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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3

매일 읽고 쓰고 듣는, 무라카미 하루키 라이브러리

무라카미 하루키를 둘러싼 모든 것들
‘도쿄핫플’과는 거리가 멀지만, 도쿄를 방문하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장소가 있다. 와세다 대학 내에 위치한 ‘무라카미 하루키 라이브러리’이다. 기념관이나 미술관도 아니고, 도서관 앞에 누군가의 이름이 붙은 경우는 흔치 않다. 맞다. 이곳은 우리가 알고 있는 도서관과는 좀 다르다.
Ⓒ designpress

시작은 2018년 11월. 무라카미 하루키가 도서관 설립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이 프로젝트는 내게 매우 중요한 일이라 명확하게 설명하려 합니다. 나는 40년 가까이 글을 써왔습니다. 집이나 사무실에 더 이상 보관하기 힘들 정도로 내 원고와 자료가 많이 쌓였습니다. 나는 자식이 없어서 나중에 그 자료가 흩어지거나 분실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 상황을 원하지 않습니다. 또한 새롭게 만들어지는 장소는 세계 문학과 문화를 교류할 수 있는 개방적이고 환영하는 분위기를 제공할 것입니다.”

기자회견에서 언급한 내용을 보면, 이 공간이 생겨난 이유를 몇 가지 짐작할 수 있다. 첫 번째는 40년 글쓰기 역사를 담은 기록 보관소와 같은 장소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도서관 개관에 앞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간 보관해온 방대한 자료를 모두 기부했다. 손으로 쓴 육필 원고와 일본을 비롯해 해외 각국에서 발행된 그의 저서, 소설을 쓸 때 참고한 책과 수만 장의 재즈 레코드까지. 와세다 대학 측은 “이 모든 자료들은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애호가들이 서로 교류하고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는 방식으로 구성, 전시될 것”이라 밝혔다.

Ⓒ designpress

‘무라카미 하루키 라이브러리’라 불리지만 이곳의 정식 이름은 ‘와세다 대학 국제 문학관’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지지만, 번역을 중심으로 세계 문학을 연구하는 장소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도서관 설립 소식이 전해지자 평소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을 자청했던 이들이 화답했다. 유니클로 설립자인 억만장자 타다시 야나이(Tadashi Yanai)가 도서관 건립 자금을 지원했고, 평소 친분이 두터운 건축가 켄고 쿠마(Kengo Kuma)가 공간 설계를 하겠다고 나섰다. 도서관 한쪽 벽면에는 개인과 협회 이름을 적은 나무 명패가 빼곡하게 붙어 있는데 이곳을 함께 만들어가겠다는 다양한 이들의 선언이 이어진 것이다.

 

기념관 아니라, 매일 찾을 수 있는 ‘도서관’

보통 한국의 경우 시나 소설 등을 쓴 작가의 작품을 기리는 형태로 문학관을 만든다. 작가가 태어난 생가를 문학관으로 꾸미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내부를 채울 콘텐츠는 원고와 사진, 발행된 책 정도로 빈약하다. 이럴 경우 한 번은 관람할 수 있지만 두 번 세 번 찾을 이유가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 도서관은 ‘기념관’이 아니라 ‘도서관’이라 기능을 설정했다. 문학관에 존재할 법한 작가의 흔적을 전시 형태로 보여주지만, 매일 찾아도 좋을 도서관의 기능도 추가한 것이다. 또 작가가 먼저 나서서 장소를 만든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일부 지자체나 학교와 같은 기관에서 진행할 일을 스스로 행한 것인데 “어차피 기념관을 만들 거라면, 나의 방식으로 만들겠다”라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육성이 들리는 기분이다. 이곳에 머물다 보면 그가 40년 넘게 추구해온 건강하고 규칙적인 일상- 매일 읽고, 매일 쓰고, 매일 듣는-을 방문한 누구나 경험할 수 있게 만든 공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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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로서의 건축물(Architecture as Tunnel)

기자 회견 이후 3년이 지난 2021년 9월, 무라카미 하루키 도서관이 개관했다. 작가는 1968년부터 1975년까지 7년간 와세다 대학을 다녔는데 이때 즐겨 찾은 장소로 알려진 쓰보우치 기념 극장 박물관 옆 건물이 도서관 자리로 낙점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도왔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의 소설에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의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듭니다. 익숙한 일상 공간 어느 한 쪽으로 터널 입구가 갑자기 열리는 경험을 하는 것이죠. 터널에 발을 들여 놓으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닫기 전까지 점점 더 깊이 들어가게 됩니다. 그 이후에 나는 터널에 발을 들이기 전의 사람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됩니다. 저는 이런 터널 같은 건축물을 만들고 싶다고 오랫동안 생각해 왔습니다. 이번에 무라카미 하루키와 공동으로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진짜 터널을 만들었습니다.

켄고 쿠마, 도서관 내부 한쪽 책장에 적혀 있던 ‘터널로서의 건축물(Architecture as Tunnel)’

한 달 전, 디자인프레스와의 인터뷰에서 켄고 쿠마는 도서관 프로젝트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씨는 개인적으로도 친구이고, 친구가 되기 이전부터 그의 작품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그의 소설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건축적입니다. 제가 건축에서 지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세계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는 의식이 굉장히 강한 작가이죠. 우리의 일상은 여러 가지 제약과 시스템에 둘러싸여 있지만 하루키 소설 속에 들어가면 그러한 것에서 자유로워지는 느낌이 듭니다. 제가 만든 건축물 안에 들어갔을 때에도 무언가 자유로워지는 느낌을 얻을 수 있는, 그런 것을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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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터널 같은 건축물을 눈으로 확인해 볼 시간. 유난히 날씨가 화창했던 5월 어느 날, 도쿄 와세다 대학 교정은 평온함이 감돌았다. 동문(east gate) 방향으로 걷다 보니 금세 단정하고 하얀 석재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진으로 보았던 부드럽게 물결치는 목재 조형물이 한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파도가 건물 입구와 측면을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거센 파도가 아니라 따뜻하고 연약한 느낌이 드는 파도 형상이었다. 원래 건물은 그대로 두고, 아주 간단한 설치물로 드라마틱한 효과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최소한의 건축’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켄고 쿠마는 20세기 건축을 대표하는 콘크리트와 철강, 모더니즘 건축과 거리가 먼 건축을 추구해온 건축가다. 자연과 어우러지는 작은 건축, 약한 건축, 최소한의 건축을 추구하며 언제든 자연으로 돌아가 쉽게 분해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해온 그다.

 

“인간의 몸은 원래 부드러운 것이라 딱딱한 소재에 둘러싸여 있으면 쉽게 피곤해집니다. 부드러운 몸을 피로하지 않게 하는 편안한 소재를 사용하는 것으로 건축은 점점 변해갈 것이라 생각해요. 부드러운 나무는 물론이고, 나무보다 더 부드러운 소재인 천을 건축 소재로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 designpress

건축물 입구로 들어서면 ‘와!’ 소리가 절로 나는데 3개 층 가운데가 뻥 뚫려 있기 때문이다. 둥근 아치형으로 잔뜩 구부린 터널 형태의 구조물이 지상 2층에서 지하 1층까지 쭉 이어져 그가 언급한 ‘터널로서의 건축물’을 실감하게 된다.

 

도서관이라는 명칭답게 이곳의 주인공은 물론 책이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40년 넘게 쓴 소설책과 그가 추천하는 책, 그의 친구들이 추천하는 책이 세심하게 큐레이션 되어 있다. 먼저 입구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동굴 모양의 구조물이 등장한다. 얇은 나무 판재를 둥근 아치 형태로 구부려 만든 구조물로, 양쪽 벽면에는 책장이 있다. 1층에서 지하층까지 계단형으로 되어 있어 오르내릴 수 있고 계단참에 앉아 책도 볼 수 있다. 계단과 책장을 결합한 형태이기 때문에 이곳을 ‘계단 책장(Stair Bookshelf)’ 이라 부른다.

계단과 책장 곳곳에 하얀 인형이 놓여 있다. Ⓒ designpress

왼쪽 벽면 책장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세계를 만날 수 있는 책이 가득하다. 초창기 책부터 각각 테마를 설정해 그의 책과 함께 비슷한 세계관을 경험할 수 있는 책을 배치해 두었다. 오른쪽 벽면에는 ‘당신에게 세계 문학이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세계 문학’이라는 주제로 소설가, 영화 감독 등이 꼽은 책을 두었다. <클라우드 아틀라스>, <블랙스완그린>을 쓴 영국 소설가 데이비드 미첼 (David Mitchell)이 추천한 문학 작품 옆으로 이창동 영화 감독이 추천한 책이 나란히 놓여 있다.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 데이비드 샐린저의 ‘나인 스토리(Nine Stories)’, 프란츠 카프카의 ‘심판(Der Process)’ 등이 있는데 감동스러운 것은 각각을 추천하는 이유까지 달아 둔 것이다. 일본어를 한국어로 번역해 보니, 이창동 감독이 ‘나인 스토리’를 추천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샐린저는 가슴에 지옥을 품으며 하늘의 소리를 전하려고 했던 작가입니다. 아홉 편의 단편소설은 모두 기묘하게 아름다우며, 그중에서도 ‘애즈메에게(Ezme-ni)’는 단편소설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움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 designpress

계단 책장을 가운데 두고, 1층은 ‘오디오 룸’과 ‘갤러리 라운지’로 나뉜다. 갤러리 라운지에는 데뷔부터 최신작까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희귀한 초판본부터 세계 여러 언어로 번역된 작품까지 다양하며 각 나라마다 표지가 달라 그 나라의 문화나 분위기를 느낄 수도 있다. 라운지 안으로 들어가면 작품을 발행한 시기를 기록한 연표를 볼 수 있다. 데뷔 첫 해인 1979년부터 현재까지 쓴 수많은 책을 한눈에 보고 나면, 소설가라는 직업은 단념하지 않고 끈질기게 견디어 나가는 일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책 한 권을 골랐다면, 평생 재즈 음악 애호가였던 그가 모아온 재즈 LP 레코드를 들을 수 있는 오디오 룸으로 향할 것. 그가 소설가가 되기 전에 재즈 바 주인이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1970년대에 피터 캣(Peter Cat) 이라는 재즈 바를 운영하면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모은 10,000장 이상의 컬렉션 중 일부가 이곳 오디오 룸으로 왔다. 유리 문을 열고 들어가면 좋은 기종의 턴테이블과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게 분명한 재즈 선율이 공간을 감미롭게 채우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곳에 놓인 테이블이며 의자 등의 스칸디나비안 스타일 가구는 켄고 쿠마가 빈티지 숍을 돌아다니며 하나하나 공수했다고.

무라카미 하루키 라이브러리 오디오 룸 Ⓒ designpress

오디오 기계 정보를 찾아보니 Luxman 턴테이블, Accuphase 앰프, Marantz CD 플레이어, Sonus Faber 및 JBL 스피커 한 쌍이다. 이 기종들은 모두 무라카미 하루키의 오디오 어드바이저가 직접 세팅했다고 한다. 그가 사용하는 기종과 같은 것은 물론이고 설정값도 같게 세팅해 이곳을 찾은 팬들에게 본인과 똑같은 사운드 환경에서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잠시 머물렀지만 어깨가 들썩들썩하고 기분이 좋다. 이미 몇몇은 아늑한 소파에 몸을 파묻고 하루키가 선사한 아름다운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 designpress

지하층으로 내려가면, 소설가의 서재를 그대로 재현한 공간과 소설 속에 등장한 간단한 음식을 판매하는 카페를 만날 수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자주 듣고, 아껴 읽고, 즐겨 먹는 음식을 그대로 옮겨 온 느낌이라 도서관 한쪽에서 그가 글을 쓰고 있다고 해도 놀랍지 않을 것 같다. 지하층이라고 해도 독서에 적합한 자연광이 내부로 흘러 든다. 사실 이곳은 지하층이지만 양쪽에 출입구가 있어 캠퍼스에서 도서관으로 진입할 수 있는 통로로도 존재한다. 화창한 날에는 테라스석에서 느긋하게 독서를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이내믹한 터널 형태의 구조물은 햇빛을 가리는 차양 기능을 한다. 어느 곳 하나 허투루 디자인하지 않았다는 실감이 느껴져 이곳에 있는 것이 기분 좋고, 오래 있고 싶고, 몇 번이라도 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카페는 와세다 대학 학생들이 운영한다. 작품에서 유래한 메뉴를 판매하는데 ‘계절 야채 드라이 카레’가 호평을 받았다고. 현재는 샌드위치와 도넛, 애플 타르트 등을 판매하며 커피는 무라카미 하루키 부부가 좋아하는 화려하고 깨끗한 풍미의 원두를 블렌딩하여 핸드 드립으로 제공한다. 카페 입구 쪽에는 피아노 한 대가 놓여있는데, 알고 보니 재즈 바 피터 캣에서 라이브 연주로 사용되었던 피아노라고! 자료를 얼마나 잘 보관하는지 감탄을 자아내는 부분은 또 있었다. 카페 한쪽에 위치한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작품을 쓰면서 참고한 책을 따로 모아둔 것처럼 보였다. 각 책마다 ‘건축학과 학생을 위한’ ‘일반 대중을 위한’ ‘건축/문학’ 등이 쓰인 라벨이 있어 얼마나 세심하게 책을 분류했는지 느낄 수 있다.

포켓 정원과 이어지는 지하층 Ⓒ designpress

사려 깊은 제스처, 사려 깊은 공간

도서관 2층에는 전시 공간과 녹음할 수 있는 스튜디오가 있다. 초창기에는 학교 건물이 어떻게 리노베이션을 거쳐 도서관이 되었는지 전시를 진행했다고. 현재는 전시가 진행되지 않고 있지만, 엘리베이터를 타는 입구에 귀여운 책갈피를 가져갈 수 있게 하는 등 이곳을 찾은 이들을 위한 세심한 제스처가 곳곳에서 느껴졌다.

입구에서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면, 위성을 연상시키는 조형물을 볼 수 있다. 뭔가 싶어 이를 설명하는 지시문을 찍어왔는데 이것마저 역사가 유구하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2002년에 선보인 ‘해변의 카프카’ 이후 이를 연극 연출로 유명했던 유키오 니나가와(Yukio Ninagawa) (1935-2016) 감독이 2012년에 연극 무대에 세웠다. 연극은 이후 5개 도시, 런던, 파리, 뉴욕, 싱가포르, 서울에서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서울이라고 하여 시기를 검색해 보니 2015년 11월 24일부터 5일간 당시 역삼동에 위치했던 LG아트센터에서 연극이 열렸었다. 당시 서울을 비롯해 여러 개 도시를 순회했던 ‘토성’ 네온사인 설치물을 버리지 않고 잘 보관했다가 이곳에 설치해 둔 것이다. 아마, LG아트센터에서 당시 연극을 보았던 사람이 이곳에서 토성 네온사인을 본다면 감회가 남다를 것이다.

사려(思慮). 생각 사, 이리저리 헤아려 볼 려. ‘사려’는 여러 가지 일에 대해 깊게 생각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사려 깊은 제스처는 사려 깊은 공간을 만든다는 것을 이곳에서 실감해 보길.

무라카미 하루키 그림 소장품. 2003년에 마코토 와다가 그린 재즈 피아니스트 길 에반스 Gil Evans Ⓒ designpress
Ⓒ designpress

글 · 사진 김만나 편집장

장소
와세다 대학 국제 문학관 (무라카미 하루키 라이브러리)
주소
도쿄도 신주쿠구 니시 와세다 1-6-1
시간
10:00 – 17:00
토, 일 카페 운영 10:00 – 15:00
(매주 수요일 휴관)
링크
홈페이지
김만나
15년간 피처 기자로 일했고, 현재는 네이버 디자인판 편집장으로 온라인 미디어를 경험하고 있다. 유머 감각 있고 일하는 80세 할머니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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