문한 공간들이 퍽 인상적이었습니다. 세월이 느껴지는 공간, 그로부터 비롯하는 기품, 그곳에서 일한다는 자부가 느껴지는 직원들, 여전히 그 장소를 일상적으로 누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 신주쿠라는 지역의 얼굴을 만드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친 공간 네 곳을 소개합니다. 도쿄 여행을 계획 중이라면 참고해 보세요.
1. 나카무라야 본점 지하 2층 Manna
신주쿠에는 나카무라야 빌딩이 있습니다. 나카무라야는 빵집으로 시작해 인도 커리 레스토랑, 디저트 숍으로 확장했고 레토르트 카레 등 가공식품도 생산하고 있습니다. 나카무라야가 신주쿠의 현재 위치에 자리 잡은 지는 115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곳은 일본에 인도 커리를 처음 소개한 곳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죠.
나카무라야 빌딩의 지하 2층에는 인도 커리를 맛볼 수 있는 레스토랑 ‘나카무라야 만나(Manna)’가 자리합니다. 이곳에서는 브랜드의 근간이 되는 메뉴인 인도 커리는 물론 간단한 주류와 차, 디저트까지 즐길 수 있어요. 커리가 맛있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공간이 편안하면서도 점잖았어요. 브랜드와 얽힌 그림이나 사진으로 장식한 벽면, 요란하지 않은 식기, 유니폼을 갖춰 입고 정중하게 손님을 맞는 직원, 아마도 오래도록 이곳을 아껴왔을 듯한 단골들의 모습이 좋았습니다.
‘무사시노관’은 1920년 개관한 영화관입니다. 1923년 관동 대지진 당시 피해를 입었지만 다음 달 영업을 재개했고 그 후 세계의 명작을 상영해 왔죠. 특히 작품성을 인정받은 해외 작품들이 이곳에서 빠르게 상영되었고요. 신주쿠의 혼잡한 거리, 무사시노 빌딩의 3층에 무사시노관이 있습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번잡한 바깥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입니다.
수차례 개보수를 거쳐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고 하는데, 공간에서는 오랜 역사는 물론 이곳을 꾸린 사람들이 얼마나 영화를 사랑하는지가 느껴졌습니다. 영화 〈노팅 힐〉(1999)의 주요 배경으로 등장하는 서점을 모티프로 한 굿즈숍, 손수 제작하고 꾸민 흔적이 역력한 영화 팝업 포토존, 팝콘과 생맥주부터 멜론소다 등 주전부리를 갖춘 스낵 코너까지, 마치 ‘영화 마을’에 온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기사를 쓰면서 극장 홈페이지를 확인하니, 현재 무사시노관에서는 영화감독 프란시스 F. 코폴라의 특집전이 열리고 있군요. 예술성을 인정받은 일본과 유럽의 영화들도 상영 중이고요. 세월이 흘러도 가치로운 작품, 작지만 분명히 빛나는 작품을 한결같이 소개하는 공간입니다. 영화를 좋아한다면 들러보세요, 이 공간에서 느껴지는 애정에 오래 머무르게 될 거예요.
신주쿠역과 이어지는 ‘타카노’ 본점. 1885년 과일 전문점으로 시작한 이 브랜드는 여전히 좋은 과일을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어요. 과일의 산지와 생산자에 주목하고, 과일을 활용해 다채로운 상품과 가공식품을 개발하거나 디저트 메뉴로 선보이죠.
본점의 지하 2층은 과일 파르페 바와 푸드&기프트 숍, 지하 1층은 과일 기프트 숍, 5층은 과일 카페로 운영되는데요. 저는 파르페 바에서 과일 파르페를 먹었습니다. 멜론과 딸기, 청포도, 자몽 등 알록달록한 과일과 셔벗, 아이스크림 등이 층층이 쌓인 파르페를 먹는 동안 셰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스스로 ‘과일을 알리는 전문가’라고 생각하며, 책임감을 갖고 다양하게 도전하고 있다고요. 전문가들의 섬세한 서비스와 훌륭한 과일을 만날 수 있는 공간입니다. 과일 쿠키나 잼, 차 등 포장 제품도 많으니 선물을 고를 때 둘러봐도 좋겠어요.
1927년 설립된 ‘키노쿠니야’는 서점이자 출판사입니다. 신주쿠에는 키노쿠니야의 본점이 있어요. 지하 1층부터 지상 8층까지의 규모이고 층별로 다른 장르와 성격의 책을 소개합니다. 이 소개를 들었을 때 상상한 바와 달리, 막상 공간에 들어서니 아늑했습니다. 낮은 천장이나 곳곳에 붙어 있는 손 글씨 홍보물 때문인지 오히려 아담하고 수수한 분위기예요.
잡지와 만화, 문학과 여행, 요리와 언어, 비즈니스와 과학 기술 등 수많은 장르의 책을 다루는데, 모든 층에 사람이 많아 인상 깊었습니다. 서점 한편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기념해 그의 작품을 모은 큐레이션 코너도 마련돼 있었고요.
이곳은 서점이면서 문화를 더욱 다채롭게 만드는 장이기도 합니다. 4층에 연극과 음악회, 뮤지컬 등이 열리는 홀이 있는 것은 그래서죠. 또 이 본사 빌딩은 1964년 지어졌는데요. 르코르뷔지에를 사사했고 일본 현대 건축에 영향을 미친 건축가 마에카와 쿠니오가 설계했습니다. 도시 환경과 어우러지는 건축물로서 가치가 높아 2017년에는 ‘도쿄도 선정 역사적 건축물’에 선정되었고요. 도시 건축에 관심이 있다면 또 다른 시각으로 이곳을 경험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