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9일 열린 제21회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실리카겔은 세 개의 상을 거머쥔다. 최우수 모던록 음반, 최우수 모던록 노래, 올해의 음악인 부문에서다. 2015년* 데뷔한 후 얼마 되지 않아 귀 밝은 이들의 눈에 띄었던 밴드는 여전히 음악성을 인정받는 동시에, 이제 콘서트를 단숨에 매진시키고 국내외 페스티벌 무대를 뛰노는 대형 밴드가 됐다. 많은 훌륭한 결과물이 그렇듯, 이들의 성장 혹은 성취 뒤에도 무수한 골몰과 시도, 행동과 복기의 시간이 있었을 테다.
* 데뷔 EP 〈새삼스레 들이켜본 무중력 사슴의 다섯가지 시각〉
김건재, 김춘추, 김한주, 최웅희 네 멤버는 하나의 팀을 꾸려가는 동시에 개인으로서 각기 다른 세계 역시 딴딴하게 일궈온 듯 보인다. 이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이 듣는 사람을 전혀 낯설기도, 언젠가 꿈꿔본 적 있는 것 같기도 한 장소로 끌고 가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저마다 고유한 세계를 지닌 이들이 따로 골몰하다가 함께 실행해 만든 것이 아니고서야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지난 12월 정규 2집 〈POWER ANDRE 99〉를 발매하며 한 챕터의 여정을 마친 밴드를 인터뷰했다. 네 사람은 커다란 결과물을 함께 만든 팀으로서,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개인으로서, 다른 창작자와 일하는 창작자로서의 이들을 가늠하게 하는 답변을 들려주었다.
상상 속 사과와 복숭아를 엮고 꿰기
— 지난 연말 정규 2집 〈POWER ANDRE 99〉를 발표했습니다. 오래 이어온 큰일을 끝마친 기분이 들 것 같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나요?
춘추 작년에 정말 바쁘게 지냈어요. 그래서 지금은 좀 리프레쉬하는 시간을 보내면서 다음에 어떤 것들을 만들고 시도할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한주 새해가 밝은 후로는 누가 굳이 부르지 않는 이상 집에서 아예 나가지 않고 있습니다. 새로운 곡들을 만들면서 개인적인 연구 시간을 갖고 미뤄뒀던 다른 프로젝트들에 힘을 쏟고 있어요.
건재 요즘엔 먹고 싶은 요리도 해 먹고, 쇼핑도 가고, 공부도 하고, 곡도 쓰고, 연습도 하는 등 충전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웅희 일 년 동안 달리다가 쉬니 가끔은 어색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못 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보이는 게 너무 많아 즐거운 요즘입니다.
— 지난해 실리카겔은 ‘머신보이’와 함께 산 느낌이 들 것 같기도 해요. 싱글 ‘Mercurial’ ‘Tik Tak Tok’, EP 〈Machine Boy〉 그리고 정규 앨범까지, 이 모든 과정을 애초에 함께 기획했어요?
춘추 2023년 이전부터, 정규 음반의 필요성에 대해 멤버들과 수시로 논의했어요. 어떤 형태로 ‘앨범’을 만들까? 하며 조금씩 이야기를 쌓다 보니 어느새 준비가 되어 있었어요. 2023년을 보내면서 싱글을 시작으로 앨범까지 확장되는 스토리나 실질적인 작업 프로세스가 자연스럽게 잡혔죠. 한순간에 계획과 스토리가 만들어졌다기보다는, 모두가 고민하고 있던 것과 상황이 자연스레 딱 겹쳐서 만들어진 프로젝트였다고 생각해요.
‘APEX’ 뮤직비디오. 감독: MELTMIRROR
— 하나의 세계관으로 싱글과 EP, 정규앨범이라는 결과물을 만들었습니다. 하나의 세계관 안에서 먼저 발표할 곡을 정한다든가, 어떤 곡끼리는 묶어서 EP를 만든다든가 하는 판단과 결정은 어떻게 하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한주 먼저 2집 발매에 대한 소구가 멤버들 안에서 발생했고, 그에 대한 제작 플랜을 소속사와 함께 설계하곤 했어요. 치밀한 계획하에 이뤄진 일처럼 보일 수 있지만, 어떤 부분들은 굉장히 즉흥적으로 연결되기도 해요. 구체적인 경우를 다 끄집어내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동료들과 다양한 의견을 교환하며 여러 가지 상황에 도달하곤 했습니다. 싱글에서 EP, 앨범까지 이어지는 확장은 멤버들과 소속사 스태프 간의 회의에서 정해진 계획이에요. 이 부분을 먼저 정하고 난 후 어떤 내용을 집어넣고 뺄지 고민하게 됐죠.
— ‘머신보이’라는 존재를 떠올린 이유는 무엇인가요? 음악을 만드는 데 어떠한 캐릭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이유가 있나요?
웅희 이번 앨범 〈POWER ANDRE 99〉를 준비하는 일 년 가까운 시간 동안 저희에게는 ‘들리는’, 혹은 ‘보여지는’ 빌드업의 대상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안 ‘머신보이’를 그 대상으로 상정하고 그가 어떤 이야기를 겪고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사건이 생기는지 상상하며 작업을 했습니다. 그 대상의 이름을 ‘POWER ANDRE 99’라고 가정했고, 앨범의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 이번 정규 앨범은 열여덟 곡으로 구성됐습니다. 곡마다 개성과 무드가 달라서, 앨범을 듣는 동안 취향이 별나면서도 원하는 바가 확실한 사람의 집을 돌아다니는 기분이 들었어요. 언뜻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물건들로 채워져 있는데, 결국 ‘한 사람’의 집인 건 확연하게 느낄 수 있는 집이랄까요…. 쓰인 악기도, 소리도, 개성도 다 다른 곡들이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건재 최근 저희의 작업 방식이라든가 대화 방식, 놀이 방식 등 많은 요소를 한데 놓고 이것저것 회고해보는 시간을 종종 가졌는데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사과를 생각했고, 대화할 때 사과라고 이야긴 안 합니다. 그러면 이야기를 듣는 누군가는 그걸 복숭아라고 생각했는데요, 자기가 복숭아라고 화답하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그걸 듣고 있던 또 다른 이는 바나나를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바나나가 아니라 파인애플인가? 하고 상상하며 대화에 참여합니다. 우리는 ‘특정한 과일’이라는 것에 대해 합의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대화를 했네요. 뭐 그러다 가끔 ‘아니 나는 사과인 줄 알고 했는데, 하고 보니까 이게 뭐야 브로콜리잖아!’ 하는 결과물들이 나올 때도 있었던 것 같아요. 이런 과정과 더불어 소리와 음으로 된 복합적인 공정이 추가됐고요. 이것이 아마 질문에 대한 미약한 답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 이 앨범을 통해서 만들고 싶었거나 전하고 싶은 단 하나의 소리나 이미지가 있었다면 무엇인가요?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서 어떤 부분에 공을 들였는지도 듣고 싶어요.
춘추 저는 성장한 실리카겔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가장 컸던 것 같아요. 음악적으로도, 기술적으로도, 표현 면에서도… 여러 가지로 말이죠. 제가 원래 할 수 있었던 영역에서는 더 진지해졌어요. 성숙한 사운드로 음악을 전달하고 싶어서 사운드적인 표현에 있어 깊이 고민하는 일에 시간을 썼습니다.
한주 하나를 굳이 정해야 한다면 양가성이라 할 수 있겠네요. 메커니즘과 휴머니즘의 양가성, 희-비극적 양가성, 자기혐오와 인류애적인 양가성까지도 포함한 복잡한 이미지가 〈POWER ANDRE 99〉의 기관들을 구성하는 느낌이랄까요?
건재 ‘우리가 들었던, 듣고 자랐던 소리들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충분히 우리의 세대에서도 노력하고 연구하면 좋은 소리를 기록할 수 있다’라는 명제를 상기하며 작업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녹음할 때 그 당시 제가 담을 수 있었던 최고의 것을 담으려 공들였어요. 소리와 음악이라는 구성에 경계를 만들어 세우지 않으려고 머리를 자주 환기했습니다.
웅희 저의 경우 ‘Ryudejakeiru’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하면서 일 년 가까운 시간동안 펼쳐놨던 POWER ANDRE 99의 이야기를 끝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Ryudejakeiru’ 뮤직비디오를 보면 제가 만든 종말의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Ryudejakeiru’ 뮤직비디오. 감독: 최웅희
관객이 모르는 곡만 흐르는 콘서트
— 지난 11월 블루스퀘어에서 진행한 콘서트 ‘POWER ANDRE 99’는 아직 발표하지 않은 앨범의 곡들을 미리 공개하는 콘셉트였죠. 관객들이 전혀 모르는 곡을 들려주는 방식의 공연을 하자고 어떻게 마음먹게 됐어요?
춘추 미발표곡을 무대에 올리는 것 자체가 매우 기대되고 짜릿한 경험이라고 생각했어요. 관객분들이 어떻게 들을지도 궁금했고요. 단독 공연은 페스티벌 등 다른 성격의 공연에 비해서 좀 더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분들이 찾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조금 더 ‘실리카겔이 들려주고 싶은’ 방식으로 공연을 꾸려 봤죠. 반응은 너무 좋았어요. 콘서트 당시 음반의 후반부 작업을 진행 중이었는데, 콘서트를 통해 실릴 곡에 대해 좀 더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 당시 콘서트가 시각과 청각을 모두 만족했다는 관객들의 소감이 많았습니다. 공연 연출이나 비주얼 면에서 특히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요?
한주 앞서 언급된 ‘확장’이라는 키워드가 중요하게 작용했어요. 4월에는 ‘Machine Boy’라는 이름의 콘서트를 예스24라이브홀에서 진행했는데요. 4월 콘서트의 비주얼을 11월 콘서트에도 다시 가져와 확장한다는 의도를 중심으로 다양한 디자인이 이뤄졌습니다. 이 부분에 있어 조명/VJing 홍찬혁 감독님과 함께하는 팀 노드가 여러 가지 요소를 잘 구현해 주셨어요. ‘확장’이라는 키워드가 성공적으로 반영되려면 확장 이전의 맥락에 대한 인지가 당연히 중요할 텐데, 팀 노드는 저희와 여러 번 호흡을 맞췄던 터라 괜찮은 화학작용을 일으키지 않았나 싶어요. 이것을 포함해 공연 전반적인 부분을 컨트롤해 주신 김재웅 PD님도 정말 결정적인 역할을 하셨고요.
— 실리카겔은 그 시작부터 음악과 시각 요소를 긴밀하게 연결해 왔다고 느낍니다. 앨범 커버나 뮤직비디오에서 확실하게 느낄 수 있어요. 음악과 비주얼 요소가 어떤 관계라고 생각하나요?
웅희 실리카겔은 정규 1집의 ‘9’라는 곡부터 시작해 멜트미러(MELTMIRROR) 감독님과 오랫동안 뮤직비디오 작업을 해왔습니다. 한 작업자와 오래 이야기하고 공유해 온 느낌이 쌓였기 때문에, 멜트미러가 만든 세계가 우리 비디오의 키 비주얼이 된 것 같아요. 최근엔 저희끼리 멜트미러님이 만든 세계의 연장선을 만들어 보기도 하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작업한 디렉터마다 조금씩 다른 느낌을 찾아보는 것도 감상하는 데 즐거운 포인트가 될 것 같습니다.
‘9’ 뮤직비디오. 감독: MELTMIRROR
믿으며 주고받을 때 탄생하는 것
— 멜트미러 감독, 디자인 스튜디오 슈퍼샐러드스터프, 하태민 사진가 등 개별 창작자부터 할로미늄, 산산기어 등 패션 브랜드까지, 실리카겔과 합을 맞추는 이들이 선명히 떠오릅니다. 같은 파트너와의 작업물이 하나둘 쌓이다 보면, 음악이나 영상, 사진 같은 단어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창작물을 함께 키워 나가는 느낌이 들 것 같습니다.
건재 다른 부분은 확실히 말씀드리기 어려워도, 이거 하나는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저희는 일단 작업자들에게 의뢰(?)를 할 때, 그들에 대한 존경과 존중, 거기에서 비롯한 신뢰를 굉장히 두터운 양의 기본값으로 끌고 가는 경향이 있어요. 그러면서 은근히 기대도 하게 되는 거죠. 이를테면 ‘히히, 어떤 장면이나 작업을 가져와 생각할 거리를 잔뜩 가져다주실까?’ 같은 기대를요. 저희가 인복이 많아서 매번 뛰어난 작업자들께 신세 지고 있습니다.
— 협업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나요?
건재 굳이 프로세스를 짚어 보자면, 구체적인 작업의뢰서를 규정해 드리는 방식은 아닌 것 같고…. ‘이런 걸 하고 싶다’라고 정리해서 협업하는 분께 전달해 드리면, 그분들은 어떤 작업물과 의견으로 화답해 주십니다. 그 후 저희는 아주 작은 수정이나 설명을 부탁드리게 되고요. 저희의 요구에 대해 작업자분들이 알맞게 설명해 주실 때도 있고, 더 말할 필요도 없이 구현해 주실 때도 있어요. 그렇게 오가다 보면 작업이 완료됩니다. 여타 세상의 많은 일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마도 함께하는 분에 대한 존경심이 좀 더 진하게 내재해 있다는 게 실리카겔 협업의 작은 특징이 될 수도 있을까 싶네요.
— 앨범 커버 아트가 언제나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음악에 앞서 앨범 커버를 만나는 분도 있을 거예요. 협업하는 작가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한주 〈POWER ANDRE 99〉를 포함하여 최근의 커버아트 작업을 함께한 작가는 Daylen Seu라는 분이에요. Oneohtrix Point Never의 ‘The Station’ 뮤직비디오를 작업한 비디오그래퍼로서 저에게 아주 좋은 충격을 줬어요. 이 사람과 작업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정말 그보다 기쁜 일이 없겠다 싶었는데, ‘Kyo181’ 작업 당시 실리카겔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팅을 도와준 한다솜 씨가 소개해줄 수 있다고 하여 덥석 물었죠. 그 후로 다양한 작업을 의뢰하고 있고요. 작가가 미국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서 실제로 만난 적은 없어요. Daylen Seu의 작품을 기반으로 하여 CD를 제작한다거나 디자인적 터치가 필요할 일을 할 때는 디자이너 정다혜 씨가 힘을 써주시고 있고요.
— 정규 2집을 발매한 후 온라인에 오픈 게시판을 열었어요. 팬들과 청자들이 앨범과 음악에 관해 자유로이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장이더군요. 또 ‘NO PAIN’을 발매했을 땐 작업 과정과 악보 등을 공개한 노션 페이지를 나누기도 했죠. 오프라인에 머무는 시간만큼, 온라인 세상에 머무는 시간이 긴 시대를 퍽 긍정적이고 근사한 방식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창작물에 타인의 해석이 덧붙여지는 것, 그래서 무언가 새로운 것이 탄생하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또 이렇게 탄생하는 것이나 타인의 해석이 실리카겔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치나요?
웅희 저의 경우 음악이나 영화, 전시, 책 등을 접하면 일단 제 경험을 일차적으로 투영시키는 것 같아요. 저희 음악을 듣는 분들도 이러한 과정을 즐기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창작자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접하기 전에, 여러 가지 일을 거치면서 느낄 수 있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하거든요. 이번 앨범의 ‘Ryudejakeiru’ 뮤직비디오를 연출하면서 느꼈어요. 제가 보여드리고 싶은 서사와 디테일이 분명히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해석을 접하는 일이 그보다 더 즐거울 때도 있었습니다. 여러 사람의 해석을 접하다 보면 심지어 함께 만들어가는 느낌도 들어요. 저희끼리 만들 때보다 흥미로운 작업이 되기도 하죠.
돛을 올리고 바다로
— 2015년 첫 앨범을 내놓은 후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어요. 창작자로서 불안하거나 스스로 의심하게 될 때가 있었다면 그 시기를 어떻게 보내려 했나요? 혹은 유지하고자 하는 태도나 마음이 있다면 들려주어도 좋고요.
춘추 그런 생각조차 할 겨를이 없는 시간을 보내왔던 것 같아요. 어쩌면 지금이 그런 시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까 여러 가지로 시도해 보고 있는 과정 속에 있습니다!
한주 사실 힘들어도 꾸역꾸역 해내려는 성격이라 별다른 노하우는 없어요. 다만 스스로에게 무책임한 강요를 하기보다는 상황을 진보시키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의지가 중요한 점이라 생각합니다. 유지하고 싶은 태도나 마음… 여러 가지가 너무 많지만, 간혹 지키려는 의지가 시야를 좁게 만드는 듯한 기분을 들게 할 때도 있기에 무어라 콕 집어내긴 어렵네요. 웃기게도 이조차 양가적인 지점에 놓여있습니다.
건재 스스로 잃을 게 많은 위치라고 생각지 않아서…. 대단한 위인이라거나 발명가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거든요. 그래서 불안한 감정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그냥 작품을 만들 때는 별다른 잡생각 없이 작품을 만드는 것에 초점을 둡니다.
웅희 이번 앨범의 경우 들어오는 정보와 만들어야 하는 정보가 뒤섞여서 좀 힘들었던 것 같아요. 힘들수록 태풍의 눈으로 들어가는 선택을 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태풍의 눈으로 강제로 들어감 당했습니다.
— 요즘은 무얼 듣거나 보거나 읽나요? 관심사나 취미, 혹은 일하지 않는 시간에 하는 일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춘추 대부분의 시간을 음악과 스튜디오 관련한 정비나 관리를 하는 데 쏟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특별히 일하지 않는 시간이라고 하면 그냥 정말로 누워 있거나, 말 그대로 휴식만 하는 편이에요. 조금 마음이 편해지면 게임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한주 최근 뮤지션 김도언 씨와 함께 철학 관련 강의를 수강 중이에요. 주 1회 텍스트 중심으로 진행되는데, 매우 재밌기도 하고 큰 영감을 얻고 있어요. 어떤 내용인지 구체적으로 밝히긴 어렵지만 도언 씨의 제안으로 평소에 흥미를 품고 있던 주제를 탐구하게 됐습니다. 그 외에는 사실 작업하는 시간이 주를 이루는데, 틈을 내어 게임 〈젤다의 전설: 왕국의 눈물〉을 플레이하고 있어요. 아름답고 자유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게임….
건재 최근 닌텐도 게임 〈피크민4〉를 구입해서 종종 재밌게 하고 있고요. 올해 들어 독서에 다시 관심이 많이 돌아와서, 곡을 쓰거나 연습하는 시간, 자기 전 잠깐 닌텐도 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독서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근래엔 죽음이라는 주제가 점차 여러 부분에 미치는 파장에 대한 책을 여러 번 읽고 있어요. 한동안 독서를 안 했더니 한두 번 읽어서는 맛을 다 못 느끼고 있거든요. (웃음)
웅희 요즘은 축구팀 토트넘 홋스퍼(Tottenham Hotspur), 호주 밴드 킹 기저드 & 더 리저드 위저드(King Gizzard & the Lizard Wizard), 그들만이 내 안에 있습니다. 일요일 아침엔 조기축구를 나갑니다.
— 〈POWER ANDRE 99〉로 하나의 긴 여정을 마쳤습니다. 실리카겔이 어떤 방향으로 걸어 나갈지, 어떤 소리와 이야기를 가져올지 궁금해요. 지금으로서 해줄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면요.
춘추 매번 2023년도가 ‘머신보이의 해’라고 생각하고 이야기해 왔는데요. 정규 음반으로 멋지게 마무리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또 다른 흥밋거리와 사운드, 이야깃거리를 찾아서 부지런히 작업해 보려고 해요.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이 나오는 것에 대해서도 무척 열려 있고요. 또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형태로 공연을 만들지도 모르겠고요. 지금은 계속해서 프로토타입들을 만들어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인 것 같습니다. 저희 자신도 어떤 이야기를 하게 될지 기대하고 있어요!
— 6월엔 스페인에서 열리는 프리마베라 페스티벌 무대에 오르죠. 올해는 실리카겔에게 매우 바쁜 해가 될 것 같아요.
춘추 사실은 ‘Kyo181’ 발매 전부터 해외라는 새로운 바다로 나가서 실리카겔 역량의 한계를 좀 더 넓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에는 코로나19 상황 때문에 힘들었지만, 그 상황이 국내 활동에 더 집중하는 계기가 되었기에 지금처럼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저는 처음부터 해외에서의 공연을 정말 기대했고, 국외 여러 아티스트들과 관계도 더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컸거든요. 조금씩 생겨나는 해외 일정을 멋지게 수행해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한주 2024년 실리카겔은 한층 더 즐겁고 자유로웠으면 좋겠어요. 다양한 경험이 쌓이며 거대한 세상보다는 주변인에 대한 소중함을 더욱 깨닫게 되는데, 멤버를 포함한 모든 동료, 그와 연결된 사람들까지 안녕한 해가 되길.
건재 2024년에는 시기나 공간을 떠나 제가 있는 그 자리에서 고유한 건강함을 내뿜어주고 싶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웅희 말씀하신 대로 올해는 해외에서 우리를 더 알리고 싶다는 꿈이 있습니다. 작년에 생긴 꿈인데 올해는 시작하고 싶은 용기가 생겼습니다.
* 기사의 제목에 쓰인 ‘백만 가지 재앙 속에서도 성실하게’는 실리카겔의 곡 ‘Ryudejakeiru’의 노랫말에서 빌려왔습니다.
글 김유영 기자
자료 제공 매직스트로베리사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