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26

거대한 거미 조각상에 담긴 모성애

루이스 부르주아 개인전 <유칼립투스의 향기>
크기도 형태도 강렬하다. 한번 보면 잊혀 지지 않는다는 거대한 거미 조각상 '마망(Maman)'은 현대미술의 거장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의 작품이다. '마망'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덕분에 '거미 엄마'라는 별명을 얻은 작가지만, 거미는 사실 그의 일부일 뿐이다. 여성 최초로 1982년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회고전을 연 작가, '고백 예술(Confessional art)' 장르를 개척하며 예술을 통한 치유가 무엇인지 증명한 작가. 현대미술 최고봉의 자리에 오른 그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의 복잡한 가정사를 들여다봐야 한다.
마망(Maman), 루이즈 부르주아, 1999

 

루이스 부르주아는 1911년 프랑스의 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부르주아에게 영어를 가르치던 영국인 가정 교사와 불륜을 저질렀다. 몸이 아픈 어머니가 묵묵히 슬픔을 감내하고, 아버지가 가족들 앞에서 불륜을 숨기지 않을 만큼 당당했던 모습은 부르주아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 어머니에 대한 연민 등은 부르주아가 여생 동안 예술로 자신의 트라우마를 탐구하고 치유하게 만드는 원천이었다.

 

뉴욕 웨스트 20번가의 자택 계단에서 내려오는 루이스 부르주아, 1992

 

수학, 기하학 등 “아무도 바꿀 수 없는 규칙”을 공부하며 마음의 평화를 얻었던 부르주아는 소르본 대학 수학과에 입학하지만 어머니의 사망을 계기로 예술로 진로를 전환한다. 그렇게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받은 학대를 비롯해 자신의 험난한 과거를 되짚어 보는 과정에서 여러 작품이 탄생했다. ‘마망’이 대표적이다. 프랑스어로 ‘엄마’를 뜻하는 이 작품은, 얼핏 무서운 거미를 거대한 크기로 제조한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거미 뱃속에 알들이 들어있다. 어미 거마미가 뱃속에 있는 자식을 지키기 위해 다리를 넓게 뻗고 있는 모성애의 한 모습을 포착한 것이다.

어린 시절 부르주아의 집은 오래된 양탄자(태피스트리)를 복원해 갤러리에 판매하는 일을 했다. 하루 종일 바느질로 닳고 해진 것을 고치던 엄마와 거미와 닮았다고 부르주아는 말한다. 엄마 거미가 질병을 퍼뜨리는 모기를 몸을 다해 막는 것처럼 작가의 엄마도 그러했다.

 

국제갤러리에서 열리는 루이스 부르주아 개인전 전경 ⓒ 국제갤러리

 

지금 서울 삼청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루이스 부르주아의 개인전은 작가의 말년에서 특히 주요하게 다뤄지는 자연, 기억 등에 주목한다.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작품의 이름이자 전시제목인 <유칼립투스의 향기(The Smell of Eucalyptus)>는 작가의 젊은 시절 기억과 연관되어 있다.

1920 년대 후반 프랑스 남부에 거주하며 병든 어머니를 간호하던 젊은 시절의 부르주아는 당시 유칼립투스를 약용으로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유칼립투스는 작가에게 어머니와의 관계를 상징하는 매개가 되었고, 특히나 작가 노년기에 두드러지게 표면화된 모성 중심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사물로 자주 등장했다.

나아가 부르주아는 생전 스튜디오를 정화 및 환기시키기 위해 유칼립투스를 태우곤 했다. 또한 작가에게 스튜디오는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회복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작가의 삶 곳곳에서 실질적, 상징적으로 사용된 유칼립투스를 보며 관람객은 부르주아가 평생 동안 천작한 미술의 치유적 기능에 대해 떠올리게 된다.

 
ⓒ 국제갤러리

 

이번 전시의 주축을 구성하는 작품은 <내면으로 #4(Turning Inwards Set #4)> 연작이다. 부르주아가 생애 마지막 10 여 년 간 작업한 일련의 종이 작품 39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르주아가 몰두했던 도상은 식물이지만 식물 이상을 상상하게 한다. 낙엽 및 식물을 연상시키는 상승 곡선, 씨앗 내지 꼬투리 형상의 기이한 성장 모습, 여러 개의 눈을 달고 있는 인물 형상, 힘차게 똬리 틀고 있는 신체 장기 등 작가의 조각 작품을 참조하는 추상 및 반추상 모티프들을 찬찬하게 보여준다.

 

Louise Bourgeois_TURNING INWARDS SET #4 (THE SMELL OF EUCALYPTUS (#1))
Louise Bourgeois_TURNING INWARDS SET #4 (SWELLING) ⓒ 국제갤러리
Louise Bourgeois_TURNING INWARDS SET #4 (I SEE YOU!!!) ⓒ 국제갤러리

 

이 밖에 ‘잎사귀 Leaves (#4)’, “너울(Swaying)’, ‘통로들(Passages (33))’ 등 동일한 원판을 기반으로 손수 칠해 만든 대형 판화 작품들도 함께 전시됐다.

 

Louise Bourgeois_LEAVES (#4)

 

지난 2010년 99 세를 일기로 타계한 부르주아는 전 생애 동안 예술적 실험과 도전을 거듭해 왔다. 예술을 통한 치유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이번 전시는 1월 30일까지. 입장료 무료.

 

 

유제이 기자

프로젝트
<유칼립투스의 향기>
장소
국제갤러리
주소
서울 종로구 삼청로 54
참여작가
루이스 부르주아
헤이팝
공간 큐레이션 플랫폼, 헤이팝은 공간을 만드는 사람들과 그 공간을 채우는 콘텐츠와 브랜드에 주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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