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해도 소용없어〉는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을 맞아 작년 5월 론칭 후 올해까지 2년째 진행 중인 캠페인이다. 댄스팀 라치카, 뮤지션 핫펠트 등 익숙한 얼굴은 물론 은초비 커플, 채널 김철수 등 인기 유튜버에 이르는 여러 인물이 함께한 캠페인은 군더더기 없이 가뿐하게 멋지다. 다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출연해 존재를 미워해 봤자 소용없다는 사실을 예사롭게 말한다. 그 모습은 소용없는 일에,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에 왜 그렇게 열심이냐고 묻는 듯 보이기도 한다.
자신이 자신임을 앎으로써 품게 되는 마음, 자긍심(pride). 자긍심의 달(pride month)인 6월 어느 날, 〈미워해도 소용없어〉 캠페인을 기획하고 진행한 홍다예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커뮤니케이터를 만났다. 그 시작부터 올해 다시 이 캠페인을 진행한 이유, 유쾌하고 산뜻한 디자인을 구축한 과정을 물었다. 영상 관련 디자인에 대해서는 조정묵 담롱 PD가 대답했다.
* “미워해도 소용없어, 그러니까 사랑을 해 봐!”라는 제목은 올해 캠페인에 참여한 인권 동아리 무운 멤버의 말에서 빌려왔다.
*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 5월 17일, IDAHOBIT(International Day Against Homophobia, Transphobia and Biphobia의 준말). 1990년 5월 17일 세계보건기구는 국제질병분류를 개정하며 동성애를 정신장애 부문에서 삭제하고 ‘성적 지향만으로는 장애로 간주되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전 세계 LGBTI 커뮤니티는 이를 기념해 5월 17일을 혐오반대의 날로 정하고 현재까지 기념하고 있다. 출처: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홈페이지
Interview with 홍다예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인권교육 커뮤니케이터
1. 이게 멋진 거야!
— 이 캠페인을 기획하게 된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했나요?
재작년 5월에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에 합류했어요. 5월 17일이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이잖아요. 회사에서 관련 캠페인을 진행하는 모습을 보고 내년에는 꼭 내가 이 사업을 맡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이 사업을 마킹하고 싶은 마음을 지속적으로 어필해서 기회를 얻었죠. 캠페인을 시작하면서 무엇보다 당사자 중심적으로, 쉬운 언어로 해 보자고 마음먹었어요. 인권단체에서 내는 메시지들이 의미 있고 좋지만, 가끔 너무나 인권단체 내에서만 통용되는 언어를 사용해서 당사자에게 가 닿지 못할 때가 있다고 느꼈거든요. 전문적이거나 학술적인 용어보다는 편하고 쉬운 언어로 다가가려고 했어요.
— 그래서 영상 중심의 콘텐츠가 된 거군요.
‘인권은 무엇일까요?’ 하고 설명하는 일방향 정보성 콘텐츠보다는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었어요. 성소수자는 어떻고, 앨라이는 어떻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나이키 광고처럼 각인되고 싶었죠. 이게 힙한 거고 멋진 거라는 걸 자연스레 알릴 수 있는 콘텐츠를 구상했어요. 물론 그게 다가 아니니 누군가는 깊이가 없다고 아쉬워할 수 있겠지만, 이 캠페인의 타깃은 명확했어요. 성소수자 당사자, 그리고 적극적으로 혐오하는 이들과 적극적으로 인권 운동에 참여하는 이들 사이에 있는 사람들이요. ‘이게 도덕적인 거야, 인권적인 거야’까지도 가지 말자, ‘이게 멋진 거야!’, 그것만 딱 말하자고 생각했고 그러기 위해서 많은 걸 내려놓으려고 노력했습니다.
▲ 미워해도 소용없어 2023 첫 공개 영상
“‘이게 도덕적인 거야, 인권적인 거야’까지도 가지 말자, ‘이게 멋진 거야!’,
그것만 딱 말하자고 생각했고 그러기 위해서 많은 걸 내려놓으려고 노력했습니다.”
— 청소년 성소수자를 응원하고 연대하는 캠페인이에요. 국제앰네스티는 법 개정부터 정부나 기업의 변화를 촉구하는 서명 운동 등 강한 목소리를 내는 활동을 여럿 해 왔죠. 그와 비교하면 결이 사뭇 다른 이번 캠페인을 진행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내부에서도 응원과 연대에 방점을 둔 이 캠페인을 시작하기 전 여러 질문과 논의가 오갔어요. 응원이 실질적인 힘을 가질 수 있을지에 관한 의문도 있었고요. 혐오와 차별에 노출된 성소수자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집회, 시위 등에 참여하는 일과 또 다른 의미가 있을 거라고 봤어요. 성소수자 당사자가 스스로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는 ‘감각’을 만드는 일에 보탬이 되리라는 거였죠. 또 캠페인의 핵심이 ‘청소년 성소수자를 응원하고 연대한다’잖아요. ‘청소년’을 붙이기까지도 고민을 많이 했어요. 청소년에 국한하지 않고 성소수자 전부를 포괄하고 싶었거든요.
— 그럼에도 ‘청소년’을 붙이기로 결정했어요. 그렇게 결정한 이유는요.
모두의 얘기는 어쩌면 누구의 얘기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타깃을 좀 더 좁게 가져가야겠다고 마음먹었죠. 청소년이라는 말을 붙이더라도, 모두를 포괄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기도 했고요. 누구나 어린 시절, 청소년기는 다 거치잖아요. 지금 비청소년이더라도, 청소년기는 거쳤을 테니까요. 청소년기에는 혐오의 말, 날 선 말들이 더 날카롭게 다가오기도 해요. 완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를 갖고 있는 누구에게나 이 메시지가 다가가기를 바랐어요.
2. 더 짧게, 좀 더 짧게
— ‘미워해도 소용없어’라는 캠페인 이름이자 구호가 무척 강렬해요. 듣자마자 각인돼 잊히지 않는데요. 이 문구는 어떻게 정했나요?
문구는 캠페인을 함께하는 영상팀 ‘담롱’에서 아이디에이션을 해 주셨어요. 제가 영상을 제작하고 편집하기는 어려우니 영상팀을 찾는 작업이 먼저였어요. 예쁘고 멋지게 영상을 만드는 스킬을 갖췄을 뿐 아니라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있고 캠페인의 취지에 공감하는 팀을 찾아야 했죠. 담롱은 관련 콘텐츠를 많이 만든 팀이었어요.
— 담롱에게 어떤 문구였으면 좋겠다고 설명했어요?
우선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을 맞아 캠페인 영상을 만들 거고, 인권단체가 만들었다고 바로 알아채기 어려운 느낌으로 제작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혐오에 반대하는 메시지는 또렷하게 담되, 주체적이고 당당하고 능동적인 구호였으면 좋겠다고요.
— ‘미워해도 소용없어’가 탄생하기 전에 다른 후보도 있었나요?
처음에 담롱에서는 ‘너의 혐오가 우리의 연대를 이길 수 없어’를 떠올렸는데, 이걸 좀 더 짧은 말에 응축하려고 하셨대요. 저도 계속 말씀드렸던 게, 인권의 언어는 너무 길고 혐오의 언어는 너무 짧다는 거였어요. 짧고 자극적인 혐오의 언어는 인터넷에서 바이럴되기가 참 쉽다고요. 인권에 대해 말하려면 이런저런 설명이 더해지다 보니 튕겨 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요. 자극적이고 원색적인 혐오의 말 한마디는 사람들에게 오래 남으니까, 그에 대항할 인권적 언어를 만들고 싶다고 요청했어요. 그래서 ‘미워한다고 우리가 바뀔 수 없어’로 갔다가, 더 짧게는 안 될까? 해서 마침내 ‘미워해도 소용없어’가 탄생했어요.
— 이 캠페인의 시작은 작년이에요. 작년에 이어서 다시 이 캠페인을 진행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작년엔 처음이다 보니 아쉬운 점이 아주 많았어요. 정말 열심히 했고 LGBTI 커뮤니티 안에서 회자되기도 했지만,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죠. 이 메시지가 더 널리 퍼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지난해엔 캠페인 영상을 열두 개 만들었는데, 그걸 다 보신 분은 많지 않다고 느껴졌어요. 그래서 이번엔 영상 개수를 줄이되, 더 많은 분이 영상을 보게 되기를 바랐어요. 더 많은 성소수자 당사자에게 가 닿는 것은 물론이고, 더 많은 앨라이를 만들어 내고 싶었죠. ‘미워해도 소용없어’라는 문구 외에, 각 영상에 담긴 개별의 메시지도 전달하겠다는 욕심이 있었습니다.
— 그런 욕심을 현실화하기 위해서 어떤 부분을 바꿨나요?
우선 영상을 더 많은 사람이 보게 하기 위해서, 모든 영상이 공개된 후에 오프라인 상영회를 열었어요. 실내에서 열리는 미니 퀴퍼 콘셉트로 10여 개 대학의 성소수자 동아리와 함께 무지갯빛 공간을 구성하고 부스도 운영했어요. 함께 영상을 보고, 그 영상 속 메시지를 영상 밖으로도 확장하는 경험을 할 수 있게끔요. 또 작년 캠페인 영상들이 ‘사실 힘든 때가 있었지만, 그 시간을 잘 견뎌내다 보니까 지금은 좋아’라는 내러티브를 갖고 있었다면, 올해는 굳이 힘든 걸 말하지 않는 방향으로 설정했어요. 긍정적이고 멋지고 당당한 모습에 포커스를 두기로 했죠. 영상용 인터뷰를 준비할 때도 힘들었던 점에 관한 질문은 다 없앴어요.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 내가 행복한 이유처럼 현재에 집중하는 메시지를 담았습니다.
— 지난해엔 드래그 아티스트 지반, 변호사 장서연, 댄스팀 라치카와 뮤지션 핫펠트 등이 영상에 등장했어요. 올해는 인권 동아리 무운, 유튜버 굴러라 구르님, 댄서 조나 아키 등의 모습이 보이고요. 전체 출연진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중요하게 여긴 점은 무엇인가요.
작년과 올해 섭외 기준은 유사했어요. 다양한 인물상을 담고 싶었습니다. 이를테면 MTF(Male to Female) 트랜스젠더가 미디어에 비교적 더 노출되고 있으니, 이번 영상에는 FTM(Female to Male) 트랜스젠더를 섭외하려고 했다든지, 게이 커플이 등장했다면 레즈비언 커플도 담는다든지 하는 식으로요. 또 레즈비언이나 게이보다는 덜 가시화된 무성애자나 논바이너리 등 다양한 정체성을 두루 담고 싶었으나 여러 한계로 이번엔 이루지 못했어요.
3. 유쾌하고 단단한 디자인
— 이 캠페인을 맡았을 때 어떤 디자인 콘셉트를 떠올렸나요?
조정묵 담롱 PD(이하 조정묵 PD) 캠페인 슬로건을 만들 때 생각했던 걸 최대한 반영하려 했어요. 당차고 자긍심이 느껴지는 이미지를 우선 고려했죠. 영상의 톤은 스포츠 브랜드의 캠페인 영상을 많이 참고했어요. 짧은 호흡과 강렬한 슬로건으로 단단한 이야기를 전하는 데는 그 장르가 최고라고 생각했거든요. 인권 캠페인 하면 떠오르는 익숙한 이미지를 깨고 최대한 대중적인 톤으로 다가가고자 했습니다.
—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포인트는 ‘미워해도 소용없어’라는 슬로건의 타이포그래피예요. 통통 튀는 기운이 느껴지는 서체인데요, 이 서체를 어떻게 선택하게 되었어요?
조정묵 PD 저희가 직접 디자인한 서체는 아니고 ‘310 푸하하’라는 폰트의 라이센스를 구매 후 변형해 사용했어요. 볼드하면서도 유니한 산세리프 계열 서체를 찾으려 했어요. 또 앰네스티의 브랜드 컬러와 어울려야 했고요. TLab 트리플엑스, 위폰트 블록버스터 라운드 등의 서체도 고려해 봤지만 결국 310 푸하하로 빠르게 확정했어요. 산세리프인데도 곡선이 많이 쓰여 부드러운 느낌이 들었고, 같은 모음과 자음이어도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형태가 달라지도록 디자인된 점이 만족스러웠어요. 단단한 이미지를 주면서도 아주 무겁지는 않고 유니크한 개성이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고요. 원래 폰트엔 ‘이응(ㅇ)’의 중심이 ‘*’ 모양으로 뚫려 있는데, 이 부분만 수정해 타이틀 로고를 완성했습니다. 의도한 분위기가 났다니 다행이네요. 캠페인을 제작할 때만 해도 이 서체를 찾아보기 힘들었던 것 같은데, 요즘엔 정말 여기저기서 눈에 띄더라고요. 〈미워해도 소용없어〉 영향일까? 하며 동료들과 장난스레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 캠페인 영상 속에 등장하는 텍스트의 서체도 인상 깊어요. 지난해와 올해 영상에 쓰인 서체가 확연히 다르기도 하고요. 지난해엔 좀 더 유연하고 흐르는 느낌의 서체였다면, 올해는 보다 각지고 힘찬 느낌이 드는 서체가 쓰였어요.
조정묵 PD 올해는 더 당당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하고자 했어요. 작년 캠페인의 여러 영상이 공통으로 다룬 이야기가 ‘남들과 달라서 겪었던 어린 시절의 경험과 극복 방법’이었어요. 청소년 성소수자를 타깃으로 하는 만큼, 청소년기의 경험, 그로부터 비롯된 상처를 어떻게 극복했거나 안고 살아가는지에 좀 더 무게가 실려 있었죠. 올해의 목표는 달랐어요.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혐오에 저항하며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지금 나 자신이 가장 나다울 수 있는 장소, 시간, 그리고 함께하면 나다울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죠. 현재의 나에 대해 말하는 영상이기에 조금 더 단단하고 힘찬 방식을 선택하고 싶었습니다. 이러한 의도가 영상의 톤과 호흡은 물론 디자인에도 반영되었어요.
— 올해 영상 캠페인의 레퍼런스가 아이돌 그룹 아이브의 ‘썸머 필름’이었다고요.
올해는 출연진 개개인이 삶에서 느끼는 행복과 자부심에 초점을 맞춰 영상 메인 플롯을 구성하려 했어요. 레퍼런스의 영상처럼 초여름 햇살 같은 초록빛의 생기 있는 분위기를 연출하고자 야외나 자연광이 잘 드는 곳에서 주로 촬영을 진행했습니다. 밝은 분위기 속에서 출연진 각각의 이야기가 연결되도록 초기 기획을 짰고요. 영상 썸네일이나 SNS에 업로드된 이미지에도 초록 색감이나 자연의 빛, 밝은 조명을 확인할 수 있을 거예요. 퀴어들의 이야기가 더 이상 무겁거나 우울하게 조명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생명력 있는 여름을 설레며 환영하는 기분으로 영상을 제작했습니다.
— 〈미워해도 소용없어〉 캠페인 영상을 보고 또 인상적이었던 건 시청자 반응이에요. 스팸 댓글이 거의 없고 경험을 공유하거나 연대하는 댓글이 많았어요.
이 캠페인 영상 댓글은 정말 강하게 모니터링하고 있어요. 힘을 얻으려고 영상을 보러 왔다가 댓글을 읽고 상처받으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작년 5월 17일을 시작으로 6월 초까지 영상이 차례로 공개됐는데, 7월까지 거의 잠을 안 자고 24시간 모니터링했어요. 이 안에서는 무조건 응원만 있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어요. 영상을 만들었으니 끝, 하는 게 아니라, 이 영상이 있는 공간에서는 무조건 응원만 받도록 하는 것까지가 이 캠페인의 역할이에요. 영상을 끄고 나면 또 혐오와 차별을 마주하게 될 수 있는데, 이 영상을 볼 때만큼은 절대 안 된다고 의지를 다잡았죠. 마음이 약해져 있거나 혼란스러운 시기에는 힘이 되는 말이 100개여도 딱 하나의 혐오 댓글만으로 괴로울 수 있으니까요.
— 부채, 타투 스티커, 리본 등 다양한 굿즈에 캠페인 디자인을 입혔습니다. 어떤 물건들을 굿즈로 만들려고 했어요?
퀴어문화축제를 염두에 두고 만들었던 굿즈들이어서 날씨와 확산성을 고려했어요. 더운 날씨에 열리니까 부채가 실용적일 거라 생각했고, 타투 스티커와 리본은 널리 확산될 수 있을 것 같았죠. 타투 스티커를 몸에 붙이거나 부채를 들고 혐오세력 앞을 지나고 지하철을 타는 모습이 누군가에겐 위안이 되었나 봐요. ‘용기가 부족해서 퀴퍼엔 못 갔지만, 지하철에서 누군가 ‘미워해도 소용없어’라고 쓰인 부채를 든 모습을 보고 힘을 얻었다’라는 말씀을 들었거든요. 어떤 가치를 물성화하는 일이, 단순히 물건을 만드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용기가 부족해서 퀴퍼엔 못 갔지만, 지하철에서 누군가 ‘미워해도 소용없어’라고 쓰인 부채를 든 모습을 보고 힘을 얻었다’라는 말씀을 들었거든요.
어떤 가치를 물성화하는 일이, 단순히 물건을 만드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4. 목소리를 가진 콘텐츠 만들기
— 분명한 메시지를 콘텐츠로 만드는 일을 진행한 셈입니다. 사회적인 목소리를 콘텐츠화할 때 어떤 점에 신경 썼나요? 이를 현명하게 풀어내는 방식이나 노하우가 있다면요.
늘 전하고 싶은 말도 전하고 싶은 정보도 너무 많아요. 많은 이야기를 하려 할수록 널리 가닿기 어려운가 싶어서, 이번엔 내려놓으려고 정말 애썼어요. 굉장히 깊이 있는 이야기도 많이 하고 싶었지만요. 이 캠페인에 깊이가 부족하다고 아쉬워하는 분이 계실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그분들은 이미 인권 옹호 활동을 잘하고 계신 분들일 거예요. 〈미워해도 소용없어〉 캠페인으로는 아직 가치관을 정립하지 않은 분들이 이 메시지에 동감하게 되길 바랐어요. 쉽고 자극적인 혐오의 언어에 노출돼 그 영향을 받을 수도 있는 분들 중 한 분이라도 이 메시지를 알아준다면 좋겠다고요. 그러려면 사이버렉카만큼 쉽고 눈길을 끄는 언어로 얘기해야겠다, 도덕 교과서 같지 않게. (웃음) 인권을 존중하는 일이 정말 멋진 거고 힙한 거다! 느끼게 하는 일에 방점을 뒀어요. 멋진 영상이라면 누군가 ‘이 영상 좋다!’ 하면서 인스타그램 스토리에라도 공유할 수 있고, 그걸 본 누군가는 또 간접적으로 용기를 얻을지도 모르잖아요.
— 올해는 한겨레에서도 〈미워해도 소용없어〉 관련 기획 기사가 주기적으로 발행됐죠?
작년 캠페인이 끝나고 한겨레 기자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어요. 그분의 연락을 잘 기억하고 있다가 올해는 시작부터 함께하게 됐죠. 저희의 영상을 접하는 분들과 한겨레가 가진 독자층이 또 다를 테니, 조금이라도 더 많은 분께 이 캠페인의 메시지를 알릴 기회라고 생각했거든요. 한겨레에서 모든 영상 촬영에 동행해서 기획 기사를 발행했어요.
— 영상 콘텐츠도 의미 있지만, 텍스트로 정리된 기사도 분명 도움이 되리라 생각해요.
인터뷰 콘텐츠 촬영을 여러 번 하다 보면 내용이 다소 아쉬울 때도 종종 있어요. 그럴 땐 편집할 부분과 들어갈 부분을 쉽게 고를 수 있어요. 그런데 이 캠페인 인터뷰는 정말이지 전부 좋았어요. 모든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진심이 담겨 있고, 다 필요한 이야기였어요. 영상에 모두 담지 못하는 게 무척 아쉬웠기 때문에 한겨레의 제안이 반가웠어요. 영상으로 다 풀지 못한 이야기를 기사에 담을 수 있었죠. 또 기존 영상 시청자와 한겨레 독자 연령대가 다른 점도 도움이 됐어요. 기사를 접하고 생각을 조금이나마 달리하신 중장년층 독자도 계신 것 같아요.
— 작년 캠페인을 어떻게 자평하나요.
성공적이었다. (웃음) 저희로선 이례적으로 영상 시리즈의 조회수가 70만 뷰를 넘었어요. SNS에도 ‘미워해도 소용없어’라는 문구가 많이 올라왔고요. 뜨거운 반응을 보면서 지칠 때 힘을 얻곤 했어요. 또 혐오에 대항하는 언어가 일상에 좀 더 녹아들었다는 사실이 좋았습니다. 차별과 혐오를 마주하면 우울과 무력에 빠지기 쉽잖아요. 그런데 캠페인 이후 ‘혐오의 말을 들었지만 뭐 어쩌라고? 미워해도 소용없어!’라는 뉘앙스의 글이 SNS에 올라오는 모습을 보면서 기뻤어요. 명확한 대항 언어를 조금이나마 퍼뜨렸다, 사람들의 일상에 물 한 방울은 떨어뜨린 것 같다는 데서 성취감을 느낍니다.
— 올해는 ‘미워해도 소용없어’를 또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요?
더 많이 확산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계속 기회를 물색하고 있어요. 바이럴 콘텐츠부터 패션 화보 등 여러 방면으로 고민 중입니다. 작년 캠페인 영상 중 장서연 변호사 편에 쏟아진 반응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어요. ‘보고 울었다’ ‘너무 멋지다’ ‘덕분에 퀴어로서 긍정적인 미래를 꿈꿔볼 수 있어서 좋다’ 등이죠. 타 영상에 대한 반응과는 또 다른 결이었는데요, 아마 30-40대 퀴어의 모습이 등장해서인 것 같아요. 청소년 퀴어에게 30-40대 퀴어의 모습을 그려볼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불안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거든요. 나보다 먼저 태어난 퀴어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콘텐츠를 더 기획해 보는 것도 고민하고 있어요.
▲ 미워해도 소용없어 2022 장서연 변호사 편
“‘혐오의 말을 들었지만 뭐 어쩌라고? 미워해도 소용없어!’라는 뉘앙스의 글이 SNS에 올라오는 모습을 보면서 기뻤어요.
명확한 대항 언어를 조금이나마 퍼뜨렸다, 사람들의 일상에 물 한 방울은 떨어뜨린 것 같다는 데서 성취감을 느낍니다.”
— 올해는 유독 어려운 뉴스가 많죠. 서울퀴어퍼레이드의 서울광장 사용이 불허됐고, 퀴어문화축제 관련해 정치권의 무심하고 무지한 발언도 자주 들려요. 이런 시기 〈미워해도 소용없어〉 캠페인을 진행하는 마음을 듣고 싶습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한 것 같아요. (웃음) 너무 잘하고 싶어서 몰입하다 보면 소진이 되기도 하는데, 그 와중에 강력한 혐오를 마주하면 그래? 미워해도 소용없지! 하는 의지가 타올라요. 5월에 캠페인 영상 상영회를 준비할 때 딱 서울퀴어퍼레이드 서울광장 사용 불허 소식을 들었어요. 사실 상영회를 굉장히 작게 하려고 했어요. 기획부터 섭외, 촬영, 피드백까지 혼자 매니징하려니 체력적으로 좀 지친 상태였거든요. 근데 서울광장 불허 뉴스를 보고, 아니지! 크게 해야지, 무조건 크게 해야지! 라고 생각했어요. (웃음) 예산 때문에 다소 협소한 장소를 대관하려다가 마음을 바꿔 도로변에 있는 130평 되는 갤러리를 빌렸어요. 성소수자 의제로 진행되는 일들이 외곽으로 밀려나지 않기를 바라는 만큼, 커다랗고 멋지고 밝은 곳을 찾게 된 거죠. 행사에 참여하는 퀴어와 앨라이분들이 맘껏 환영받으시길 원했어요. 케이터링 업체 직원분과 지원 스태프분들께도 참석하는 분들을 VIP로 대해 달라고 여러 번 말씀드렸고요. 행사 당일 비가 엄청나게 내렸거든요? 그런데도 정말 많은 분이 참석해 주셨어요. 올까 말까 고민 중이었는데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오셨다고 하시더군요.
— 그런 모습을 보면 미워해도 정말 소용이 없는데 말이에요.
그때 또 느꼈어요. 혐오는 사랑과 인권을 끝까지 이길 수는 없다는 걸요. 혐오의 근거는 왜곡된 것인 데다가, 또 끝까지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혐오는 오히려 연대를 강하게 해요.
— 혼자서 캠페인을 끌어왔다니 분명히 지칠 때도 있을 거예요. 어떤 생각으로 계속해 나가나요.
정말 힘들고 소진될 때도 많지만 저는 간절해요. 한 명이라도 죽지 않을 수 있다면 하는 마음으로 해요. 내일이 기다려지지 않는 분이 있다면 말해주고 싶어요. 당신의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가 당신을 위해서 열심히 하고 있다고요.
글 김유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